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 1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2015)
몇 년 전(블로그를 보니 정확히는 2016년 12월 31일이다.) 연말에 이 영화가 느닷없이 TV에 나왔다. <TV 첫 방송>이라는 자막이 상단에 있었다. 이 시점이 이런 영화의 방송 시기로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어찌 됐든 느닷없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TV에서 해주는 바람에 보게 됐다. 집사람은 도깨비를 보고 나서 마침 애가 일찍 잠들자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기 시작했다. 아내는 이 원작, 영화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대략 설명해줬다. 미국 아줌마들 사이에서 대박 친 소설이고 영화라고.
원래 난 판타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서재에서 다른 걸 봤다. 그러다 물 마시러 왔다 갔다 하다 우연히 두 남녀 주인공의 계약 장면을 봤다. 계약의 핵심 사안은 "앞으로 나에 Submissive가 돼라.”였다. 아내와 나, 둘 다 “그게 뭐야?”하며 서로에게 그 뜻을 물었다. 난 종합격투기의 Submission 패는 알아도 저 단어는 처음 듣는다고 했다.
일단 내가 아는 한 저 단어는 항복이라는 뜻이다. 항복? 뭘 항복하라는 거지. 결국 검색해봤다. 굴복의 뜻이었다. 그러니까 성적 타자에게 완전한 복종을 의미했다. 스스로의 주체와 의식, 이성을 버리고 온전히 복종하라는 의미였다. 더 찾아보니 일반적인 성적 관계가 아니라 소위 BDSM이라는 특이한 성적 관계에서 나오는 용어였다. 참고로 BDSM은 이런 종류의 행위의 앞 글자를 모아 놓은 것이다(Bondage(구속), Discipline(훈육), Dominance(지배), Submission(굴복), Sadism(가학), Masochism(피학)). 이 나이 되도록 모르는 것이 많구나, 새삼 느꼈다.
그 계약 장면에서 그레이는 특이한 말을 한다. 마치 굴복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좋다는 듯이 말이다. 굴복함으로써 더 큰 쾌락을 얻는다고 말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쾌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는 죄책감이다. 어떤 행위, 동작, 상황을 거부하는 근본에는 그것에 대한 터부와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 한 주체에게 일종의 터부와 죄책감이 있다는 건 그 주체가 성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여전히 사회적 존재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선택, 그로 인해 펼쳐진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쾌락을 심판할 의식이 깨어있다는 의미다.
당연하게도, 가장 이성을 없애야 할 순간에 그 이성이 생생히 살아 있다면 당연히 쾌락의 강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 큰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그로 인해 이성과 주체를 놓아버릴 수 있는 방법과 행위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때 만약 자신의 개인 의지를 상대에 완전히 맡기겠다는 서약을 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주체성과 이성을 그의 의지와 선택에 맡겨버리면 어떻게 될까?
계약에 의해 주체가 갖고 있던 터부와 죄책감의 책임 또한 타자에게 넘어간다. 즉 자의에 의해 어떤 행위, 금지되고 금기시된 행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체적 인간임을 상징하는 손, 시각 등을 구속된 채 타자에 의해 그 금지되고 금기시된 행위를 함으로 인해 자신의 터부와 죄책감도 타자의 몫으로 휙 전가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적 상황이 소멸되면 그 상황은 타자가 주도하고 계획하고 실행한 상황이기 때문에 쾌락의 극한까지 누린 후에도 주체는 홀가분하다. 쾌락을 가능케 한 모든 금기와 터부의 극복의 시도와 의지 있는 주체가 감당할 죄책감까지 타자에게 떠넘겨버렸기 때문이다. 주체에게 남은건 오롯이 몸과 기억에 새겨진 쾌락의 문신이다.
이런 이유로, “서브미시브 계약”은 주체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아 아니라, 그레이의 말처럼 성적 상황 속에 있는 주체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적, 이성적 속박을 없애어 주체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즉 동의된 노예, 선택한 노예 길을 통해 자신의 이성적, 윤리적 장벽을 훌쩍 넘어버리는 것이다. 어째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생각나지 않나?
이런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선 요구하는 사람과 그 요구에 응하는 사람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처럼 철저한 계약서를 쓰면 더 좋을 테고. 여기에 남자 주인공인 그레이처럼 부자에 헬기도 있고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여주인공인 아나스타샤처럼 미모의 여성이면 더할 나위 없으려나? 이건 부수적인가?
이 영화와 소설이 미국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지만 한국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다. 우린 저런 환상이 현실이 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서이기 때문일까? 환상도 어지간해야 해석되고 수용되기 때문일까? 목수정이 어느 칼럼에서 한국 남자들은 에로스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했다. 에로스가 한 편의 연극이라면 남자가 연출, 연기, 음악, 조명, 그러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여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아니면 자기가 지정한 역할만 충실히 하라는, 그런 생각으로 에로스의 무대를 만들고 꾸미고 그 극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매번 리드하는 건 남자 입장에서 분명 피곤한 일이다. 물론 나도 그랬었다. 지금도 물론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가끔은 맡겠다고 나서는 여자가 있으면 주도권을 넘겨준다. 한창 혈기왕성했지만 돈은 늘 없던 시절이었다. 연인을 만났는데 돈이 없었다. 여자가 맥주를 사주겠다고 해서 맥주를 마시러 갔다. 마시다 말고 여자가 날 그윽한 눈길로 한참을 보더니-물론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했다.-하고 싶다면서 모텔을 가자고 했다.
지갑이 텅 비어 있었다. 피쳐도 비어 가고 있어서 맥주가 남았다는 핑계도 댈 수 없었다. "나 돈 없어"하고 솔직히 말했다. 그녀가 빨리 일어나라고 턱짓으로 말했다. 난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그녀는 내 손을 끌고 가장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자기 카드로 시원하게 결제하고.
이런 경험을 한번 한 뒤, 그녀는 자기가 이런 무대를 주도해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퇴근 중에 모텔 이름과 호실만 달랑 문자로 보낸 적도 몇 번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 없는 이 심플한 호출에 “네”라고 답한 뒤 맥주 몇 병 사들고 모텔에 들어가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번은 이런 적도-이번엔 다른 여자다-있다. 내가 주도하는 스테이지가 끝나고 잠시 쉴 때였다. 여자는 슬슬 날 달구기 시작했다. 난 그냥 누워 있었다. 그녀는 날 장난감처럼 갖고 놀기 시작했다. 어디에 입을 맞추면 좋아하는지 내 신체를 제곱센티미터 단위로 나눠 탐험했다. 뒤집으라면 뒤집고 앉으라면 앉고... 그렇게 시키는 대로 했다. 편했다. 온전했다. 그녀는 서서히 과격해지면서 날 잡아먹었다. 라캉인가 누가 그랬던가? 우리에겐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기질이 다 있다고. 단지 그 비율이 다를 뿐. 그러니 한쪽으로만 살면 다른 한쪽은 답답해할지도.
마광수 교수는 십몇 년 전의 한 칼럼에서 “여자여, 사랑받고 싶은 여성들이여, 한시바삐 귀여운 마조히스트가 되도록 노력하라.”라고 했다. 그대들이 원하는 잘난 남자는 모두 다 사디스트라는 말을 덧붙이며. 흠... 난 썩 잘난 남자는 아닌 모양이다. 난, 넘겨주면 편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느긋해진다. 내 몸이라는 악기를 잘 다루는 연주가를 만나면 내 몸이 낯설다. 새롭게 깨어난다. 서툰 사람은 악기를 맡으려고도 안 한다. 대체로 다뤄보겠다고 나서는 여성은 제대로 다룰 줄 안다. 이래서 경력직을 찾는지도.
마광수 교수가 저런 말을 하기 훨씬 전부터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찾아다녔다. 자기 마음대로 할 만한 여자는 경험이 없는 여자뿐이라는 생각에 첫 경험인지를 따져 물었다. 8,90년대만 해도 자신이 첫 남자라는 걸 자랑하는 한심한 남자들이 많았다. 어쩌면 그렇게 따져 물은 건 자신의 미숙함을 숨기려 했던 남자들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고서야 아무 경험 없는 상대를 찾는다는 건, 따져보면 상식적이지 않다.
좀 얘기가 엇나가는 것 같지만 실력이 검증 안 된 신인에게 거액의 연봉을 주는 스포츠는 없다. 보통 프로스포츠에서 신인을 스카우트하거나 지명하기 전엔 최소한 일 년, 길면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 내내 체크한다. 그러니까 직접 경기하는 걸, 사생활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그저 소문으로만 선수를 뽑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경험 없는 상대가 좋다고? 다시 말하지만 그건 자신의 미숙함을 숨기려는 의도, 그걸 들키지 않으면서 이것이 섹스의 모든 것이라는 최면을 걸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전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경험 없는 상대를 찾아 헤매는 건 미련하고 한심한 짓이다. 어찌 됐든 연말에 본 영화의 한 장면 덕분에 단어 하나의 심오함을 알게 됐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뜨거워져서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없던 시기가 지나니까 그런 영화를 보면서도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