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툰 이유
우리가, 그러니까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사랑에 서툰 이유는 이완과 나른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그 움직임 없는 너부러진 시간을 당황스러워하고 터부시 한다고 해야 할까? 이완과 나른함은 곧장 게으름의 현상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요즘 청춘들은 이 이완이라는 욕망의 공백을 현자 타임이라는 말로 하찮게 만들었다.
아주 심플하게 말하면 섹스는 3막으로 이뤄진 드라마다. 다들 알다시피 1막에선 막이 오르기 전 여러 준비 단계가 있고 스토리의 중심인 2막을 향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복선으로 배치된다. 그 에피소드들이야 연인과 부부들마다 제 각각일 테니 여기서 어찌 간략히 말할 수 있을까. 각자 알아서들 저 1막의 순간들을 몽타주 기법을 빌려와 회상해 보시길. 이어서 2막이 있다. 알다시피 본격적인 액션이 펼쳐지는 부분이다. 물론 그 액션도 선수의 재주와 능력에 따라 그 막의 길이와 변주가 다양해서 이 또한 간략하게 말하기 힘드니 다들 알아서 여백을 채워주시길.
이 1막과 2막, 그리고 3막을 <범죄도시>의 마지막 시퀀스로 바꿔 생각해보자. 마석도 형사가 장첸을 찾아 공항으로 간 뒤 화장실에 있는 장첸과 마주 선다. 그 유명한 대사, “혼자니?”, “응, 아직 싱글이야.” 이후의 대사 몇 마디는 바로 이 시퀀스의 1막이다. 그리고 액션, 2막이다. 그다음 3막이 나온다. 수갑을 채우고 화장실 밖의 웅성 되던 사람들 사이로 마석도 형사가 나온 뒤의 농담 같은 상황, 가벼운 대사들. 앞의 격렬한 액션을 보느라 긴장하고 있던 관객들에게 이완의 시간을 준다. 액션이나 추적 시퀀스 뒤에 늘 본드걸이 등장하는 007처럼 말이다.
우린 3막을 모른다.
문제는, 우린 섹스에 관한 한 이 3막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자들에겐 그 장면의 시나리오가 삭제되어 있다. 녹초가 되어 너부러져 있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연인의 굴곡진 육체를 떨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스치듯 만지며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는, 그 장면을 연출할 줄 모른다. 밖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낮인지 밤인지 잊은 채 그저 땀내와 락스 냄새로 가득한 사랑의 격리 공간에서의 긴 액션이 끝난 후, 나와 엉겨 있던 타자의 몸뚱이를 향해 감사한 마음이 담긴 나른한 시선을 던지는, 그런 여운이 긴 연기를 할 줄 모른다.
그 대신, 앞서도 얘기했듯이, 2막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씻으러 가고 흩어진 이성의 조각들을 수습하고 쓸데없이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TV를 틀고, “저녁 뭐 먹을래?” 같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며 이 정적과 이완의 3막을 성급히 삭제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자마자 허둥대며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처럼.
3막이 사라진 역사
대학 시절 유행했던 <젖소 부인 바람났네.> 류의 3류 에로비디오와 80년대 유행했던 에로 영화에는 이 3막이 없다. 3막이 사라진 이유가 뭘까? 누가 이 3막을 삭제한 거지? 소위 7,80년대의 고도 성장기, 성과를 위해 주말도, 낮밤도 없이 일해야 했던 남자들에게 성욕은 오직 해소해야 할 무엇이었다. 그래서 섹스는 엄밀히 말하면 오직 성욕의 해소와 후세를 만들기 위한 엄숙한 작업이었다. 애들이 자는 그 좁은 방에서 섹스가 가능했던 건, 아니할 수밖에 없었고, 해야만 했던 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1막과 3막이 삭제된 섹스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나온 그런 섹스처럼 긴박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고, 그 긴박함은 섹스의 전형이 되어 일종의 가족 내 성윤리로 정착됐다. 그 윤리의 공간이 선사한 긴박함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욕망의 앙금을 위해 한국 남자들은 집창촌을 전전했다. 이렇게 욕구 해소에 급급했던 아버지 세대의 섹스에 대한 인식은 그다음 세대로 이어졌고, 결국 평범한 한국 남자에게 섹스는 휴식이 아니라 노동과 임무, 성과의 연장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군대문화처럼, 장시간 노동처럼, 만취를 지향하는 술자리처럼, 우리만의 성문화가 정착됐다.
이건 마치 우리의 단체 해외 관광의 행태와 닮았다. 단체 관광은 숫자에 매몰된다. 얼마나 많은 장소를 다녔는가로 그 관광의 품질과 만족도, 가이드의 수완이 평가된다. 어떻게 봤는지가 아니라 뭘, 얼마나 많이 봤는지가 승부의 열쇠인 것이다. 섹스 또한 그렇게 숫자로, 계량적으로 평가됐다. 남자들이 이십 대만 넘으면, 술자리에서 하는 야한 얘기들도 결국은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몇 명이랑 했냐? 얼마나 오래 했냐? 몇 번 했냐? 얼마나 크냐? 이 지겨운 얘기를 매번 반복했다. 우리가 해 왔던, 그러니까 이런 기능주의적이고 계량주의적인 전근대적인 남성 중심의 섹스는 <엠마뉴엘 1>에 나오는 호텔 직원들의 섹스와 닮았다. 남자는 허둥지둥 쫓아가고 여자는 느껴주는 척하고, 전희도 후희도 생략된, 해프닝, 국밥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는 듯한, 끼니를 때우는 듯한 섹스.
끼니를 때우는 듯한 섹스는 성의 동반자를 먹는 개체로 전락시켰다. 군대에서도, 남학생으로 가득한 기숙사에서도, 십 대 이십 대 시절을 보냈던 미국 부대 지역에서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입에서도 “따 먹는다.”는 표현을 지겹도록 많이 들었다. 그 먹고 먹힘, 누군가 섹스에서 주체가 되면 누군가는 당하는 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공격적인 사고방식이 이 영화엔 없다. 군사정권 시절을 통과하며 성장한, 나 같은 아저씨나 1막과 3막이 생략된 채 2막의 액션만 줄지어 나열되는 어수선한 포르노에 길들여진 젊은이들, 통틀어 길에서 흔하게 보이는 그런 한국 남자들이 기대해 마지않는 그런 장면, 그런 액션은 이 영화에 거의 없다.
엠마뉴엘은 기대를 배반한다.
누군가를 먹기 위해 사냥하고 물어뜯는 그런 장면이 없다. 이대근과 김희라로 대표되던 그 8,90년대의 동물적이고 마초적인, 자양강장제 광고의 주인공을 독차지하던 남자 배우의 허리 놀림도 없다. 큰 가슴을 가진 여배우의 억지스럽게 찌푸린 얼굴도 없다. 당연히 갈대밭이나 과수원도 안 나오고 말을 탄 여자나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남자도 안 나온다.
그래서 한국 남자의 흥분과 자극의 기준으로 보면 이 영화는 수준 미달이다. 에로 영화의 평가기준을 성애, 그러니까 삽입과 남근 중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그런 장면이 몇 번 나왔는가로 야한 영화의 재미를 평가하는 사람에겐 이 영화는 낙제다. 그러니까 비디오 대여점에서 90년대 유행했던 싸구려 에로 비디오를 빌리면서 단골에게만 허용되던 멘트였던 “아저씨, 이거 그 장면 몇 번 나와요?”에 대한 답을 평가 기준 삼아 가치를 평가하면 이 영화는 함량 미달이라는 얘기다.
대신 이 영화엔 1막과 3막을 위한 에너지를 북돋아주는 이미지와 상상들로 가득하다. 거두절미 뛰어드는 2막이 아닌 느리게 전개되는 1막과 3막의 긴 여운이 이 영화에 있다. 휴식과 성애, 스포츠와 성의 경계가 없는 섹스가 있다. 먹고 먹히는 경박한 표현이 부재하는 느긋한 교류, 서로의 느린 고양(高揚)을 위해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이런 움직임엔 근육질의 남자가 필요 없다. 가슴이 큰 여자나 엉덩이가 큰 여자도 필요 없다.
의외로 평범한 실비아
그래서일까? 의외로 실비아 크리스텔의 몸은 평범하다. 자세히 보면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러니까 전형적인 미인상의 여 배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 유명한 <개인교수>와 대 여섯 편-대충 이렇게 말하는 건 솔직히 몇 편이나 찍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엠마뉴엘 시리즈가 아닌데 엠마뉴엘 시리즈로 알려진 영화들이 있기 때문이다.-의 <엠마뉴엘> 시리즈의 주인공을 맡으며 소위 성적인 상징으로 그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건 그녀가 천박하게 가슴과 엉덩이를 들이대는 여배우들이 보여줄 수 없었던, 베일에 가려져야 오히려 보이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1974년에 나온 <엠마뉴엘 1>은 이 환상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한국에선 이십 년 후에나 정식 개봉됐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많은 남자들이 실망했을 것이다. 기대하는 그런 행위, 그러니까 남자가 덮치고 여자는 당하면서도 좋아하는 그런 상투적인 장면은 태국의 호텔 직원 커플들이나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감독이 이런 장면을 태국인 커플에게 맡긴 것은 1막과 3막, 아니 어쩌면 에로티시즘, 에로틱, 에스닉, 이그조틱, 그리고 릴랙스와 이완이라는 단어의 상상과 이를 위한 이미지의 선험적 소유는 선진국의 시민에게나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엠마뉴엘 1,2는 이완, 느슨함, 너부러짐, 스며듦, 끈적임과 같은 형용사들의 잔치다. 이그조틱(Exotic), 에스닉(Ethenic)이라는 단어가 영화로 태어난 것이다. 이 영화에서 태국과 홍콩은 동남아의, 변방의 낯선 도시가 아니다. 저 단어의 고향이자 기원이다. 모든 낯선 것이 허용되고, 모든 경직된 것이 풀어지며 모든 상상이 허용되는 곳이다. 그렇다. 마치 온갖 키치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고급 모텔과 부티크 호텔과 같은 장소다.
당신의 상식은 당신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사랑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이다. 바람을 부추기고 일탈을 당연시한다. 인생의 목표가 오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 천지다. 일하는 사람도 한가하고 일 안 하는 사람은 더 한가하다. 목표도, 목적도, 계획도 없다. 시간을 들여 쾌락을 추구할 뿐 뭐 하나 생산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인간만이 가능한 섹스의 본질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에로티시즘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아무런 이익이 없는 활동을 위해, 심지어 나를 넘어 타자를 위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낚시꾼은 어부와 다른 이유로 물고기를 잡고 등산객은 모험가와 다른 이유로 산에 오른다. 인간만이 그렇게 한다. 모든 취미 활동과 여흥, 그리고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종교나 봉사활동도 같은 맥락이다. 거기엔 합목적성이 부재하다.
그러니 종교 활동과 봉사 활동의 에너지를 좀 아껴 이그조틱 하고 에스닉한 공간에서 릴랙스와 이완과 너부러짐의 3막을 스스로에게 허하라.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쾌락 그 자체를. 종교나 봉사는 더 고차원적 행위라고? 그게 바로 80년대의 후진 마인드다. 봉사하고 기도하는 대신 하루키나 읽으라면 어쩔 텐가? 자신의 즐거움과 보람까지 타인과 비교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리는 술자리에서 폭탄주 몇 잔을 성급히 마시고 급히 취해야 만족하는 8,90년대 남자들의 심리와, 요즘의 소위 꼰대로 불리는 남자들의 심리와, 앞서 말한 “얼마나 오래 해?”, “몇 명이란 자 봤어?”와 같은 유치한 질문을 하는 남자들의 심리와 같다.
그러니... 릴랙스 해지겠다고 안마의자 따위를 사고 사우나를 가느니 차라리 이완의 3막을 자주 무대에 올려라. 새벽기도 가야 된다고 잠도 안 오는데 밤 열 시부터 침대에 누워서 뒤척거리고, 그동안 남편은 야구 하이라이트나 보게 하지 말고. 그런 남편들 때문에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다들 미니 스커트를 입고 위태로운 의자에 앉아 허벅지를 노출하며 진행하는 것이다.
차라리 3막의 무대를 끝내고 이완하고 꿀잠 자라.
인생은 짧은데 청춘은 더럽게 짧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