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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에 나이는 없어도 내리막은 있다.

영화의 위로-못 보낸 원고 10. 은교

by 최영훈

산에서 제일 어린 사람

한 십여 년 전 매주 서너 번 뒷산에 올라 운동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뭐 사오백 미터가 넘는 그런 산이 아니고 그저 백 미터나 될까 한 얕은 동산이다. 이런 동산에도 제법 번듯한 운동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게 한 계절 다니다 보니 내가 가장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산을 오르는 이들 중에서도, 거기서 운동을 하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 어린 청년이었다.


귀촌을 하면 환갑의 어르신이 청년회 회장을 한다던데 우리 동네 뒷산에서 청년회장을 뽑는다면 내가 적임자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몇 개월에 한 번 내 또래의 아줌마나 종종 이 얕은 동산을 설악산 오르듯 힘겹게 오르는 젊은 여성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반가움을 느껴 말을 걸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한눈에 봐도 다이어트를 위해 목숨 걸고 이 낮은 산을 오르는 처자에게 말을 거는 건 실례다 싶어 꾹꾹 참았다.


뭐 운동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니 이 현상에 대해 짧게 더 얘기하자면 운동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공원마다 그걸 붙잡고 있는 이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다. 청춘들은 청결하고 시설 좋아서 그 값을 톡톡히 받으려 하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경제력 없는 노인들만 이런 야산의 귀퉁이에서 <록키 4>에서 록키가 러시아의 자연을 벗 삼아 운동했던 것처럼 운동을 한다고 착각하지 마시라.


경제력이 그 운동의 장소를 정하는 건 아니다. 그게 다는 아니다. 청춘의 운동은 전시를 위한, 쇼잉을 위한 운동이라면 중년과 노년의 운동은 살기 위한 운동이다. 의사의 처방이 신탁처럼 쏟아진 다음날부터 중년과 노년의 운동이 시작된다. 백세 시대라는 데 이렇게 부실한 몸, 아픈 몸으로 오래 사는 게 뭔 소용 있겠나 싶어 운동하는 거다. 그러니까 청춘의 운동은 응시하는 타자가 설정되어 있어 육체의 활용 목적성이 있다면, 중년과 노년의 운동엔 저승사자의 기다림이 등골을 오싹하게 하여 매일 떠밀리다시피 해야만 하는 일상인 것이다. 밥을 먹었으니 산에 간다.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

2014년의 여름이었다. 집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1Q84> 2권을 사려했는데 3권밖에 없어 나오다 박범신의 <은교>가 눈에 들어왔다. 몇 장 넘기다 다자이 오사무의 저 문장을 봤다. 소설이 영화보다 더 깊고 쓸쓸하다고 그때의 감상을 블로그에 써 놨다. 영화를 볼 때 이적요와 서지우에게도 공감했다고, 세 사람의 외로움에도 공감했다고도 써 놨다.


이로부터 딱 2년 후 가을, 거짓말처럼 작가는 성추문으로 미디어에 오르내렸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였다 하더라도 일흔이 넘은 소설가가 삼십 대 후반의 시인과 함께 이런 논란에 휘말리는 건 추했다. 출판사 여직원에게 큰 은교니 작은 은교니 했다지? 그전에 시인 최영미 씨가 시원하게 시 한 편으로 문단의 나쁜 손들을 씹었었는데 그 추한 손들에 대한 소문이 소문만은 아니었다.



그림이 안 나오는 짓은 하지 말아야 된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중년들은 성공과 가족을 위해서 많은 걸 포기했다. 앞선 세대, 그러니까 지금의 6,70대 남자들에겐 아마 그 포기에 대한 보상심리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좀 일찍 왔다면 쉰 줄에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도 다시 청춘이 될 순 없다.


삼십 대 초반에 대학 강사를 시작했다. 솔직히 삼십 대 중반까지는 여학생을 유혹할 수도,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런저런 경로로 메시지를 받아 보기도 했다. 노골적인 유혹도 받아 봤다. 가난한 살림에 대학 강사까지 짤리면 어찌 살겠나 싶어 용케도 잘 피해 왔을 뿐 그 유혹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응해서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유혹의 문자를 종종 꺼내보며 어깨에 힘을 주기도 했다.


마흔이 넘어가자 여학생들이 소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흔이 넘은 뒤, 신체의 노화를 받아들이면서부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힘든 건 힘든 거다. 내 청춘의 여름이 지나갔다고 단풍 진 가을에 모두 떠난 해변을 서성여서는 안 된다. 이십 대 초반의 여자에게는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뜨겁게 해 줄 이십 대 남자, 청년이 어울린다. 어느 방송에서 개그맨 신동엽이 했던 말처럼 하고 나서 돌아서면 다시 할 수 있는 그런 청춘 말이다.


대학 강의실에선 상대적으로 내 나이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우연히 함께 사진이 찍히면 나만 시들어 있었다. 담담히 받아들였다. 운동을 하면 쉽게 지치고 회복이 늦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이렇게 글이나 끄적이는 게 제일 편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이걸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가끔은 상상을 한다. 사방이 거울로 장식된 방에서.... 그러나 그게 현실이 되면 얼마나 난감할지 굳이 해봐야 아는 건 아니다. 올여름이 화려했다고 내년 여름도 그러할 거라는 자신감은 서른 초반에나 허락된 것이다. 나이 값이라는 게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는 데서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


"네 등불의 갓은 너를 포도주 빛깔로 물들이고 "

이 역시, 소설에 인용된 카로사의 문장이다. 어려운 얘기를 길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본론은 섹스인데 “쉬었다. 가자.”, "라면 먹고 갈래." 같은 말로 운을 떼거나, 심지어는 쓸데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술만 들이켜다가 본론인 섹스는 고사하고 만취되어 집에 가는 사람이 있다. 박범신의 은교와 영화 은교가 딱 그런 남자의 장광설을 닮았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해서 어린애랑 자고 싶은데 이미 늙었다. 열받는다. 욕망은 남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 짧은 얘기를 하기 위해 긴 글을 돌리고 돌린 것이다. 영화에선 노래방도 가고 카페도 가고 요즘 유행하는 유행어도 배우고 바위에 걸린 휴대폰도 주어준다. 거기까지다. 그런다고 안 되는 게 되진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긴 말을 늘어놓는다. 쉰이 넘어 다시 이 소설과 영화를 돌이켜보니 이 장광설이 눈에 보인다. 짜증 난다.


이 장광설을 늘어놓기 위해 작가는 과거를 지웠다. 이적요에겐 과거가 없다. 역사를 지우면 그의 신성(神聖)은 강화되면서, 현재 하는 욕망은 비판에서 자유롭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으면 거기서 발생하는 사회적 윤리로부터 자유롭다. <해피엔드>에서 아내와 남편의 가족이 안 보이고 아기의 비중이 작은 이유, <언페이스풀>에서 불륜남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공동체의 관계망 밖에 있는 프랑스 남자로 설정된 이유와 같다.


연필의 은유를 다시 본다.

지워진 과거의 기능과 장광설을 이해하기 위해 연필의 은유를 다시 봐야 한다. 소설과 영화에선 그것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학교를 못 갔던 그의 유년 시절을 떠올려서 슬프다고 했다. 그게 아니다. 연필은 언제든 깎아 뾰족해질 수 있지만 깎다 보면 언젠간 소멸한다. 이 소멸이 남근의 기능과 쇠퇴를 닮았기에 슬픈 것이다. 게다가 남근도 연필처럼 스스로 날카로울 수 없다. 내 몸인데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 사랑하는 타자, 육체의 자극, 연필깎이로 은유되는 그 깊은 자극으로 인해 날카롭게 벼려진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모든 연필이 그러하듯 남근 또한 더 이상 심이 나오지 않으면 성기와 생식기의 기능은 버려진다. 그 어떤 연필깎이의 자극도 심이 다한 연필을 날카롭게 만들 수 없다. 그때는 새로운 연필로 대체된다. 물론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볼펜 깍지에 끼워 몽당연필의 쓸모를 연장하듯 남근의 쓸모도 그리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방편, 미봉책, 일시적 비아그라에 불과하다. 버려짐을 지연시킬 뿐이다. 연필의 의미, 그 슬픔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토의 흔적

인간에게 죽음이 숙명인 것처럼 수컷은 이 기능이 다한 뒤 버려지는 순간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추하지 않다. 은교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던 한 노인의 투정이었다. 구토된 욕망의 잔여물이었다. 육체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아니 새롭게 솟아올랐던, 그러나 신체로 발휘될 수 없었던, 그 발휘의 기능이 다했기에 분출되지 못해 엉겨있던 욕망의 구토였다. “하고 싶은데 난 이미 늙었어,”라는 길고 긴 하소연이었다. 아무리 화려한 색을 갖고 있어도 구토의 흔적에선 악취가 난다.


청춘에게 하는 구토

대학 강사 시절 친한 후배하고 수다를 떨다가 학내 성추행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미대 교수가 졸업 작품 때문에 남은 제자 여럿을 성추행했던 게 들통이 났던 사건이다. 그 사건에 대한 내 감상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때 나눴던 대화를 옮겨 써 놓은 글을 보니 이렇게 답했었다.


그림이 안 나오는데 굳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게 내 첫 번째 생각이었다. 앞서 말했듯, 마흔이 다 돼가니까 여학생들이 정말 어려 보이기 시작했다. 방이나 모텔 같은 데서 함께 벗고 있을 법한 여성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다. 여자가 아니라 아이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애들을 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교수가 집적댔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아니 설령, 여학생을 꼬셔서 둘 다 벗을 기회가 생긴 들 그 그림이 예쁠까? 누가 봐도 추한 그림은 그리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열정과 체력의 부재를 통감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내 두 번째 생각이었다. 왜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 가해 교수는 한 명인데 피해 여학생은 많을까? 남자는 열 여자, 마다 안 해서?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노년의 교수에겐 이미 한 명의 여자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만한 정신적, 육체적 힘이 없다. 그래서 다수의 여자에게 치졸한 흔적을 남겨 자신이 여전히 수컷임을, 한 여자의 깊은 만족이 아니라 넓은 영역표시로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주제를 모르는 늙은 수컷은 그래서 추하고 안쓰럽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물론 그 한계는 다 써본 사람만이 안다는 게 내 세 번째 생각이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이삼 년마다 한번씩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때마다 “이제 이 스포츠는 안 되겠구나.” 또는 “조심해서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절제했다. 사랑도 섹스도 마찬가지다. 특히 섹스. 여자가 힘들어서 더 이상 오지 못하게 손을 뻗어 막을 때까지 해본 남자라면 중년의 어느 순간엔 더 이상 그럴 체력이 안 된다는 걸 실감할 것이다. 한계를 통해 절제를 배우고 절제를 통해 그만둬야 할 때를 아는데 그런 경험이 없는 인간들은 그렇게 치졸하게 버틴다.


그 뒤로도 학교마다 성 추문에 몸살이었다. 동료 선후배 대학 강사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들이었다. 내 솔직한 성격을 아는 여자 후배들과 여학생들이 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기발한 대책이 없냐고 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일단 원인으로는 교수들이 자신들의 명성을 남성의 힘과 동일시하는 게 첫 번째고, 여학생들이 약간 높은 톤으로 “교수님.”하고 부르는 것을 진짜 지가 좋아서 그러는 줄 착각하는 것이 두 번째 원인이라고 말해줬다.


이런, 자신의 노쇠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한 방에 보내버리는, 근절 대책은 간단하다. 정말 젊고 매력적인 여자한테 한 번 대차게 비웃음을 당하면 된다. 그러면 정신 차릴 거다. 교수로서의 명성과 능력이 성적 매력과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그걸 참 교육받으면 될 거라고 말해줬다. <대통령의 연인>에서 대통령으로 나왔던 마이클 더글라스가 아네트 베닝에게 했던 대사와 같은 자기 인식을 늙은 교수도 가져야 한다. “슈퍼파워를 가진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서 잠자리에서도 그런 파워를 갖고 있으리라 기대하진 말아요.”


집 근처에 제법 큰 모텔촌이 있어서 밤낮없이 커플의 행렬을 목격한다. 젊은 커플이 점심 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남자 청년을 응원하게 된다. "저녁은 꼭 밖에서 먹자고 하게.". 그러나 가끔 부조화스러운 커플도 보게 된다. 특히 흰머리 성성하고 머리숱 없는 중년의 사내가 딸 또래의 여성을 데리고 가는 모습은 추하다.


없는 체력을 그러모아 청춘의 건강한 신체 위에서 푸드덕 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비루하고 남루하다. 그건 욕망의 구토를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 섹스에선 악취가 난다. 그 낡은 육체를 안게 되는 젊은 육체는 그 악취를 씻어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할 것인가. 연필의 시간이 끝나면 다들 다른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나중에 오는 사랑 같은 건 영화 속에, 상상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샹들리에 같은 여름 아래서 눈부시게 보낼 나이는 지났다. 그저 정오의 태양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길이만큼, 내 바로 앞만 밝혀내는 등불의 은은함이 더 편한 나이를 살고 있다.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 섹시함을 느끼기 전에 이미 그 젊음을 부러워하고 있는 나를 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인생에도 샹들리에가 폭죽처럼 빛나던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탈진하고 소진하고, 그래서 서로의 육체에 기대어 상대방의 땀을 마시고 그녀의 심장 소리에 맞춰 호흡하고 끈적거리는 피부를 서로 문대며 여름 오후를 보내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 샹들리에 같은 화려한 경험을 하지 못한 청춘들, 후배들과 얘기할 때면 열심히 하면서 살라고 말한다. 인간은 늙고 하루키의 말처럼 언젠간 추억만으로 몸을 덥혀야만 하는 시절이 오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나 역시 남자 후배들과 야한 농담을 하곤 했다. 그 농담을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이라는 폴더에 저장해 놨다. 참고로 이 폴더엔 수 백 페이지의 글이 있어서 스스로도 놀랐다. 어떻게 정리를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이 폴더에 남자의 구실이 다하기 전에, 한 번쯤 여자한테 들어야 될 말들이 있기에 여기에 붙여본다.


우선 “어떡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어떻게,”는 안 된다. “어떻게,”는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니 어떻게 이렇게 못할 수 있지?"라던가 "어떻게 이렇게 작아?"라는 말에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떡해,”"어떻게 해"의 줄임말이다. 즉 벌어진 상황을 내가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냐는 일종의 반문이며 감탄사이다. 특히 잠자리에서는. 이때 여자가 마지막 ~해에 약간의 바이브레이션을 넣었다면 정말 최고의 감탄사다.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는 글로벌 감탄사도 들을 수 있다면 들어야 한다. 이 단어를 토종 한국인의 입에서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있을 것이다. 영어권 나라에서 온 교환학생이나 외국인 교수, 원어민 강사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제한할 수 있다. 아무리 범위를 넓혀도 유학파나 최소한 한 학기 어학연수라도 다녀온 여학생, 재외 동포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모르는 소리. 의외로 우린 많은 외국어를 할 수 있다. 작정하지 않아도 F**K이나 SH**같은 욕을 할 수 있고 구력이 좀 된 일본 야동 마니아들은 웬만한 감탄사 정도는 일본말로 무심결에 뱉을 수 있다.


“깊어", "크다”라는 말도 듣고 볼 일이다. 이 두 단어는 얼핏 물리적 Fact를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건 궁합이다. 남자의 크기든 여자의 깊이든, 여자의 크기든 남자의 깊이든 두 사람의 조화 속에서 평가된다. 즉 절대적 수치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안은 여자의 입에서 "너무 깊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자신의 페니스가 평균 이상이라고 우쭐댈 필요 없다. 등 빨 좋은 핀란드 누님을 만나면 그 반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 외에도 많은 단어들이 있다. 또 미처 단어로 번역될 수 없거나 옮길 수 없는 수많은 의성어와 감탄사, 비명들이 있다. 섹스가 EPL처럼 말 많고 시끄러워야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섹스는 축구보다 원초적이니까. 아, 물론 너무 큰 소리가 나올까 봐 자기 입을 손으로 막는 여자를 보는 기쁨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우린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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