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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그 생산적 존재

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 9. 생산적 활동/El Empleo(고용)

by 최영훈

생산적 활동의 진짜 의미?

20여 년 전, 막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했을 때 우연히 본 단편 영화가 있다. <생산적 활동>. 2013년 요절한 배우 이응재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6대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2002년 겨울이다. 영화 속 커플이 선거 포스터를 보면서 음담패설을 한다. 이 영화를 끝까지 봐도 제목의 의미가 선뜻 와닿지 않았다. 그나마 영어 제목-vital activity-을 보면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생산을 하는 것과 생체적 활동을 하는 것과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게 그것 같기도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후, 하루키의 1Q84를 읽을 때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렸다. 노부인이 주인공 아오마메에게 해줬던 충고 때문이었다. 아오마메가 노부인을 마사지해줄 때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지금도 멋진 몸이세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노부인은 가볍게 입가를 올렸다. "고마워요. 하지만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아오마메는 거기에는 응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몸을 몹시 즐겼고 상대도 몹시 즐겼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요?"
"알아요."
"어때요, 당신은 즐기고 있나요?"
"가끔." 아오마메는 말했다.
"가끔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노부인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말했다.
"그런 건 젊은 시절에 열심히 즐겨둬야 해요. 마음 가는 데까지. 나이 들어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음에는 예전 기억으로 몸을 따스하게 덥혀야 하니까요."

마지막 줄에서 <생산적 활동>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마지막 장면, 소파 뒤에 몰래 숨어 자기 집 거실에서 섹스를 하는 청춘 커플을 훔쳐보던 할머니가 커플이 떠나고 난 뒤 거실에서 사과를 베어 먹는다. 제목의 의미를 겨우 알게 됐다.


짧은 청춘, 드문 사랑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하면서 시작하는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땐 서른도 안 됐을 때여서 그 꽃을 그저 사랑으로만 해석했다. “그렇지. 사랑 참 쉽지 않지.” 생각하고 넘어갔다. 마흔이 넘어 <1Q84>를 읽으며 저 영화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듯, 저 꽃의 의미도 다르게 솟아났다. 꽃은 우리의 짧은 청춘과 그 짧은 청춘에 드물게 찾아오는 불꽃같은 사랑을 함께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친해진 청춘들이나, 오다가다 알게 된 청춘들에게 늘 같은 부탁을 했다. “인생 짧다. 청춘은 더럽게 짧다. 그러니 힘 있을 때 사랑해라.”


그렇다. <생산적 활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섹스가 생산적 활동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전체 인생에서 그걸 할 수 있는 시기, 그것도 아주 힘차게 잘할 수 있는 시기가 아주 짧고, 어떤 이에겐, 아니 대부분의 이에겐 그 기회가 생각보다 드물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모텔비 조차, 그 흔한 비디오방 요금조차 없었던, 영화 속 가난한 청춘남녀가 보자마자 섹스가 하고 싶어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은 단순한 성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 시기의 짧음에서 오는 본능적 갈급함과 그것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젊음과 섹스는 당연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특히 나이 든 할머니에겐 훔쳐보고 싶을 만큼 소중한 찰나의 순간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니 당신이 청춘이라면 세상이 국가를 책임질 대통령을 뽑는데 정신이 팔려 있든 어떻든 간에 둘이 부둥켜안고 있을 곳만 있다면 할 수만 있으면 해야 한다.


청년, 그리고 생산 인구

우리는 생산하면 경제학을 떠올리고 노동과 노동자를 떠올린다. 경제학에서는 생산가능 인구라는 말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15세 이상, 65세 이하를 말한다. 이 인구, 특히 청년 인구가 많아야 경제가 활력이 있고 학령인구가 늘어야 인구가 증가한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이중 청년 인구라는 변수의 특수성이다. 아베 정권 시기의 일부 보수 언론들이 일본 사례를 예로 들면서 조만간 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청년 인구가 감소하면 취업률이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워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은행이 실시한 <OECD 30개 국가의 청년실업 요인 분석>을 보면 청년인구의 감소는 취업률과 음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아니 왜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데 취업률이 높아지지 않지? 청년 인구는 단순한 노동인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정의 같은 IT 리더들은 일본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는 것이고 전 세계 경제 전문가들이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 생산력은 노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첨단 기술의 얼리 어답터이고, 대중문화의 최대 소비자이며, 심지어 최신 유흥 문화의 헤비 유저다. 그래서 청년 인구가 줄거나 그들의 경제력이 감소하면 당연히 전체 경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경제난으로 인해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출산도 안 하고, 정규직 취업에 희망도 버리면 그야말로 많은 산업의 미래는 암울해진다.


결국 일본처럼 고령 소비자를 위한 제품이나 1인 가족을 위한 소비 트렌드가 형성될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단일 제품의 규모가 작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구매량 자체가 작아진다. 결국 청년을 노동 생산의 주체로만 보고 청년 정책을 수립하면 경제, 사회, 인구 문제 해결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의 고독

마르크스는 노동이 주체를 소외시킨다고 했다. 활자로 되어 있는 이 말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이 영화를 봐야 비로소 이해된다. 노동이 만든 주체의 소외를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 한 편이 세계를 들썩이게 했었다. El Empleo(고용)다. 이 아르헨티나 애니메이션이 2012년 서울 인권영화제에서 선을 보였을 때 적잖은 충격을 줬었다. 사람이 사물로 전락해서 사물의 노동을 담담히 해낸다. 그 노동을 위해 출근 준비를 성실하게 하는 오프닝 장면으로 인해 이 단순한 사물화 된 노동으로 소모되는 인간의 모습은 더 텁텁한 충격을 준다. 한병철이 말한 주체의 사물화를 은유 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하는 일을 보면 <소울메이트>에 실린 하루키의 <매트>가 떠오른다. 이 글은 가상의 현관 매트 경연 대회 심사위원의 심사평으로 이뤄졌는데 사소한 현관 매트를 아주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일과 작업에 대한 과대평가 속에서 오히려 사라지는 인간성, 오히려 인간보다 사물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면서 인간의 자리를 차지한 세계의 사물화, 사물화 된 세계에 대한 조롱을 한다.


이 두 텍스트-El Empleo(고용)과 매트-는 노동과 노동자의 의미, 생산자와 생산물의 역전 현상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노동하는 사물로 전락해버린 인간, 다른 하나는 사물에게 온갖 의미를 부여해서 정작 미처 사람에게는 의미를 두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노동하는 인간의 신성함. 그래서 둘 다 생산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인간성, 인간의 소중함은 부재해서, 오히려 인간은 무엇을 생산하고, 어떤 의미를 생산해서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가, 인간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지를 고민 하게 한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지만, 다시 반복해 말하자면, 산업 혁명 이후로 인간, 특히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온 젊은이들은 노동하는 기계로 전락했다. 여가와 대중문화는 청년 노동자의 허위 재생과 거짓 에너지 공급원 역할을 하기 위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동 성장기 우리나라에서도 청년 노동자는 산업 성장의 동력으로 대접 받음과 동시에 대중문화와 신제품의 소비자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다 세기말에 IMF가 터지고 21세기 들어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를 넘어 실질 대학 진학률이 백 퍼센트에 이르면서, 또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고 비정규직으로 인한 고용 불안이 지속되면서 청년을 위한 정책에서 취업이 가장 큰 화두가 되어 버렸다.


그 사이, 오히려 청춘들에게 기대어야 할 진짜 생산의 문제, 즉 나라의 경제뿐만 사회 전반의 활력소이자, 성적인 에너지를 발휘해서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주체로써의 청춘과 청년이 가진 그 고유의 활력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졌다. 주거비용의 상승과 고용 불안으로 인해 취업 이후로 결혼 연령은 점점 올라갔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기 계발과 커리어의 유지가 더 중요해지면서 연애와 결혼, 출산은 청년과 청춘의 화두에서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이 사회가 앞선 애니메이션처럼 청년으로부터 그 화두, 활력, 가능성을 앗아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경제가 아닐지도

다시 <생산적 활동>으로 돌아오자. 청춘에게, 청년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경제와 취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여력을 허락하지 않는 이 사회 전체가 정말 큰 문제인지 모른다. 그로 인해 청춘이 진짜 해야 할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아서 이 사회가 지난 수십 년 간 해결하려 했던 저출산, 고령화 추세가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 진정한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단순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회가 늙어간다는 건 뭔가를 생산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걸 의미한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아시아의 두 나라인 일본과 한국의 성장에 성실한 노동자, 숙련 노동자, 그들의 일상을 저당 잡힌 노동이 큰 몫을 했음을 감안하면 성장의 동력이 사라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두 나라는 나이 든 노동자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이거나 정년을 연장하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미래 경제, 특히 내수경제의 활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청년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고 이 인구의 감소는 전체 인구의 감소로 이어질 테니 말이다. 청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애를 둘셋씩 낳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이상.


해결책? 글쎄, 일단 프랑스처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디서 누구랑 해서 낳은 애라도 좋으니 일단 낳기만 해라, 키우는 건 나라가 하겠노라고 장담했던 프랑스의 저출산 대책처럼 말이다. 물론 회복했던 프랑스의 출산율도 2010년대 들어 몇 년간 다시 2명 이하로 떨어지며 재차 저출산 기조로 들어섰다. 국가의 공립보육기관이 3세 이상의 아동들의 보육을 네 시까지 전면 책임지는 정책까지 실행했는데도 말이다. 그 원인으로는 일단 최근 몇 년 간 정부 지원이 줄어들었고, 8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의 인생관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 일련의 논의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사례에서 하나의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일단 삶의 여유가 없으면 영화에서 말한 <생산적 활동>의 증가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 활동은 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그야말로 유희로써의 섹스만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유희로써의 섹스를 할 여력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돈 안 되는 연애를 누가 하겠나? 먹고살기 바쁜데. 이건 비극이다. 먹고살기 바빠 청춘이 연애를 포기한다는 건 나라의 비극이자 비극적 결말이 예상되는 미래다.


노동하는 인간에서 일상의 인간으로

자본주의는 청춘에게 노동하는 인간과 유희하는 인간, 딱 두 가지만 바라고 있고, 지금까지 그래 왔다. 노동 현장은 소위 효율적 노동력 착취를 위한 시스템으로 발전해 왔고, 대중문화와 유흥문화는 허위 유희를 제공하면서 그 상품성을 더 고도화시켜왔다. 산업 현장에서는 6 시그마 같은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노동 효율성을 높이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성매매 및 관련 산업도 다양하게 동반 성장(?)했던 일본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도 고도 성장기 군사정권 시절엔 역설적으로 집창촌이 고도로 발전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 환경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대가 오면서 집창촌은 사라졌다. 이런 변화의 관계는 되짚어 봐야 한다.

노동과 유희하는 청춘이 정작 자신의 일상의 공간에서 해야 될 섹스를 밖에서 할 수밖에 없었던, 일회성 소비재로써 성매수를 해야만 했던 시대를 우리는 살아온 것이다. 그 시대가 진정으로 끝난 새로운 사회라면, 결국 이 유희, 특히 성적인 유희를 일상의 공간인 내 집과 내 공간에서 일상처럼 하고, 더 나아가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출산의 공포를 콘돔이나 피임으로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포조차 사회가 넉넉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사회와 시대라면 진짜 생산적 활동을 하는, 생체적으로 건강한 사회와 시대일 것이다.


그 시대와 사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 도래의 징후조차 없다. 출산으로 인해 그전에 계획했던 미래가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청춘들에겐 없다. 여전히 청춘이 감당할 만큼 주거비용이 내려가지 않아서 섹스는 일상적 공간이 아니라 모텔 같은 유희의 공간에서, 노래방에서 노래하듯이 행해지고 있다. 노래방에선 대부분 나올 때까지 노래만 하다 나오는 것처럼 섹스를 위해 들어간 곳에서 섹스만 하기에 급급하기에 섹스는 서로를 이해하는 차원 높은 커뮤니케이션으로 격상되는데 실패한다. 이 실패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섹스는 일상적 행위에서 점점 데이트 과정 중에 행해지는 이벤트로 소모된다.


결국 노동하는 존재로 소모되는 인간이 그로 발생하는 피로를 풀기 위한, 그리고 일상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증명을 위한 이벤트로의 섹스만 추구된다면 청춘과 성, 타자를 만끽하는 청춘,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청춘, 청춘의 생산적 활동은 소멸될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린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을 청춘답게

미디어에선 청춘들이 다 쉽게 사랑하고 연애하고 캐주얼한 섹스를 즐기는 것처럼 표현한다. 금요일이면 클럽에서 밤을 새우고 술집을 전전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모텔 문턱도 쉽게 넘는 것처럼 표현한다. 여름휴가 때마다 헌팅에 목을 매고 해변에선 1일 차 커플도 금방 탄생한다고 여긴다. 이런 내용을 걱정스럽게 다룬 뉴스는 여름마다 지겹게 나오고 이런 일탈을 다룬 성인 웹툰과 체험담도 여기저기 떠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엔 다들 그렇게 잘들, 다들 하고 사는 것 같다.


그건 광고에 불과하다. 다들 이 제품을 사고 있다고, 이거 없이는 올여름을 보낼 수 없다고 말하는 홈쇼핑 환상과 같다. 미디어는 그렇게 극단적인 현상을 반복해 보여줘서 기성세대와 청춘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게 한다.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 청춘들에게도 그 가능함은 비극이다. 일상이 되어야 하고 일상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들을 바쁜 일상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번, 심지어 여름휴가 때, 그야말로 벼르고 별러서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걸 상품화시켜버리는 세상에서 청춘들은 일상에서 누리고 살아야 할 쾌락조차 이벤트와 상품으로써 소비하며 자랑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사회의 몇 가지 문제들-예를 들면 고령화, 저출산, 청년 인구 감소, 세대 간 갈등, 경기 불황, 혐오 표현-의 해결은 청춘이 청춘답게 일상을 살아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지 모른다. 사랑이 연애 부심 부릴만한 이벤트가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상적 사건이 되고 문화를 즐기고 친구를 만나고 산책을 하고 시와 소설을 읽고, 이런 돈 안 되는 짓을 미래의 공포 없이 오늘의 일상에서 구현되는 것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우린 어쩌면 진짜 미래의 공포를 이겨내는 생산적 활동을 활발하게 해 나가는 청춘이 만연한, 그래서 진짜 활력 있는 사회로 회춘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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