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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을까?

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13 . 마담 뺑덕(2014)

by 최영훈


미리 말하자면, 이 시리즈를 한 스무 개에서 서른 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각보다 기억에 남는 야한 영화나 어른 영화, 사랑 영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옛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서 그 영화를 다시 보진 않는다. 글의 씨앗은 십몇 년 운영한 블로그에 써 놓은 글이나 누가 주문하지 않았지만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써 놨던 원고들이다. 어디에도 보내지 못한 글, 팔리지 않은 글, 아무도 보지 않은 글은 쓸모없거나 실패한 글이 아니다. 그저 수신인을 못 찾은 편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택배 같은 거 아닐까?


실패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

그렇게 예전에 써 놨던 글과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실패한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랑은 실패한다. 아니, 성공한 사랑이란 것이 존재할까? 우리의 욕망은 엇갈린다. 누군가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존재를 찾고, 누군가는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내게 뭘 원하는지 캐묻는다. 그러나 연인이 결핍의 퍼즐 조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내게 원하는 게 뭐냐고 추궁당하는 상대방도 자신이 당신에게 뭘 원하는지 모른다.


결국, 내가 원하는 퍼즐 조각이 되어주길 원하며 사람을 이리저리 깎고 다듬는 것도,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말하란 말이야 하며 상대방의 멱살을 잡는 것도 다 부질없다. 내가 아닌 당신이 원하는 나는 될 수 없고, 나도 모르는 내 욕망을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다. 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사랑은 갈등을 부른다. 헤어진다. 그 뒤에 뭐가 남을까? 누군가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다른 이는 최악의 사람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수많은 연애 중에서 이 사랑만큼은 완전 삭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저 요즘 애들 말로 “졌(졌지만)잘 싸(싸웠다.).”를 되뇌며 끝난 사랑에 격려를 보낼 수도 있다. 반면 지난 사랑을 저주하고 그 사랑을 함께 한 이도 저주한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다며 그의 남은 인생을 훼방한다.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남은 인생도 그럭저럭 살아내기 위해, 끝난 사랑을 어찌해야 할까?


유출된 추억

영화 속 덕이를 보며 쑥덕대던 동네 아줌마들이 한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한다. 대전과 부산의 대학에서 강사 노릇을 할 때였는데, 그 해에 흑형이란 말이 대전 지역 캠퍼스를 점령했었다. 그전부터 유행하던 말이 유독 그 해에 대전에서 난리가 났었던 건 한 사건 때문이었다. 한 흑인 강사가 대전 지역 여성들과 섹스를 하며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그 영상을 한 포르노 사이트에 올려서 유출시켰었다. 그 사건이 유독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그에게 실형을 선고케 한 십 대 소녀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단은 그가 몇 명과 잤는지 정확히 모를 정도로 많은 한국 여성들이 그와 잤다는 사실에 평범한 한국 남자 대학생들이 호기심을 느꼈다. 두 번째는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촬영하는 사실을 알았거나 동의했거나 심지어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촬영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내색은 안 했지만 그의 피지컬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같이 밥 먹던 학생이 이 사건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다. 블로그를 보니 그때의 내 대답이 옮겨져 있다.


“사실 세상에 유출되지만 않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짜릿한 추억으로 간직될만한 경험이야. 나도 이 나이(당시엔 삼심 대 초반이었다.) 될 때까지 피부색이 다른 사람과의 경험은 없어. 기지촌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말이야. 아무나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그 흑인 강사가 잘 생기고 친절하고, 뭐 피지컬이 우리하고 비교도 안 된다며. 그럼 뭐 말 다했지. 난 솔직히 그걸 유출시킨 놈보다 거기에 출연한 여자 애 신상을 털려는 한국 남자 애들이 더 이상해. 솔직히 쪽팔려. 과거를 캐서 뭐하게. 지가 데리고 살 거야? 그럴 시간 있으면 헬스장 가서 쇠질이나 해. 흑형한테 괜히 열등감 느끼지 말고.”


그는 직장에서 평판도 좋았고 학부모들의 호감도도 높았다. 몇 개 국어를 했고, 가르치는 실력과 근무태도도 훌륭했다. 그래서 이 사건이 터졌을 때 한국인 동료 강사들이 그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적극 변호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두 개의 사건으로만 기소됐는데 하나는 미성년자와의 관계를 촬영한 건이었다. 이 건은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도 중범죄인 데다가 그 촬영물이 아동포르노여서 국제적으로도 큰 범죄였기에 범죄인 인도와 사법 절차가 신속하게 이뤄진 걸로 알고 있다. 다른 한 건은 자신은 동의하지 않았는데 촬영되고 유출돼서 정신적 충격을 입었다고 주장한 한 여성의 고소로 성립된 사건이다. 이 중 실형이 선고된 건 앞에 사건뿐인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대다수 한국 여성들이 이 남자를 고소하지 않았다. 이 남자와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그건 아니다. 이상하게 죄인이 되어버리고만 그녀들이 이 사건이 묻히길 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출되지만 않았다면 무료한 중년의 어느 날, 혼자 몰래 꺼내 회상하면서 은밀하게 쾌감에 젖을 수 있는 추억이 될 수도 있던 경험이었다. 평생 간직할 수 있었던 짜릿한 순간이 평생 따라다닐 낙인이 되어 버렸다.


세 번을 본 영화

<마담 뺑덕>은 실패한 사랑 이야기다. 사랑이 끝났기에 실패한 것이고 실패로 기억될 짓이 많아서 실패한 사랑 이야기다. 이 영화를 세 번 정도 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한 번? 아니 두 번인가? 캐치온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그 몇 년 후, 다른 영화 채널에서 다시 봤다. 밤 열 시 반에 해줘도 되는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찌 됐든 애는 잠든 뒤였다. 마침 이 영화에서 가장 핫한 시퀀스가 나오고 있었다. 마침 채널을 돌렸는데 그 데이트를 하는 시퀀스가 몽타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심학규와 덕이가 시내 데이트를 하고 초상화도 그리고 하이힐을 사고, 그걸 신은 채 학규의 자취방에서 섹스로 이어지는 그 시퀀스. 아내는 소파에, 난 소파 밑에 앉아 있었다.


"정우성 몸 좋더라. 당신도 봐 바." 아내에게 무심히 말했다. 둘이, 정말 담담히 봤다. 아내는 혈압 체크를 하기 위해 병원에서 준 24시간 장착하는 혈압계를 옆에 끼고 있었고, 난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선남선녀가 최선을 다해 섹스를 하고 있는데 부부는 이렇다 할 사고 없이 봤다. 혈압계를 장착한 마누라와 뭔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으니까. 짠했다. 뭐, 이것도 나름의 사랑의 방식이려나?


영화에서 정우성과 이솜의 정사 장면을 보면서 "격정적"이라고 느꼈다. <색계> 이후 모처럼 진짜 하는 듯 한 느낌이었다. 진짜 영화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순간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영화에서 심학규는 문화센터 소설 작법 강의에서 회춘해야, 사랑을 해야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했다. 회춘할 수 없는, 사랑할 수 없는 이들에겐 사랑의 이야기만 읽을 수 있을 뿐인 건가? 이렇게 담담히.


다른 글을 쓰기 위해 VOD로 세 번째 봤었다. 몇 번을 봐도 덕이도 학규도 이해했다가 못하길 반복했다. 학규의 이기적 욕망도 덕이의 순수한 집착도, 어느 순간 이해됐다가 못 되길 반복했다. 뜨겁게 몸을 나눴던 한 시절을 다르게 기억하고 의미를 두는 두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난감함은 사랑이 실패로 돌아가면 누굴 비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사랑은 결국 실패한다.

불행히도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다름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린 모두 다른 의미와 이해, 해석을 갖고 있기에 사랑은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랑은 같은 생각,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가 누군가의 생각에 맞췄거나 그 다름의 접점을 찾아 합의를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부부가 맞춰가며 산다는 건 결국 이런 말이 아닐까?


그 정치적이고 비즈니스적인 대합의를 통해 소위 사랑의 완수와 성공에 이른 사람들의 n번째 사랑 외에 모든 사랑은, 결론적으론 실패한 사랑이다. 그래서 그 실패한 사랑의 원인을 따져 묻기보다 그 사랑의 경험이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숭고한 것인지, 뜨거웠던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의 열정과 뜨거운 숨결이 사랑에 기인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보다 그 경험이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결국, 야구나 축구 해설자들이 늘 하는 멘트처럼, 결과론적으로 이 사랑을 다시 생각해 봤다. 만약 덕이가 임신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중절 수술을 하지 않았으며 집에 불이 나지 않아서 엄마가 죽지 않았고 자신도 화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 시절의 사랑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러니까 낡아빠진 작은 놀이 공원과 봄날의 벚꽃 말고는 이렇다 할 자랑할 거리도 놀 거리도 없는 지방 소도시의 지역 문화센터 강사로 온 몸매 좋고 잘 생긴 40대 교수와 한 계절, 다시없이 뜨겁게 치러낸 연애는 어떻게 기억될까? 이제 갓 이십 대에 접어든 경험 없는 아가씨는 세상의 모든 사랑의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랑에 노련한 사십 대 남자와 한 연애를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가 영화에서 봤던 그 모든 비극적인 사건을 걷어내고 나면 이 사랑은 어떤 사랑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할까?


그때 그건 뭐였지?

나이를 먹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짚어보며 든 생각이다. 이 생각 끝에 거의 이십 년 전 여름에 겪은 일이 생각났다. 집이 창원인 대학 후배가 늦은 봄에 연락을 했다. 부산에 취업해서 자취하는 동생을 보러 오는 김에 연락했다고 했다. 싱글일 때는 더 외출을 싫어하던 나였지만 모처럼 멀리서 온 후배를 그냥 보내기 민망해서 몇 번 차를 마셨다. 그 해 여름엔 후배가 맥주를 사달라고 했다. 컨테이너 박스 몇 개를 이어 만든 매장들이 연이어 있던 곳이었다. 그중 한 곳의 컨테이너 박스 위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 보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또 연락이 왔다. 이때 뭔가를 예감했다. 그 예감의 징후가 뭔지는 속 시원히 얘기하진 못하지만.


세 번째 연락이 왔을 때 같은 곳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가 두 번째 맥주를 시켰을 때 오늘 섹스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맥주의 차이가 뭔지는 정확히 얘기하진 못하겠지만. 세 번째 맥주를 시켰을 때 허벅지를 만져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다. 세 번째 맥주를 마시면서 그녀의 허벅지를 자꾸 흘끔거렸다. 그녀가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날 밤 둘은 섹스를 했다. 그 해 여름, 세 번을 더 만나 섹스를 했는데 세 번 다 지독히도 오래, 힘들게, 쉼표 없이 했다. 모텔 대실 시간을 꽉 채워서 섹스를 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시간하고 좀 쉴만하면 그녀는 어김없이 손을 뻗어 내 등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다가왔다. 땀과 체액이 범벅된, 힘 빠진 그것을 부드럽게 만지며 압박해 왔다.


그녀에게 다시 보자, 언제 보자는 연락도 없었다. 그녀는 일본에 갔다. 두세 달에 한 번쯤 카톡을 주고받았지만 그게 다였다. 어찌 됐든 그 해 여름 이후 욕망이 줄었다. 그해 여름처럼 지독하게 잘, 열심히, 뜨겁고 습하게, 소진하며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때 많은 걸 비워내고 쏟아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다시 연락이 올까? 그때 우린 왜 그랬을까? 일단 지난 십몇 년간 연락이 없었다. 그때 우린 뭐였냐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성의한 답이지만, 그렇다.


무의미한 결과론

세 개의 사건을 엮어서 다시 생각해본다. 흑인과 잤던 대전의 여자들, 덕이와 심학규의 한 시절, 내 뜨거웠던 여름. 그것들은 다 뭐였을까? 다 사랑이었을까? 사고나 해프닝이었을까? 뭐가 사랑이고 뭐가 사건이고 사고일까? 사랑의 형태는 없다. 실체도, 본 사람도, 집에 갖고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은 이런 것이라 말할 수 있고, 누구나 나름의 사랑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어떤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매번 사랑 앞에 엇갈리는 이유고, 모든 사랑이 궁극적으론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실패한 사랑이 후유증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인에겐 고통이고 집착이고 애욕일 수 있다. 사랑이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찾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다. 사랑이 올 때 그러하듯 끝날 때도 그 원인 찾기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듯, 모든 스포츠에서 패배한 팀이 그렇듯 우린 그 원인과 책임자를 찾는다. 승리 뒤에는 축하만 있지만 패배 한 뒤에는 비난과 비판이 따라온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여서 종종 결과론적으로 사랑을 돌아보곤 한다. 별 도움 안 되는 짓이지만 그렇게 한다. 사랑 중에 이걸 안 했다면, 저걸 안 했다면 더 좋은 사랑이었을지 모른다. 사랑이 끝난 후 그런 짓이나 저런 짓을 안 했다면 더 좋은 사랑, 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복기하고, 후회하고, 한탄한다.


우린 사랑을 할 때 저런 판단을 하지 못한다. 떠난 직후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이성의 진공상태를 만들기에 정작 저런 판단이 가장 필요할 때, 하지 못한다. ‘훗날 내가 어떻게 기억되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지금 사랑이 떠나게 생겼는데.’ 이런 생각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별 짓을 다한다. 울어도 보고, 화내도 보고, 붙잡아도, 설득도 해본다. 그러나 사랑이 내게 올 때 아무 이유 없이 왔듯이 갈 때도 그러함을 받아들이자. 차라리 저 사람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라자. 그게 실패한 사랑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다시 세 개의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영화 한 편, 사건 하나, 지독했던 여름. 모두 이러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저러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는 결과론적인 분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분석 대신 질문만 던질 수 있을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덕이와 학규, 그 두 사람이 만났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유배지로 적합해 보이는 소도시의 낡은 집에서 만났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세상이 사랑의 세상인지, 육체의 세상인지, 섹스의 세상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덕이가 집착한 것이 사랑이었는지 그의 육체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처음 맛본 쾌락이라는 새로운 세상이었는지 감독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녀의 복수심이 배신당한 사랑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연인의 육체를 상실해서 발생한 것인지, 그래서 그 남자가 없으면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은 절정이라는 세상이 무너졌기 때문인지 감독은 말하지 않는다.


잘 생기고 똑똑하고 피지컬 좋은 흑인과 잤던 한국의 이십 대 여자들에게 그 순간은 뭐였을까? 영상이 유출이 안 됐다면 그 경험은 어떻게 기억됐을까? 흑인은 무슨 생각이었고 여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흑인에겐 엔조이였고 여성들에겐 순정이었을까? 아님 그 반대였을까? 내가 겪은 여름은 뭐였을까? 예전에 다른 제자에게 조언해줬던 것처럼 그 후배도 일본으로 떠나기 전 자보고 싶었던 남자와 자보기로 결심하고 내게 접근했던 것이었을까? 그랬다면 괜찮은 기억이었을까? 살면서 두고두고 꺼내어 볼 좋은 추억이었을까? 그 해 여름에 본 내 등의 땀방울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으려나?


마지막 대답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그리고 이 나이 되니 드는 바람이 하나 있다. 길든 짧든 나와 함께 해줬던 연인에게 썩 쓸 만한 남자로 기억됐으면. 실제로 이십 대 때 연애했던 여자를 우연히 마흔이 넘어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꽤 기분이 좋았다. “오빤, 내가 만난 남자 중에 제일 섹시한 남자야.” 물론 그 친구가 나와 헤어진 이후 몇 명의 남자를 만났는지 물어보진 않았다. 좋은 추억을 위해선 때론 묻고 싶은 걸 참는 것이 좋다.


영화의 끝 부분, 덕이가 묻는다.

"교수님. 그땐 우린 뭐였어요?"

"그것도 사랑이었어." 심학규가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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