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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엇갈린다.

영화의 위로-못 보낸 원고 7 - 바람난 가족

by 최영훈

다스려진 가족의 욕망들

가족 갈등의 원인 중 하나는 각기 다른 욕망이다. 얼핏 같아 보여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르다. 이런 차이는 어떻게 해결될까? 물론 가족 구성원 모두의 욕망이 같아지면 되나 그건 불가능하다. 저녁 외식 메뉴 정할 때를 떠올려 보자. 여름 휴가지 고르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린 이런 갈등을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에 의지해 제법 무난하게 해결해 왔다. 가부장적이라는 건 말 그대로 아버지가 가족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 권력은 유교적 권위로 포장된 확고한 경제권에 토대를 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난과 많은 가족 구성원도 이 통합에 한몫했다. 형제 많은 집 애들이 철이 빨리 든다. 가난한 집에서 효자 난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왜 그럴까? 욕망의 조율이 학습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열심히 노동하는데 들어오는 자본은 적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욕망의 절제가 요구된다. 형제가 많은 집에선 자본이 쪼개져 분배되기 때문에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결국 철이 든다는 건 자신의 욕망을 환경에 조율해서 산다는 의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요새는 부부간의 욕망도 맞추기 힘들다. 왜 그럴까?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이 상투적으로 드는 원인은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욕망도 다양해지고 경제력의 원천도 다양해지면서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색깔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 IMF 이후로 남성은 고용불안에 빠졌고 여성의 사회 진출은 늘었고 성인이 된 자녀는 취업이 어려워졌고, 그렇게 각자의 살길을 찾아 고군분투하면서 내적인 화합이나 욕망의 봉합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점을 원인으로 들기도 한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 변화에 적응이 느린 부모세대와 자녀 세대의 욕망의 간극이 더 벌어졌다는 것이다. 요즘엔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사춘기가 와서 욕망의 가부장적 봉합은 더 어려워진다. 가족여행?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게 정상이다.

이렇게 개인의 욕망을 따라 제멋대로인 가족은 철이 없고 안 들었고 봐야 할까? 영화 <바람난 가족>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가족은 멀쩡해 보인다. 그러나 아이를 제외하곤 다들 성적인 불만족, 즉 성적 욕망의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오르가슴의 경험이 없다는 말로 표현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지 않고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서로에게 탄로 난 후에야 서로의 욕망이 엇갈려 있음이 드러난다. 이걸 스스로 대 놓고 처음 말한 사람은 시어머니다. <바람난 가족>에선 경험하지 못한 오르가슴으로 성적 욕망 하나만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건 실현되지 못한, 아니 절대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는 모든 욕망의 상징일 뿐이다.


사실, 그러니까 가족 구성원의 욕망이 다르고 엇갈리는 것은 정상이다. 그 욕망이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도 정상이다. 이 정상을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상”처럼 만들기 위해 찾아낸 해법은 소비다. 로버트 골드만의 <광고에서 사회를 읽는다.>에는 맥도널드 광고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아빠의 고향을 찾아온 가족이 어린 시절 아빠가 살던 집을 비롯해서 고향의 옛 모습을 찾는다. 그러나 모든 게 변해 있다. 그 와중에 애들은 배가 고프다고 한다. 아빠는 자신의 노스탤지어를 향한 욕망을 뒤로 미루고 아이들의 배고픔이라는 욕망을 채워줘야 한다. 엄마는 이런 갈등 상황에서 눈을 돌려 다른 풍경을 본다.


소비한다. 고로 봉합된다.

결국 옛 모습 그대로-원래 맥도널드의 인테리어는 유사 레트로다.-남아 있는 맥도널드에 가서 모두가 맥도널드를 먹는 것으로 광고는 끝난다. 이 광고 속 가족 구성원은 맥도널드에서 모두 흥분하고 즐거워한다고 골드만은 지적한다. 모두의 욕망이 햄버거 하나로 해결된다는 무서운 은유가 담겨 있다. 심지어 아버지는 고향 친구와 맥도널드에서 우연히 재회하기까지 한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욕망의 완벽한 해결 공간. 이것이 골드만이 맥도널드 광고에서 본 이데올로기다.

가족이 가는 식당 고르기는 모든 구성원의 욕망을 해결해 줘야 한다는 강박이 담겨 있다. 누구나 좋아하는 메뉴이거나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메뉴가 많아야 한다. 그래서 중국집과 삼겹살집이 안전한 것이고, 거의 모든 식당마다 술과 놀이방이 있다. 모두가 원하는게 있고 누구나 좋아하는 메뉴를 고를 수 있는 식당. 이것이 가족 외식 식당의 조건이고 맥도널드의, 다시 말하지만 이데올로기다.


소비를 통한 욕망의 봉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추석 연휴가 끝나면 홈쇼핑 매출이 올라간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시댁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야만 했던 아내들이 폭풍 쇼핑을 하기 때문이다. 연휴 마지막 날부터 홈쇼핑에선 여성 가을 의류를 선보이고 심지어 모피까지 판다. 온 가족을 위한 제품-조리도구, 가전제품, 보험-은 당연히 팔지 않는다. 오로지 욕망을 억압당한 한 주체를 향한 세일즈가 펼쳐질 뿐이다.


소비의 특정화는 우리의 욕망을 구체화시키고 범주화시킨다. 또 그날의 금기를 깨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수능이 끝나면 가전제품 회사에선 프로모션이 펼쳐진다. 의류, 메이크업 제품도 마찬가지다. 밸런타인데이는 연인의 욕망을 구체화한다. 실체가 없는, 정도를 모르던 사랑의 깊이를 확인하라고 바람은 넣는다. 이날만큼은 미뤄뒀던, 숨겨왔던 성적 욕망을 해소하라고 부추긴다. 심지어 성적 욕망의 표현을 여성이 먼저 해도 된다고 과거의 이야기와 신화를 빌려오기까지 한다.


제도화되고 거래된 욕망

다시 <바람난 가족>으로 돌아가 보자. 이들의 엇갈리는 욕망은 뭘까? 아내인 호정은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남편 영작은 부부가 오래 살면 다 그런 거라고 무시해버린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젊은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 영작의 입장에선 아내에게 평온한 일상을 제공했으니 오르가슴을 부여해줄 의무를 가볍게 외면할 수 있다고 여긴다. 반면 호정은 무용수라는, 즉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업이었던 자신의 욕망이 수용되지 못함을 고통스러워한다.


영작의 직업이 변호사이고 호정의 전직이 무용수라는데 우린 주목해야 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회의 법과 질서, 자본의 생산, 제도화된 욕망을 의미한다. 반면 무용수는 표현되는 순간의 욕망, 육체적 욕망, 제도권 밖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정의 불륜 상대는 이제 막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고등학생이다. 그 소년은 어떤 가치나 사랑 같은 말잔치 없이 오직 섹스만을 원한다. 섹스에 그 어떤 다른 욕망을 섞지 않고 섹스 자체가 욕망인 존재다. 그 고등학생 지운과의 섹스를 통해 호정은 비로소 임신을 한다. 제도 안에서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실현되지 않아서 입양을 택했었는데 섹스 자체에 몰입한 섹스로부터 아이가 임신된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거래된다. 계약된 관계는 서로의 욕망을 조율한다. 또 계약은 욕망을 일상적 재화로 전환시키고 제도화시킨다. 욕망의 계약과 제도화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욕망을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호정의 안온한 일상은 그녀의 무용가라는 꿈의 포기와 영작의 직업으로 획득됐다. 그녀는 무용 학원에서 가끔 춤을 출 뿐이다. 아이는 입양을 해서 키운다. 결국 영작과 호정, 아이까지 모두 제도로 묶이는데, 바로 이 점이 서로의 욕망이 불안하게 엇갈리는 이유다. 그래서 입양된 아이 또한 자신의 위치를 불안해하다가 불행하게 살해당한다.


이 비극 이후 이 가족은 해체된다. 시아버지라는 가부장의 죽음, 제도로 가족이 된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서로를 묶었던 가족이라는 제도가 붕괴된다. 시어머니가 이 본격적인 붕괴의 전조를 알렸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의 동창-15년 만에 오르가슴을 안겨준-과 결혼을 선언한다.


억압된 욕망은 깨진다.

결국 <바람난 가족> 우리가 무엇으로 묶여 있는지, 그 묶음이 가능했던 건 서로를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스스로 제도 안으로 들어갔던 건 아닌지, 그래서 주체 스스로 욕망을 억압하며 살았기에 그 제도의 유지가 가능했던 건 아니었는지 가족이라는 제도의 진정성에 대해 심각하게 묻고 있다.

우린 스폰서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제공하면서 대신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교환이다. 이 상황에서 욕망의 주체는 그야말로 대상화되면서 사라진다. 은유적으로 아니라 진짜로. 그야말로 성적 대상 A가 되어 버린다. 돈을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을 사물화 시킨다. 만나는 횟수와 행위에 따라 돈이 정해진다.

누군가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는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면 그 둘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하는 것이다. 힘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그 힘이 그야말로 육체적 힘이든, 폭력이든, 경제력이든, 제도적(결혼)/문화적 힘(관습)이든 말이다. 그러나 어떤 힘이든 그 균형은 사실 깨지게 되어 있다. 육체는 늙으면 쇠하여지고, 경제력도 시장의 장난에 날아가기 쉽다. 제도와 문화 또한 변해서 문화의 변화에 따라 제도가 변하기도 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일본의 황혼이혼, 은퇴 이혼이 21세기 들어서 갑자기 성행했다. 그래서 이혼당할까 봐 아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은퇴한 남편을 지칭하는 젖은 낙엽 증후군이라는 말도 나왔다. 부부나 연인 사이의 욕망과 권력의 불균형, 불만족을 제도적 힘을 비롯한 다양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고 있었는데 그 균형이 다시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관계도 달라지고 깨진다.

그럼 우린 이 깨짐의 해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예전에 봤던 CSI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CS I 라스베이거스의 부검의는 연로한 노인이다. 그 노인에게 한 직원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과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하다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결혼만큼 이혼이 흔하고, 그만큼 여러 사람과 여러 번 결혼하는 게 흔하니 말이다. 그래서 한 사람과 오래 살고 있는 그 어른의 비결이 궁금했던 것이다. 비결은 단순했다. “7년에 한 번씩 따로 휴가를 간다.”

앞뒤의 대사가 더 있겠지만 이 대사가 잊혀지지가 않는다. 우린 가족이기에 매번 같이 여행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가족 구성원의 욕망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그러는 것이 정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가부장의 말을 따른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원하는 게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유명 휴양지마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 이유다.

과거에는 가족 중 의견이 다를 경우 아버지의 권위로 제압했다. 정치적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요즘엔 정치적 견해에서 휴가지 선택까지 다른 게 당연하고 그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자식들이 성장해도 집안이 조용하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러니까 포장된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는 갈등이 생긴 후 봉합을 위해 노력할게 아니라 애초에 다름을 인정하는 게 일을 더 쉽게 한다. 당연하게 쥐고 있는 욕망의 주도권이 내가 옳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제도, 문화, 경제력 등으로 발생한 헤게모니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나랑 같을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곱게 접어두는 게 낫다. 이십 년 넘게 같이 살지만 서로 휴일을 다른 형태로 보내는 게 정상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쇼핑하고 싶은 쇼핑을 가고 집에서 한가하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그러면 된다. 우리 집이 그렇다.


표현을 허하라

욕망의 표현도 중요하다. 우린 욕망을 일상의 문법과 방법 안에서 해결하려 한다. 그러면 늘 욕망의 잔여, 찌꺼기가 남는다. 일상은 상징체계 안에서 대안을 제시할 뿐이니까. 관습과 터부가 공존하는 그 안에서 말이다. 우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스스로 알고 그걸 말해야 한다. 성적인 욕망은 두말할 것도 없다. <바람난 가족>에선 그걸 말했는데 외면당했고, 소외당했던 두 여자가 나온다. 그동안 남자들은 자신의 욕망에는 충실한다. 바람을 피우고 술을 마신다.

주체와 타자의 사물화

또 하나, 우리가 평온한 일상, 성공적인 삶, 성공적인 결혼 생활, 성공적인 연애를 획득하기 위해 내 욕망을 담보로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이것이, 한병철의 말을 빌리면, 주체의 사물화, 타자의 사물화다. 타자의 사물화는 교환 가치로만, 자신의 페이스 북에 좋아요, 로만 표시되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주체의 사물화는 더 무섭다. 타자도 내가 원하는 걸 주는 사람이고 타자가 원하는 날-엄밀히 말하면 외모, 젊음, 육체, 시간-대신 내어주는 것이니까요. 여기엔 당연히 에로스가 없고 계약만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인간이 동산과 부동산으로 전환되는 사건이다.


에로스는 사치품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욕망을, 특히 에로스를 일상 밖으로 몰아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가정이나 아주 오래된 연인 사이엔 이런 욕망의 공간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야말로 반성해봐야 한다. 사실 이런 고정관념은 한국 멜로 영화가 구축한 신화 탓이다. 예를 들어 <해피 엔드>를 보라. 외도 상대는 사진작가이자 인테리어 하는 사람이다. 집도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자꾸 이 외도남이 일상의 것을 끌고 들여온다. 아이의 물건도 사고 여자의 물건도 들여놓으려 한다. 그러자 여자는 불같이 화를 낸다. 이 공간은 환상의 공간이어야 하니까. 가정은 일상의 공간이다. 평범한 아파트고, 흔하디 흔한 가정집이다. 두 공간은 분리되어야 한다. 환상을 위해.


<바람난 가족>에서도 그렇다. 남편 영작의 불륜 상대는 예술하는 사람이다. 사진작가인가 디자이너인가 그럴 것이다. 그 여자가 사는 공간은 휑하다. 매트만 바닥에 깔려 있다. 당연히 영작의 집은 전형적인, 소위 말해 중산층 가정이고. 이 공간의 대조는 불륜, 바람, 일탈의 환상을 진부하게 구축한다. 그러나 우린 이걸 알아야 한다. 특별한 사람이랑 바람을 펴서 바람이 짜릿한 게 아니라 바람이 짜릿해서 그 사람과 공간이 탈 일상적인 것이다.


모텔의 전략도 마찬가지다. 연인이 모텔을 소비하는 이유가 바로 그곳이 오로지 섹스만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88만 원 세대의 서두에서 안타까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에로스를 할 일상적 공간이 없어서 에로스를 일상적 공간이 아닌 에로스적 공간으로 밀어내서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점. 이 점이 그 이후로도 우리가 에로스를 일상에서 밀어내고, 가정에서 밀어내는 원인이 된다. 대학 때부터 그렇게 학습됐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이건 보수적인 프레임이다. 에로스, 그리고 욕망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된다. 그래야 일상이 짜릿해진다. 나도 상대도 특별해지는 거고 평범한 자취방도 환상적, 퇴폐적 공간이 된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가나 디자이너와 같은 사람들도 보수적일 수 있고 공무원, 군인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일탈적일 수 있다. 그 일탈적 공간과 사람을 에로스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런 공간과 사람이 에로스를 만드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전자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에로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에로스는 특별하고 감성적이고 일탈적인 사건이라고 최면을 건다.


사랑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도 아니고. 그래서 시간과 기록에 집착하면 사랑의 본질은 어느새 그 두터운 먼지 속에 숨겨진다. 어쩌면 사랑은, 영화 대사처럼, 오늘만 보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살아 있기에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일상과 역사의 맥락으로 갖고 들어와 자꾸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 에로스 그 자체를 만끽할 시간이 우리에겐 그렇게 많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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