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난다. 어찌 됐든 우린 결국 죽으니까. 백년해로의 해피엔딩으로 사랑이 끝난다면야 사랑의 끝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백발이 오기 전에, 심지어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사랑의 종말을 고하곤 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랑의 종말을 고하지 않고 오히려 숨긴 채 몰래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사랑하던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과 그 지겨워진 연인 몰래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면서 옛사랑을 유지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악할까? 둘 중 누가 더 욕을 먹을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영화는 극적이어서 여간해서는 이별을 고하는 장면 따위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다. <500일의 썸머>처럼 고백-연애-대차게 차임-전전긍긍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대서사를 다룬 영화도, 이별이 너무 고통스러워 사랑했던 기억을 잊으려 몸부림치는 <이터널 선샤인> 같은 영화도, 이별의 그 순간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봄날은 간다.>와 같은 영화가 생각만큼 흔치 않다는 말이다. 특히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정말 흔치 않다. 별 일 없이 살다가 어느 날 지겨워져서, 또는 시댁 식구와의 갈등 때문에, 또는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이혼하게 되는 부부를 다룬 영화는 거의 없다는 것. 그건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불륜은 드라마틱하니까
대신 한국이든, 미국이든 불륜을 다룬 영화는 차고도 넘친다. 남편이 바람나서 집을 나갔거나 돈 벌러 객지로 나간 남편이 밖에서 뭔 짓을 하고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적당히 눈 감아 주는 얘기도 많다.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서 가정을 버리고 떠나는 남편과 아내의 얘기도 많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안정적인 가정을 떠나는 한 인간의 방황 이야기이자 그 방황에 저항하여 가정이라는 견고한 성을 지키려는 또 다른 인간의 투쟁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투쟁은 우리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사랑을 유지해나가는 이야기보다 사랑을 지키고 뺏는 투쟁의 한 복판이 관객을 끌어들이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은 동서양의 감독들은 잘 알고 있다. 중세 시대의 공성전처럼... 이 투쟁의 전장을 제3자 입장에서 보는 건 흥미로우니까. 그러니 잠시 충고 아닌 충고를 하자면 자신의 연애 상담이나 이별의 아픔을 굳이 남에게 말할 필요 없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도. 특히 이별의 아픔일 경우, 의외로 사람들은 남에 불행에서 쾌감과 자기 위로를 얻는다. 굳이 내 아픈 사랑으로 달인 보약을 다른 사람 마음에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복수는 누구를 향하나?
<해피엔드>와 <언페이스풀>은 살인으로 불륜을 끝내 버리는 영화이자 살인자가 잡히지 않는 영화다. 살인자가 불륜의 피해자인 남편이기 때문일까? 두 나라의 감독들-에드리안 라인, 정지우-이 각 나라의 정서상 불륜의 피해자가 범죄자가 되는 것까진 용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또 두 나라의 문화권이 공교롭게도 불륜에 관대하지 않은 나라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이 비슷한 영화의 차이를 보기 위해 우린 두 영화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의 대상이 다르기에 그 죽음을 통해 지켜내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살인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두 나라의 불륜과 가정에 대한 시각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페이스풀>의 남편은 불륜남을 죽인다. 계획은 고사하고 우발적 살인이다. 사실 살인 장면이 너무 단순해서 죽은 사람이나 죽인 사람이나 너무 넋 놓고 있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된 건 아닌지 실소가 나온다. 솔직히 분노에 비해 너무 허술한 살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이 워낙 이런 장면에 익숙하지 않은 양반이고, 또 살인 자체가 영화에서 남편의 분노를 표현하는 유일한 장면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우발적으로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해피엔드>의 살인은 치밀하다. 그저 혐의를 벗어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혐의가 불륜남에게 가도록 다양한 장치를 한다. 아내의 살해 현장에서 불륜남의 체모와 그의 칼이 살해도구로 발견된다. 이 이상 완벽한 증거가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알리바이까지 철저하게 만들어 놓는다. 결국 남편은 혐의를 벗어나 아이와 낮잠을 잘 정도의 평온한 일상을 회복한다.
<언페이스풀>에서는 살해 뒤에 불안한 일상이 이어진다. 아내는 불륜남이 죽었다는 걸 알고 그 살인자가 남편이라는 것도 짐작한다. 경찰도 혐의점을 찾아 남편을 찾아온다. 영화의 끝까지 남편이 잡히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관객들은 이 부부가 자수를 했거나 어딘가 숨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다양한 추측을 가진 채 영화관을 나올 수밖에 없다. 또, 그렇게 두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두 남편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왜 그랬어요? 왜 그 사람을 죽였죠?”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나도 저런 상황이면 저렇게 분노할까?
분노의 이유가 다르다.
이 두 영화를 모두 본 관객도,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는 남자도 이 두 주인공에 공감하는 건 쉽지 않다. 그저 영화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영화 속 사건을 자기 일처럼 여겨 분노에 부르르 몸을 떨거나 “아, 깔끔하게 잘 죽였네. 개운 한대.”하는 남자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게다가 두 영화 속 살인의 형태와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살인에 담긴 여러 의미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오히려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챔으로써 어쩌면 두 나라의 가정에 대한 정의, 불륜에 대한 정의,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살인에 대상이 달라지는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살인의 대상을 먼저 생각해보자. 얼핏 보면 <해피 엔드>와 다를 바 없는 치정극이다. 그러나 우린 차이를 보기로 했다. 누구를 죽였는가? <언페이스풀>에서는 불륜남이고 <해피엔드>에서는 아내다. 게다가 <해피엔드>에서는 살인의 혐의가 불륜남에게 가게 한다. 반면 <언페이스풀>에서는 누구에게도 혐의가 가지 않는다. 아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한다. 심지어 아내도 남편의 살인을 짐작하지만 신고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건의 발전의 형태가 다른 이유가 뭘까? <언페이스풀>에서의 불륜은 사이좋은 부부와 가정을 흔드는 해프닝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화목한 가정의 풍경과 개구쟁이 아들과의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유다. 심지어 남편의 직장 또한 가족적인 분위기의 직장이다. 그래서 조직에서 배신으로 의심되는 행위가 일어났을 때 상당한 갈등이 발생한다. 결국 <언페이스풀>에서의 살인은 가족과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낯선 외부자를 제거하는 명분 하에 행해진, 일종의 척결이다. 그래서 미국 관객들은 이 낯선 외부자를 제거하는 남편의 심정에 공감했던 것이다.
에로 영화로 잔뼈가 굵은 에드리안 라인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미국 관객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공격과 침입, 저항이 있을 땐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미국인들이 순식간에 하나가 된다는 것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매력적인 프랑스 배우를 불륜남으로 캐스팅했는지도 모른다.
반면 <해피엔드>에서는 부부만 나온다. 아기가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단지 아내의 일탈 행위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장치의 구실을 할 뿐이다. 처가도 시댁도 나오지 않는다. 한국 가정과 가족이라면 의례히 한 두 장면 나올법한 그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의 동창이나 친구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감독은 더 무섭게도, 그녀의 장례식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남자이자 불륜남, 남편, 아내, 이 세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이를 통해 이 불륜은 아주 사적인 분노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관객들은 한 여자의 죽음과 엄마를 잃을 아이의 고통, 딸을 잃은 장모의 고통, 며느리를 잃은 시어머니의 황망함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오로지 남편의 분노에만 몰입하게 된다.
초점의 차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있다. 두 영화 모두 남편의 분노의 당위성 획득을 위해 섹스를 절묘하게 사용한다. 철저하게 섹스를 쾌락이자 판타지로 그려냄으로써 “사랑”이라는 숭고한 감정을 제거해 버린다. 두 여인들이 마치 쾌락의 노예가 된 것처럼 불륜남과의 섹스에서의 여성의 행위와 능동성을 다양한 기법으로 연출함으로써, 데이트의 친밀한 감정이나 연애의 과정을 섬세하게 나열하여 섹스라는 행위에 사랑의 정당성과 낭만성을 부여하는 대신, 섹스의 쾌락적인 성격을 극단적으로 부각한다. 이를 통해 두 남편의 분노와 살해에 관객은 충분히 공감한다.
그 대조가 더 도드라져 보이도록 남편과의 섹스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묘사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언페이스풀>은 보수적인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별을 초월한 모든 미국 관객으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을 의도한 것이라면 <해피엔드>는 철저히 남편의 배신감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미국의 가정과 역사
우리는 종종 미국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이자 자유주의적이고, 한국 사람들은 집단주의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영화를 보면 정 반대로 보인다. 미국 남편이 훨씬 집단주의적이면서 보수적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 남편은 개인주의적이면서 사랑에 죽고 사는 감성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두 나라의 감독이 흥행을 위해서 두 나라의 국민성과는 정 반대되는 설정을 한 걸까? 우린 두 영화가 독립영화나 예술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두 영화가 아주 보편적인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 사람들은 가족의 가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봐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혼도 이혼도 쉽게 하는 것 같지만 가족과 가정의 가치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추석에 귀향길에 오르듯이 추수 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는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공항마다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가 <나 홀로 집에>와 <다이하드>에서 봤듯이 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다이하드>를 액션 영화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필수 영화로 분류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심지어 시나리오 작가인 크리스 드 수자조차 크리스마스 영화라고 자평했을 정도.
<언페이스풀>에 나오는 가정, 즉 미국의 가정과 집은 가족의 역사가 담긴 도서관이자 박물관이다. 사실 모든 미국 가정이 그렇다. 우리가 종종 영화에서 보듯이 미국의 일반 가정집에는 무수히 많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최근에 나온 아이패드 광고를 보면 할아버지의 결혼식 비디오테이프조차 보관되어 있고, 할아버지 집 곳곳엔 손자, 손녀의 사진이 거의 도배되어 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상당히 한국적인 정서인,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억하는 광고 내용에 담긴 정서를 아주 전형적인 미국적인, 그것도 아주 보편적인 정서라고 봐야 한다. 그런 이유로, 결국, 미국 남자들은 우발적으로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죽이는 남편에게 공감할 수 없다. 남편의 성공을 뒷바라지하고 자녀를 잘 키운 성실한 아내이자 엄마였던 여자, 우리 가족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온 그 여자를 단 한 번의 실수를 했다고 죽인다고? 그건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딴살림과 소외에 대한 분노
한국 관객들은 오래된 불륜에 분노의 포인트를 갖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관계”의 시간과 깊이에 분노한다. “바람”이 아니라 “딴살림”에 대한 분노다. 여기에 우리만의 정서인 정이나 의리 같은 감정이 더해진다. 또 여기에 IMF라는 상황에서 직장을 잃은 가장이라는 설정이, 남편의 소외감과 배신감에 더 동조의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결국 남편의 계획적이고 폭력적인 살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의 완벽한 범죄에 분노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혐의를 옴팡 뒤집어쓴 불륜남을 고소하게 여긴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의 두 나라의 관객은 두 영화 속의 불륜을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으로 여긴다. 한국의 불륜은 익숙한 이와 행하는 반복된 일탈이라면, 미국의 불륜은 이방인과 이질적 문화에 순간 매혹되어 낯선 세계로 빨려 들어간 순간적 일탈이다. 그래서 <언페이스풀>의 불륜 행각은 현실성 없는 판타지고, <해피 엔드>의 불륜은 원한을 잉태케 한 오래된 부정의 누적이다. 결국 똑같이 불륜을 다뤘지만 <해피 엔드>의 불륜은 현실에 뿌리를 둔, 기존의 인적 관계와 일상에서 발생한 부정의 역사이고, 그 살인은 그 역사를 분쇄하는 치밀한 전쟁이다. 이 상반된 불륜의 성격으로 살인의 충동성과 계획성이 갈리게 되고, 두 영화의 장르적 성격조차 다르게 했다.
그렇다. <언페이스풀>의 살인은 복수가 아니다. 낯선 물결에 대한 저항이자 자연재해 같은 충동에 맞서는 몸부림이다. 방파제 같이 견고한 가정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온 쓰나미에 맞서는 절박한 투쟁이다. 반면 <해피 엔드>의 살인은 가정의 일상과 역사에 깊이 들어와서 평행한 다른 일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그 사실을 몰랐던, 그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남자의 복수다. 배신감은 우연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쌓아 온 신뢰를 무너져 온 걸 뒤늦게 안 사람의 정서다.
분노의 레벨이 다르다.
우리는 이쯤 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내 연인이나 배우자의 불륜을 알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분노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 분노의 칼끝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이 고민의 답이 분명해지면 당연히 그 칼의 방향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며칠 사귄 사람이 바람을 폈다고 해서 우리는 살인을 할 만큼의 분노를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투자한 시간, 감정, 추억, 관계의 형성과 그 관계의 깊이, 그리고 그 관계가 뜨겁던 시기는 지났지만 그래도 원만하고 끈끈하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는 연인이 바람을 폈을 때 우리는 아주 깊은 분노를 느낀다.
한 순간의 해프닝 같은 바람에 대해서도 우린 참고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하간 우발적인 살인과 계획 살인의 경계가 분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계획적 불륜과 우발적 실수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따라 우발적이라고 인정되면 아주 힘들지만 용서-물론 아주 열심히 용서를 빌고, 이후의 삶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하지만-해주기도 한다.
사랑이 끝나도 계속 살아야 한다.
고민은 다른 질문을 부른다. 우리는 무엇에 화가 나는 걸까? 연인에게? 아니면 내 연인의 마음을 훔쳐간 누군가에게? 그것도 아니면 연인과 함께 만든 시간과 추억, 그리고 관계가 깨진 그 자체가 화가 나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 나한테 감히 이럴 수가 있지."하고 생각하는 걸까? 이 질문 중 어떤 질문을 선택하냐에 우리의 노력의 방향이 결정된다. 관계가 깨어질 때 우리의 노력은 무엇을 향해야 할까? <언페이스풀>처럼 그 원인을 제공한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만든 내부의 원인을 찾는 것? 소중한 추억을 다시 소환하여 관계에 남은 마지막 불씨를 살릴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것?
우린 두 영화를 보면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복수를 했든, 우발적인 살인을 했든 그 이후엔 그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불륜을 알게 된 이후부터 살인을 하기 전까지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간에 부부 관계를 예전으로 돌릴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분노의 폭발과 그로 인한 살인 이후에는 부부 관계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자의 일상은 이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수를 성공한 사람도, 살인을 용케도 잘 덮은 사람도 결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사랑이 끝나면 우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분노, 좌절, 실망, 자책과 우울의 나락에 빠진다. 그걸 치유하는 방법은 서점에 넘쳐나는 심리학 책에 나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두 영화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그 사랑이 끝난 것 때문에 내 삶이 이전의 좋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이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안 그래도 우린 세상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서점의 수많은 책들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살라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쉽지 않으니까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단을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사랑은 주체를 이전과 후가 달라지게 할 만큼 큰 사건이다. 그러나 그런 모험과 탐험을 평생 할 수는 없다. 엄홍길 대장님도 산에서 내려오면 갈 집이 있었고, 아무리 위대한 탐험가라도 네비를 보며 운전해서 마트에 가야 할 때가 있다. 당연히 사랑도 일상이 되고, 연인도 가족이 되는 순간이 온다. 심지어 인연 없는 남남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모험이 끝날 때
우린 이 사랑이라는 탐험과 모험의 끝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방해로 소중한 사랑이라는 탐험과 모험의 파트너를 뺏겼더라도. 우린 결정해야만 한다. 그 파트너를 도로 찾아와 내 여정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 일상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고 맘에 맞는 파트너가 나타나면 그때 탐험과 모험의 여정을 다시 떠날지를.
그러나 사랑이라는 여정에서의 파트너는 아무런 계약 관계도 없는 순수한 타자다. 그/그녀를 묶어 놓을 아무런 제약도 없다. 두 영화 모두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데도 그 마음을 붙잡아 놓는 데 실패했다. 심지어 <해피엔드>는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불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 불륜은 해프닝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마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결국 보내기로 결정을 하든, 찾아오기로 결정하든 그 결정에 타자가 맞춰 움직이라는 보장은 없다. 타자는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대상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연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조절된다면 그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여러 요소의 불균형으로 인해 누군가 권력을 잡고 있거나 폭력을 동반해서 타자의 주체성을 무너뜨렸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결국 내 마음대로 되는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맞는 타자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잠시. 그러니 내 뜻대로 사랑이 안 된다고 하소연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대사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놀랄게 아니라 사랑은 원래 변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사랑에 내재된 불안의 당연함을 긍정하며 지금 이 순간의 사랑에 열정을 쏟아 붓을 수 있는지 모른다.
역설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불안함,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그리고 사랑을 잘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오히려 지금 사랑의 시작을 지연시키고 있는 거 아닐까? 떠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사랑하는 것, 그리고 지금 사랑이 끝난 후에는 불꽃놀이가 끝난 후 다들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런 마음가짐이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고 맘껏 젖어들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도 우린 살았고, 사랑이 끝난 후에도 우린 살아야만 한다. 사랑도 이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담담히 오늘, 사랑을 향해 나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