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못 보낸 원고 15. 감각의 제국(1976)
몇 년 전에 우연히 철학자 강신주와 영화 평론가 이상용이 함께 쓴 <삼십금쌍담>을 읽은 적이 있다. 나도 나름 난해하고 불쾌하다는 영화를 많이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삭제 부분과 분량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내가 대학 시절 봤던 것은 얼마나 삭제됐던 것이 궁금해서 무삭제판을 보게 됐다.
<감각의 제국>은 일본 문화 개방 이후 한국에 선보였다. 그때가 90년대 중반, 대학생활이 한창일 때다. 1936년에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1976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1990년대 중반에 봤던 것이다. VHS 비디오로 봤다. 그것 말고는 딱히 볼 방법이 없었으니까. 당시에도 시중에 떠도는 말로 무지막지하게 삭제됐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최소한 아홉 군데가 넘는다.
무삭제판을 보니 잘려 나갈 만했다. 그때의 기준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잘려나간 것들로 인해 영화는 단순한 치정극이 되어 버렸다. 영화 내용이야 워낙 유명하고, 세상에 던진 충격파 또한 여전하니 그 장면과 내용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강신주 선생이 말했듯 이 영화는 "사랑" 영화다. 사랑에 금기가 없다면 불륜도 금기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선 불륜에 대해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의 현상만 보여줄 뿐, 옳은지 그른지 말하지 않는다.
무삭제판을 다시 본 건 사십 대 중반이었다. 보는 내내 누가 날 이렇게 탐닉했었나 생각해 봤다. 나름 몇 명의 여자가 내 몸을 물고 빨고 했지만 생각난 건 딱 한 명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만 생각났다. 여주인공 사다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그녀가 보였다. 사다가 기치의 페니스를 꺼낼 때마다, 발기시킬 때마다, 입에 넣을 때마가 그녀가 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이 났던 "그녀"와 낯선 고장의 고즈넉한 민박에 묵는다면 나 또한 기치처럼 방 밖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날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라면 삼일 밤낮을 방에서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지금도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 여자가 인생에 있었다는 것이, 그런 여자와 사랑을 해봤다는 것이, 그런 여자에게 내 몸뚱이가 소유되었던 적이 있다는 것이... 뭐랄까... 묘한 뿌듯함 같은 걸 갖게 했다. 그 뒤 “용케도 그건 잘라서 안 줬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사다가 기치의 페니스를 자기 질 안에 넣을 때마다 짓는 표정이, 누워있는 기치를 내려다보며 서서히 몸을 움직이며 짓는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본 적 없던 남자는,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여자와 시간을 보내보지 않은 남자는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경험이 없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 표정은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영역이다.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은 질문을 남긴다. 이 책은 관객과의 대화를 싣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한 관객들은 많은 질문을 한다. 그중 한 관객이 이런 질문을 한다. “정신적 결합이 결여된 육체적 탐닉은 참 허망한 것 같다.”면서, 이성 간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교감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이 질문에, 강신주는 솔직히 콧방귀를 뀐다. “잠깐만요.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허무해 보이신다는 거죠? 그런데 이들처럼 탐닉을 안 해보시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소위 플라토닉 러브가 더 낫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군요. 하지만 육체적 사랑을 탐닉해 보지 않고, 곧장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라면 정말 안 됩니다.” 이 뒤에 신랄하게 정신적 사랑 운운하는 이들을 비판한 뒤 쌍욕 하듯 마무리 멘트를 덧붙인다. “자신감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플라토닉 러브예요.... 사랑한다면 접촉하세요 무슨 플라토닉이에요!. 개뿔.”
강신주의 말은 간단명료하다. 육체적 사랑에 저만큼 탐닉해 본 적 있냐? 그런 적 없으면서 플라토닉 사랑이 더 숭고한 것처럼 고상 떨지 말라는 거다. 작가가 이 정도 얘기했으면 더 이상 고상 떠는 질문자가 나오지 않을 법도 한데 몇 페이지 더 넘어가면 학교 선생이 더 고상한 질문을 한다.
“저는 교사인데요. 더러 섹스를 목적으로 여학생을 만나 성관계를 가지자마자 버려버리는 남학생들을 목격하곤 합니다. 성관계가 사랑에 별 도움이 안 되는데도, 왜 이토록 남자는 섹스에 골몰합니까? 선생이기에 앞서 여자인 저는 섹스를 사랑의 표현이라 믿고 이제껏 응해 왔는데요, 가끔 남자들이 하는 걸 보면 정말 배신감이 듭니다.”
자, 약간 점잖은 작가였다면 이 상황에서 아주 신중하게 대답했을 거다. 그러나 강신주는 돌아가지 않는다. “저는 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이상한 의식을 가진 걸 혐오해요. 섹스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음란한 사람일수록 섹스를 지나치게 신성시해요..... 섹스를 존귀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섹스가 사랑의 표현이라고요? 한 부부가 늙어서 더 이상 섹스를 할 능력이 없다면, 이제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권택영은 <감각의 제국 : 라캉으로 영화 읽기>에서 “신음이 말을 먹어치우는 것이 감각의 제국이다.”라고 했다. 이 말이 이 영화를 보는 법을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이 영화는 상식과 이성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다. 다른 이의 사랑을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런 영화를 보면서 고상한 척 플라토닉 운운하지 말길. 이해가 안 가는 건 말의 영역을 벗어난 현상이거나 그런 경험이 부재함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이의 이해할 수 없는 삶을 내 삶의 잣대로 평가해선 안 되듯이 소위 문제작들에 대해서도 그래야 한다.
저번 글, 마담 뺑덕에서 잠시 말했듯이 사랑의 정의도, 섹스의 정답도 모호하다. 그 답을 찾는 사람보다 그 답을 알고 있고 갖고 있다는 사람이 더 무서운 이유다. 자신이 파시스트가 됐다는 사실을 자신만 모른다. 낯선 것을 경험해보거나 차마 경험하기 무서운 것에 대해선, 그러니까 경험하고 나면 일상이 무너질까 두려운 경험에 대해선 솔직히 그러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우린 그 대신 그 경험을 터부로 치부한다.
물론 종종 어린아이처럼 낯선 경험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어떤 건 경험을 해야 말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구워 먹는 마시멜로우 맛이 궁금하다면 사서 구워 먹어 봐야 한다. 아침에 빵에 발라 먹으면 눈이 떠지는 누텔라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맛과 임팩트를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검색해봐야, 글로 배워봐야 소용없다. 천 개의 레시피를 검색하여 저장해놔도 하나의 요리를 직접 해서 먹어보지 않으면 자신이 요리를 잘하는지, 그 레시피의 맛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사랑과 섹스는 이보다 더한 것이다. 현재 진행형인 동사,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무엇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를 다시 본 건 사십 대 중반이었다. 연인과 해보리라 상상해 봤고, 하고 싶었던 건 다하고 나서 문제작을 다시 보니 다르게 보였다. 젊은 시절, 호기심에, 소문에 휩쓸려 중요한 장면을 다 잘려나간 것이어도 두근거리며 볼 때는 안 보였고 이해 못 했던 것들이 이해됐다. 장면의 결여 때문에 이해 못 했던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 버티고 앉아 봤었다는 걸 알았다. 이 영화의 감상은 여기서 갈린다. 이해가 아닌 공감할 수 있느냐 없느냐. 설령 공감하더라도 머리로만 하느냐 경험과 몸으로 할 수 있느냐. 여기서 갈린다.
예전 개그콘서트에 <유민상 장가보내기 프로젝트>라는 코너가 있었다. 마침 이 영화를 본 그다음 주에 아주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왔었다. 블로그에 메모해 놨었다.
유민상이 자기 자랑을 한다.
"요즘 유행하는 뇌가 섹시한 남자 아시죠? 저 아시죠? 개콘의 브레인. 일대백에서 우승해서 상금도 오천만 원 받았습니다."
그러자 신입 개그맨이 불안하게 말한다.
"저 선배님. 유민상 선배님이 오천만 원 있는 거 알면 여자들이 대시해서... 이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안 생겨요> 코너를 같이 했던 개그맨 송영길이 한마디 한다.
"야 이 한심한 놈아. 오천만 원 있지? 근데 뭐? 야. 너 통장에 얼마 있어?"
"저 5만 7천 원 있습니다."
"너 여자 친구 있어?"
"네."
"그럼 네가 낫네. 오천만 원 있는 놈보다. 그리고 뇌가 섹시해? 너 뇌랑 영화 보러 가냐? 뇌랑 팔짱 끼고 데이트하냐? 나 고졸인데 결혼했어."
아마 유튜브에서 이 개그를 했다면 “뇌랑 섹스하냐?”라는 멘트를 쳤을 것이다. 이 개그를 다시 생각해보니 한 프로그램에서 허지웅이 얘기했던, 여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다던 인문학 좀비들이 생각난다. 허지웅이 마녀사냥 출연 이후 헬스클럽에서 몸을 만들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뇌가 섹시한 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허지웅이 영화 <그래비티>를 보면서 "어차피 썩어질 몸. 많이 하고 살자."는 생각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글도 쓸 만큼 쓰고, 책도 읽을 만큼 읽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툭 뱉었다. 강신주의 독설과 같은 맥락 아닐까?
나이가 들면 감당 못할 유혹들이 있다. 감당 못할 모험과 격정도 있다. 마음도 있고 여러 종류의 여유도 넘쳐나지면 결국엔 몸이 감당 못 해 조용한 일상을 선택하게 된다. 그날이 생각보다 일찍 온다. 남자를 기준으로 섹스를 왕성하게-근근이 겨우겨우, 어찌어찌하는 것이 아니라-할 수 있는 세월은 길어야 30년이다. 그나마 이 삼십 년도 꽉 채워진 시간이 아니다. 종량제 봉투에 담긴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은 저 시간의 대부분을 개점휴업 상태로 보낼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대학에서 강사 노릇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가 사랑을 미루는 것이었다. 스펙 쌓기에, 진로 고민에, 아르바이트에, 심지어 사회봉사 따위에 팍팍한 현실 속에 불쑥 찾아오고 다가온 사랑을, 들이닥치는 마음을 거절할 때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 가면 연애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꼬박 3년을 책상에 붙들려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그 사랑을 미루는 청춘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사랑을 미루고 있었다. 스펙 쌓고 연애해야지, 공부 좀 더하고, 학점 관리 좀 하고 연애해야지, 졸업하고 취직하고 연애해야지, 차도 사고 집도 좀 장만하고 연애해야지.... 그 미룸이 끝도 없었다. 마치 사랑과 정력을 어디에 저축이라도 해둔 거 마냥 그렇게 미루고 있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니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설에 만났던 친척을 추석 땐 못 보기도 하고, 몸이 안 좋아서 아내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했던 친척이 한 달 만에 죽는 걸 보기도 했다. 지인의 부모님들은 이미 많이 돌아가셨고 남자 나이 마흔을 넘으면 갑자기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농담이 현실이 되는 것도 많이 봤다. 이런 대비 없이 느닷없이 맞은 이별의 목록은 끝이 없다. 이제 갈 때 됐지 했어도 가면 슬픈 것이 죽음이고 그 상실은 회복할 수 없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에게 해주지 못한 무엇 때문에 며칠, 몇 달, 아니 몇 년을, 아니 두고두고 후회한다.
처 고모부의 이야기다. 환갑이 넘으면, 아니 그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각방을 쓰는 부부들이 많다. 우리 부부도 여름이면 더 시원한 곳을 찾아 집 안을 유랑하듯이 잔다. 처고모님과 고모부님도 직업상의 이유로 취침시간과 기상시간이 달라 꽤 오래 각방을 쓰셨다. 그것이 생활이 되고, 인이 박혀서 그러려니 하고 보낸 세월이 수십여 년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처고모부님이 불쑥 “자야. 오늘 건너와서 잘래?”하고 물으셨다. 건너와서 잔다고 뭔 일 날 나이는 지났으니 큰 기대 없이 그저 아내의 온기가 유독 그리웠던 밤이었던 모양이다. 처고모님은 “하이고, 마, 새삼스레. 주무시소.”하고 넘어갔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딱 보름 뒤 처고모부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난 강신주의 독설과 분노에 공감한다. 뭔가 절박하게 갈구해보지 않은 사람, 그야말로 뭔가의 진맛을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들이 육체와 육체, 사람과 사람이 벌이는 사랑과 섹스라는 사건을 머리와 이성으로만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시쳇말처럼 인생의 어떤 사건은 겪어보지 전까지 판단을 미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사랑도, 섹스도, 아니 어쩌면 인생 전체도 그런 것이 아닐까? “니들이 게 맛을 알아?”하고 물으셨던 신구 선생님의 광고 속 일갈이 나이 들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청춘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에 더 욕심을 부려보길 바란다. 그 욕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간, 그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간, 그 욕심이 현실이 됐을 때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다.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때 얻는 경험은 그저 그런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또, 그렇기에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그래 봐야 한다. 삼일 밤낮을 연인의 품에서 허우적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찰나와 섬광 같은 순간의 도래 또한 그렇다. 영화 속 늙은 게이샤처럼 어느 순간이 지나면 남자의 눈길도 받지 못할 시간이 온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플라토닉? 서고 젖을 수 있는 동안엔 에로티즘이다. 바타유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