영화의 위로:못 보낸 원고 16. 비포선라이즈/원나잇 스탠드
두 영화는 2년 터울로 나왔다. <비포 선 라이즈>가 95년, <원 나이트 스탠드>가 97년. 이 영화들을 대학 시절에 봤다. 이 중 <원 나이트 스탠드>는 VHS 테이프로 갖고 있을 만큼 아끼는 영화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이 전 해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로 청춘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광고 전공자였던 나도 그의 감각을 좋아했는데 특히 음악과 장면의 조화에 감탄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는 스팅의 음악이 멋지게 사용됐고, <원 나이트 스탠드>에서는 웨슬리 스나입스가 걷는 장면에 흐르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자크 루시에의 재즈 버전으로 나온다.
대학 시절 <비포 선 라이즈>를 본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하룻밤밖에 시간이 없으면서 사설이 너무 길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영화라고 영화 홍보를 해대서 스킨십 진도가 쭉쭉 나갈 줄 알았건만, 웬걸 해가 뜨고 나서야 액션을 취했으니 다들 어지간히 답답했을 것이다. 밤 새 오가는 대화의 만찬을 음미하기엔 다들 너무 혈기왕성했던 시절이었다.
<원 나이트 스탠드>도 비슷하다. 둘 다 가정이 있다는 사정이 있지만 어찌 됐든 낯선 곳에서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 음악회에 가서는 번갈아가면서 뒷모습과 옆모습을 보면서 상대의 눈길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냈고, 강도 사건을 겪은 후엔 밤새 뒤척거리면서 위로하지만 결국엔 동틀 무렵에나 섹스를 한다. 그러나 어찌 됐든 두 커플 모두 하룻밤 안에 진도를 나아가 사랑을 확인 한다.
대학 시절, 하룻밤 사이 큰 실수를 저지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오리엔테이션, 연합 MT, 대면식, 축제, 졸업생 환송회 등등해서 좀 과하게 술을 마시거나 달뜬 분위기에 휩쓸려서 평소 그냥 알고 지내던 선후배, 동기와 우발적 섹스를 하고 급작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생면부지의 사람은 아니었다. 같이 수업을 듣고, 동아리방에서 만나고, 학생회실에서 웃고 떠든 사이다. 같이 밥 먹은 횟수도 제법 되고 시험 기간에 어깨를 맞대고 공부를 한 사이니 하룻밤 만에 연인이 됐다고 말하기엔 무리다. 어쩌면 대학 시절의 이런 우발적 하룻밤은 일상에서 쌓은 친밀감의 형질 전환적 사건이다. 전혀 모르던 사람과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첫눈에,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지는 환상을 갖고 있는 건, 이렇게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오페라 라보엠에선 루돌프와 미미는 촛불 빌리러 왔다가 불이 꺼져서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찾으면서 사랑이 싹튼다. 이몽룡과 성춘향도, 로미오와 줄리엣도, 인어공주를 비롯한 디즈니의 무수한 공주님들도 거의 첫눈에 반하고 이 사람이 내가 찾던 그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나보다 윗 세대 어른들도 종종 이런 말을 했다. “하룻밤에 만리성을 쌓는다.”
이게 가능할까? 이런 얘기의 뜻은 뭘까? 이 이야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쟁 중에는 하룻밤을 자도 성을 쌓고 대비를 하라는 대비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남녀가 잠시 만나더라도 깊은 정을 나눌 수 있다는 의미다. 전자는 조선 시대 때 왜구들이 쳐 들어오면 하룻밤만 숙영 하는데도 무조건 성 비스름한 거라도 쌓고 자는데서 유래했다고 하고, 후자는 하나의 민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민담은 내용이 대략 이렇다. 알다시피 예전에는 성곽 공사 같은 공공 토목 및 건축 현장엔 백성들이 동원됐다. 전쟁 중에는 민과 군의 경계가 없어졌고. 남편이 성을 쌓으러 가서 세월이 한창 흐른 어느 날, 아내 혼자 있는 집에 소금장수가 묶으러 온다. 아내는 소금장수가 맘에 들었는지 자기랑 살자고 한다. 예전에는 북방이나 변방으로 성을 쌓으러 가면 종종 그곳에서 죽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여하간, 소금장수는 그 아내가 맘에 들었는지 흔쾌히 승낙하고, 그날 밤 동침을 한다. 다음날, 아내는 편지 한 장을 써서 봉투에 넣은 후 남편의 옷 한 벌과 함께 짐을 꾸린다. 그리고 소금장수에게 부탁한다. 남편과의 옛정이 있으니 마지막 편지와 옷 한 벌을 성 쌓는데 전해달라고. 소금장수는 어차피 이 여자랑 평생 살 건데 그 정도 부탁이 대수이랴 싶어서 흔쾌히 수락한다. 결국 남편을 만난 소금 장수는 이차저차 해서 그렇게 됐다고 하면서 짐을 건넨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어 본다. 그 편지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신 대신 소금 장수에 일을 시키고 당신은 속히 돌아오세요.”라고.
결국 남편은 소금장수에게 잠시 옷을 갈아입을 테니 잠시 나 대신 성을 쌓고 있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한 명이 비면 금방 알 테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다.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부인에게 돌아간다. 이상이 민담의 내용이다. 우리의 예상과는 살짝 다르다.
이 얘길, 여인의 성문란함을 강조한 이야기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여성의 정절과 가족애를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다. 어찌 됐든 분명한 건 하룻밤 만에 소금장수가 여인에게 믿음을 줄 만큼 깊은 정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하룻밤 풋사랑도 그렇게 경계하셨는지도 모른다.
자, 그럼 이런 사랑이 지금도 가능할까? 두 영화의 배경인 90년대에도 그것이 가능할까? 그저 헌팅으로, 부킹으로, 클럽에서 눈 맞아서 그야말로 원 나이트 스탠드를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이 바뀔만한 엄청난 사랑이 가능할까?
두 영화를 뜯어보면 그 조건이 얼핏 보인다. 우선, 첫 번째 조건, 모험의 동반자여야 한다. 두 영화의 지리적 공간은 낯선 공간이다. 여행의 목적은 네 명 모두 달랐지만 낯선 도시에 내린다.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느는 파리에 사는 대학생이지만 헝가리에 사는 할머니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중이었고, 제시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유학 온 여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오히려 실연당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엔나로 향하는 중이었다. 둘은 기차 안에서 호감을 느껴 서로를 더 알기 위해 비엔나에 내린다. 둘 모두에게 비엔나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거다.
<원 나이트 스탠드>의 맥스와 카렌도 마찬가지다. LA의 잘 나가는 광고장이 맥스는 업무 차 처음으로 뉴욕을 찾는다. 카렌도 비슷한 이유였다. 둘은 서로 묘하게 끌렸고, 맥스는 다음날 비행기를 탈 때까지 그녀와 함께 보낸다.
제시와 셀린느는 비엔나에서 방랑자가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끝도 없이 얘기를 나눈다. 낯선 곳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비엔나를 탐험해 가는 동시에 서로를 알아가는 탐험이 병행된다. 맥스와 카렌도 함께 현악 4중주 공연을 감상하고, 소매치기를 무찌르면서 낯선 뉴욕의 밤을 보낸다.
두 커플은 서로에게 낯선 곳에서 유일한 동료였던 것이다. 모험의 파트너. 그랬기에 어떤 한 사람이 여정의 주도권을 쥐지도 않았고, 앞장서지도 않았다. 그저 앞에 놓인 낯선 세계를 함께 헤쳐 나가면서 가장 낯선 세계인 타인을 알아갔다.
두 번째 조건은 대화다. 우리는 평소에 연인이나 부부간에 대화를 많이 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거나 서로의 일상을 보고할 뿐이다. 경상도 부부가 아니어도 대화 내용은 비슷하다. 부부라면 날씨 얘기, 아이 얘기, 집안 경조사 얘기가 대부분이고 제법 오래 사귄 연인들도 일 얘기, 친구의 친구 얘기, 선후배 험담, 남에 연애 사정, TV 프로그램과 연예인 얘기가 대부분이다. 데이트 중에는 메뉴 고민, 어느 모텔을 갈지 고민하는 정도가 다 일 테고, 대학생이라면 전공과 시험, 취업, 진로 문제 등이 어쩌다 다뤄질 것이다.
셀린느와 제시처럼 종교, 철학, 문학,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주제를 하루 종일 얘기하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종교가 다른 커플이 불교와 기독교의 인간관에 대해서 서로 개방적인 자세로 대화하고 경청하는 건 그야말로 100분 토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누가 누구를 전도하거나 포교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섹스 후나, 점심 식사 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이런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정치 얘기도 마찬가지다.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사회 이슈도 여간해서는 화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을 안다는 기준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정보의 양으로 판단하곤 한다. 한 사람을 안다는 의미를 정보의 수와 양으로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관계가 오래됐는지, 그 세월로 알고 말고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같이 오래 있으면 그 사람을 많이 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전에 잘 알던 사람이라도, 심지어 함께 사는 가족이라도 그 사람이 살아낸 만큼 변하고, 그 변화를 통해 모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어머니는 대학 때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넌 내 자식이지만 너에 대해 점점 모르겠구나.”라고. 그래서 전 종종 어머니와 대학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최근 몇 년 전 미국 어머니 댁에 갔을 때도 와인 한 병을 다 마셔가며 얘기를 나눴다.
우리는 변한다.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도 변한다. 외모의 변함은 알아챌 수 있지만 - 물론 그것도 무관심하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어서 나중에 샌 머리칼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하지만 - 내면의 변화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정보로 환원되지 못한 그 사람의 변화는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대화는 그 사람의 과거와 지금, 미래를 공유하는 거의 유일한 사건이고, 더 나아가 그의 세계와 내 세계와 만나서 부대끼는 시간이다.
물론 서로 다른 세계와 세계가 만나 제3의 세계를 창조할지 아니면 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계를 인정하는 평화로운 공존의 세계를 창조할지 그건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전에 내 세계가 타인의 세계로 인해 훼손되거나 무너지지 않을까, 영화 <모털 엔진>처럼 타인의 세계에게 내 세계가 잠식당해 애써 가꿔 놓은 내 세계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부터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세계는 완고한 장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우리는 탄력적이지도 않고 관용적이지도 않다. 빠르고 쉽게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내며 살아낸 성인이라면 그럭저럭 자기만의 세계가 견고히 구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큰 탓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세계가 쉽사리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을까 늘 걱정하며 더 안으로 웅크려 든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나 자신은 결국 볼만한 것의 나열, 검색만 하면 나오는 이러저러한 정보 외에는 없게 된다. 내 세계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대화는 그래서 점점 소멸된다.
세 번째 조건은 응시다. 타인의 시선 앞에 보고 싶은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두 당사자. 그것이 응시라는 사건이다. 응시는 사물이나 사람을 뚫어지게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문에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응시(凝視)와 응시(鷹視). 앞의 응시의 응자는 “엉겨 붙다. 얼다(얼어붙다), 차다, 춥다.”의 뜻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응고라는 단어에 쓰인다. 반면 뒤의 응자는 매를 뜻한다. 그야말로 매의 눈으로 뭔가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다큐멘터리에서 보게 되는, 사냥하기 직전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금류의 눈빛을 뜻한다.
영어의 Gaze, 즉 응시는 전자다. 의도가 담긴 시선이다. 권택영은 <생각의 속임수>에서 응시를 “의도로 물든 시선”이라고 했다. 의도 여부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남녀 사이의 응시는 상당히 에로틱하면서도 끈적거리는 시선이다. 보는 나와 보이는 타자가 하나가 엉겨 붙을 정도로 진득이 보는 것, 보고 있는 타자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응시다. 보이는 타자조차 그 시선을 인지해서 기꺼이 시선의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반기는 것, 그것이 응시다.
그런 이유로 응시에는 집요한 의지가 필수다. 매의 응시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타자를 내 욕망으로 포획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담긴 시선이다. 이때, 보이는 타자는 보는 이의 시선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냥되는 순간이 덮치기 전까지 모든 여린 것들이 매의 시선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연인 사이에서의 이 응시는 기꺼이 사냥되기 바라며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이다. 전편의 글에 이어 말하자면, 날 묻어 뜯길 원하는 탐욕스러운 타자의 시선을 오히려 즐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시선 앞에 전시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이 두 번째 응시는 성립된다.
응시는 관찰하고는 다르다. 알다시피 관찰은 육안으로 살피는 것이다. 도구적 시력을 동반한 현상의 파악, 이것이 바로 관찰이다. 반면 응시는 정서적 시선으로 타자에게 그 시선을 고정시킨 채 타자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담긴 것이다. 응시가 다른 보는 행위와 차별화되는 행위인 건 보이는 대상은 보는 이를 볼 수 없고 오직 보는 이의 시선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그렇게 본다면, 또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됨을 선선히 허락한다는 건 그 어떤 육체적 전희보다 더 깊은 전희가 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오래 봐야 예쁘고, 자세히 봐야 예쁜지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풀꽃이 되려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응시의 시간들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레코드샵에서, <원 나이트 스탠드>에서는 콘서트홀에서의 시간이 그런 장면이다. 레코드샵에서는 서로가 힐끔 거리는 걸 알면서도 그 시선의 시간을 타자에게 준다. 즉 자신이 애정의 피사체가 될 기회를 타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시선의 사냥감이 되어주는 것이다.
콘서트홀에서의 맥스와 카렌은 더 노골적이다. 앞의 난간에 교대로 몸을 숙여 기댐으로써 내 뒷모습을 타자의 시선의 과녁으로 선선히 내준다. 결국 이 두 커플이 새벽녘에 섹스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대화와 응시라는 기나긴 전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희의 농밀함이 있었기에 섹스의 기억조차 깊고 아름답게 형성됐던 것일 테고 말이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서로를 잊지 못하게 된다.
네 번째 조건은 위험 감수다. 사랑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이자 탐험 일지 모른다. 모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감수하고 실천하는 행동이고, 탐험은 인류의 지식 체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 도전하는 행동을 말한다. 그 영역이 과학이든 지리학이든 말이다. 사랑이 모험이자 탐험이라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이자 미지의 영역을 알아가는 여정이라는 말이다.
사랑에서 감수해야 될 위험은 달라짐이다. 주체가 사랑을 선택하기 이전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또 내 일상도 그 사랑을 시작하기 전과는 같을 수 없음을 감수하는 것이다. 영화 속 두 쌍의 커플은 서로를 만나기 전과 후가 달라졌다. 자신의 결혼, 일, 그 이후의 연애와 결혼까지 이 한 번의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찌 보면 각자는 그날의 경험이 모험인지 몰랐지만 알고 보니 일상과 인생 전체를 뒤 바꾼 아주 위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모험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일상이 뒤죽박죽 되는 경험을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결국 사랑이라는 모험은 주체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하는 탐험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은 매번 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랑을 통해 매번 다른 나를 발견할 수밖에 없으니까. 만약 매번 사랑을 할 때마다 난 변한 게 없고, 그전의 나를 온전히 지켜내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만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번 새로운 사람과 사랑을 하는데 난 늘 하던 대로 사랑하고 변한 게 없다면 그건 사랑이 모험과 탐험은커녕 그 어떤 사건의 위상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사랑의 방식을 매번 복습하고 답습하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이 사건이고 모험이고 탐험이라면 주체와 타자의 자아는 다시 그려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어제의 나를 스스로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내가 했던 과거의 사랑조차 의심하게 된다. 제시는 미래에 겪는 사랑-이라고 믿었던-조차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고 맥스도 마찬가지다. 애가 초등학교 갈 때까지 살았던 아내와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주체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은 당연히 일상을 의심하게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한다면 그건 철학적 사건이다. 늘 보던 현상, 늘 살아내던 일상을 일거에 의심하게 만드는 철학적 사건, 그것이 사랑이다. 그 철학적 사건을 하고 싶다면 우린 기꺼이 낯선 나와 타자를 새로 발견하고 일상의 변화를 감수하는 모험, 탐험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기차에 올라타는 모험이든 기차에서 내리는 모험이든, 낯선 이와 기꺼이 낯선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모험이든 말이다.
두 영화에서의 하루는 우리가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시간의 압축이다.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진적인 모험을 두 커플은 하루 만에 끝낸 것이다. 우리가 설령 한 사람과의 첫 만남에서 사귀기로 약속하기까지 일주일, 한 달, 심지어 일 년이나 십 년이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낯선 타자를 알아가는 긴 모험의 여정의 시작, 겨우 기차에 탑승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여기서 속지 말아야 할 건 시간이다.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데, 관계가 깊어지는데 하루가 걸릴 수도 있고, 일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우리가 착각하는 건 시간의 양과 앎의 깊이와 질을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을 알고 사랑에 빠지는 데 일 분이면 충분할 수도 있고, 일 년도 모자랄 수도 있다. 양쪽 다 얼마나 타자에게 나를 개방하는지에 따라, 또 타자에게 얼마나 몰입하는지에 따라 그 시간과 관계의 질은 상대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처음에 이 두 영화를 봤을 때 우리들이 그랬듯이 지금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청춘들 또한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라우라처럼 “아.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지다니 너무 낭만적이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져서 낭만적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편견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지는 건 영화적 사건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니까.
단 하룻밤의 사건으로 세계의 역사가 바뀌기도 한다. 단 한방의 총격으로 국가와 세계의 역사가 바뀐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사건의 질이다. 그 사건의 질이 그 이후의 삶을 바꾼다. 두 커플의 하룻밤 사랑은 그 이후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사랑의 가치관을 바꾸고,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하고, 그 하룻밤의 사람과 만나 새로운 삶을 꾸린다. 제시와 셀린은 9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만났음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맥스와 카렌은 서로의 파트너를 그야말로 스위칭한다. 농구의 바꿔 막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맞는 짝을 만났으니 이 영화의 엔딩을 해피 엔딩으로 봐도 무방하려나? 제시와 셀린도 결국 나름 사회에서 자리 잡고, 결혼을 해서 애들 키우고 있으니 해피 엔딩일까?
겨우 한 막이 끝나고 새로운 막이 막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두 영화의 엔딩은 결국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선 물음표를 던지며 끝난다. 이들이 그 이후로 그야말로 백년해로하며 살았는지, 그 하룻밤의 기억을 잊지 않고 알콩달콩 살았는지 그건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들이 일상의 격변을 예상했음에도 새로운 사랑을 선택했고, 실제로 벌어진 격변을 담담히 수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영화는 낭만적인 하룻밤으로 시작해서 결국엔 그 뒤의 변화를 감당하는 것까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사랑은 결국 주체의 선택이고 그 뒤의 결과 또한 주체의 선택이자 감당할 몫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사랑은 타자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긴 여정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명확하지 않으니 우리 모두 사랑이라는 미스터리에 빠져든다. 각자의 방법으로. 그리고 그 매력에 흠뻑 빠져서 모두들 사랑을 하는 것일 테고. 결국 사랑 그 이후에 오는 연애와 결혼은 이 미스터리의 끝을 알고 싶어 하는 두 남녀의 겪게 되는 서스펜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이 모험을 하고 싶다면 열차에 올라타야 한다. 아니면 열차에서 지금 내리든지. 사랑이라는 열차에, 사랑이라는 플랫폼에. 어디로 갈지 모르고, 어딘지 모르는 그곳에 단 둘이 남는 모험. 그것이 사랑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