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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정글, 나만의 야수

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 4 - 캣피플(1982)

by 최영훈
나는 의심할 수 없었다.......
한순간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것, 나를 고뇌 속에 가둬버린-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를 고뇌로부터 해방시킨-그것은 신성한 황홀경과 극한의 공포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대립 항들의 일치였다. 이것이 에로티즘의 역사를 통해 내가 내린 필연적인 결론이다.”, 에로스의 눈물, 조르주 바타유.


여성 ; 낯선 에로스, 낯선 타자

캣피플은 에로스의 야수성, 길들일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영화다. 더 나아가 문명의 틀 안에서만 해석되던 타자성과 사랑의 틀을 부수어 내재된 야수성을 끄집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에로스뿐임을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바타유의 저 말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고뇌 속에 가둬버리면서도 동시에 해방시키고, 황홀경이면서도 공포인 유일한 것. 에로스다.

에로스와 여성성은 완벽하게 해석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자 문명의 틀로 꿰어 맞출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고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문명”이라는 알랭 드 보통이 <인생학교 : 섹스>에 남긴 말은 설득력이 있다.


영화에 나오듯, 문명은 정돈된 동물원과 그 동물원 직원들이 입고 있는 제복의 세계다. 반면 에로스는 해석될 수 없는, 내적/외적 규범이 있을 수 없는, 길들여지지 않는 고양이과 동물의 야수성이다. 남자의 야수성이 <늑대인간>이나 <울프> 같은 영화에서 고작 개과의 늑대 따위로 표현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남자의 야수성은 그렇게 길들임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팜므파탈/여전사로 가두기

캣피플 같은 영화가 흔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의 야수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거의 없다. 남성들이, 그리고 남성과 이성 중심의 문명이 여성의 야수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빈치 코드>에서 팩션의 간판을 걸고 장황하게 늘어놓은 내용은 결국 이 남성과 문명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해 은폐되고 묻혔던 여성성의 위대함이었다.


이 두려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대중문화 속 여성은 히어로도, 악당도, 야수도 되기 어렵다. 여성은 잘해야 <원더우먼>이지만 남성은 늑대인간도 히어로도, 옷을 찢고 변신하는 헐크도 된다. 하지만 남성의 탈인간화는 언제나 문명으로의 복귀를 답보하고 있다. 결국 남성은 그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지만 여성에게는 그 자유로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팜므파탈이나 여전사는 남성과 문명이 여성의 야수성을 가두기 위해 만든 표현에 불과하다.


때문에 여성의 폭력성과 야만성, 그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영화는 손에 꼽는다. 그나마도 폭력에 국한되고 그마저도 전후의 장치를 섬세히 배치한다. <롱키스굿나잇>처럼 그것은 망각 저 너머에 존재하는 무서운 힘이거나, <솔트>처럼 감춰진 진실이거나, <캣우먼>처럼 상처 입은 여성의 부활의 맥락에서만 보여줘야만 대중이 납득할 수 있다. <아토믹 블론드>의 로레인이나 <킥애스>의 힛 걸, <킬빌>의 빌도 같은 맥락이다. 설명할 수 없는, 논리 없는, 과거 없는 여성의 폭력은 존재할 수 없다.


여성의 에로스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의 에로스로 이 질서 잡힌 문명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성의 에로스와 그 욕망의 표현은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엠마뉴엘>의 관능, <변강쇠>의 과잉, 80년대의 서툰 에로 영화의 관음, 딱 그 수준이다.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장악하는 내러티브는 거의 없다. 그 신비로우면서도 공포 서린 힘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금기다.


일상에서 추방된 에로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별 희한한 야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그런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도 있고. 윤여정 선생님 정도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일은 십 년전 이야기이고, 조금만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금방 이십 년, 삼심 년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연애 경험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 경험의 폭도 좁다. 애석하게도 머리칼을 노랗게 빨갛게 염색한 여자도, 문신이 있는 여자도, 담배 피우는 여자도 사귄 적이 없다. 당연히 미술을 하거나 음악을 하거나 무용을 하는 여자도, 공부를 엄청 잘하는 여자나 공부를 엄청 못하는 여자도, 검사나 판사나 범법자도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어중간한 사람이다 보니 상대도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럭저럭 이 나이 정도 되면 이 어중간하고 무난하고 평범한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희한한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듣게 된다.

한 번은 관계 중에 전혀 소리를 안 내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땀과 소리가 없으면 섹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라 잠시 이완의 시간을 가질 때 슬쩍 물었다. “소리를 안 내는 거야, 못 내는 거야, 안 나는 거야?” 우선 안 나는 거라고 답하면 원인은 나에게 있다. 안 내는 거라면 나름의 철학이다. 못 내는 거라면 길들여졌거나 성대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녀가 말했다. “안 내는 건가?” 서른이 넘어 만난 연인이라면 과거 이야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 나이 때까지 경험이 없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거나... 그만하자.

어찌 됐든 그녀의 말은 이랬다. 대학 때 선배랑 사귀었는데 섹스를 그 선배의 자취방에서 처음 하게 됐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원룸 같은 방들은 방음에 소홀하니 그 소리가 문 밖을 넘는 게 당연하다. 이 경우 대부분 여자들이 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게 싫어 참는데, 오히려 선배가 조용히 하라고 했다고 한다. 여자의 소리가 큰 것도 싫고 그 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다고 했다고 한다.


“흠... 희한한 놈이네. 자기 때문에 좋아서 북받쳐 오르는 쾌감 때문에 나오는 소리를 참을 수 없어 그 소리가 문 밖을 넘어 건물 밖까지 들린다면, 그거야말로 뿌듯한 일 아닌가? 희한하네.” 이런 대화를 한 후 그녀는 맘껏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시각에 주로 자극받는다는 말에 속지 마라.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황당했던 이야기는 아내의 지인 이야기다. 이 남자는 정해진 그 장소를 벗어나면 할 수 없는 남자다. 그런데 그 장소가 아주 협소하다. 바로 안 방의 침대. 그러니까 그 더블 침대 외의 장소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에선 좀처럼 화장실에서 큰 일을 못 보던, 딸의 1학년 시절 같은 반 남자 애가 생각났다 “뭐라는 거야.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그럼 연애할 때 여행 가서는 어떻게 했대?”, “그냥 잠만 자고 왔대.” 남자가 그런 이유를 물었다. 자란 곳이 충남의 어디 사찰이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난 십 대 시절 잠시 교회에서 산 적이 있기에 그런 건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안 방에서 쫓겨난 에로스

요즘 아파트에는 안 방에 따로 작은 욕실이 딸린 경우가 있다. 우리 집에도 안 방에 딸린 작은 욕실이 있다. 이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건축과 학생이 교수에게 물었다고 한다. “교수님, 거실에 큰 화장실 겸 욕실이 있는데 굳이 안 방에 또 만들 필요가 있나요?” 교수가 답했다고 한다. “부부가 한 밤 중에 관계를 하고 거실에 있는 욕실까지 가서 씻는 건 좀 민망하지 않겠나. 안 그러려면 옷을 입고 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땀이나 타액 등이 묻게 되니 그 또한 불편할 테고. 그래서 안 방에 따로 욕실을 만드는 것이라네.”


교수는 틀렸다. 우리네 안 방에서 에로스가 쫓겨난 지 제법 됐다. 우리 집 안방의 욕실은 십 년 넘게 계속 창고로 쓰였다. 최근 아내와 딸이 코로나 19에 걸린 후 자가 격리를 위해 짐을 비워내고 안방에 격리를 할 때만 겨우 화장실 구실을 했을 뿐이다. 다른 집들도 일 년 중 대부분은 화장실로만 쓰일 것이다. 아니면 장손이나 장남이라면 명절 때 좀 빈번하게 쓰였을지도. 이미 우리나라는 섹스리스 순위로는 세계 1위다. 그러니 교수의 말은, 그렇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틀렸다. 학생은 섹스가 끝난 후 알몸으로 거실을 가로지르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본 적도, 상상할 수도 없으니 당연히 교수의 말도 납득이 안 갔을 것이다. 그저 교수가 말을 하니 그러가보다 하고 넘어갔겠지.


“섹스를 시작하려면 더러 한쪽 파트너가 치욕스럽게 보일 만한 성적 욕구를 드러냄으로써, 약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일들을 논의하다가(가령, 세탁기를 어떤 것으로 바꿀지, 내년 휴가는 어디로 떠날지 등을 상의하다가), 다소 색다르고 난해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이 말도 일리가 있다. 이 난해함이 에로스를 안 방에서 몰아낸 또 다른 이유다.


금지된 건 상품이 된다.

소리를 금지시키고 안 방의 침대를 벗어나서 할 수 없는 남자들과 그들의 고지식한 사고와 문명이 에로스와 그 야수성을 안 방 밖으로, 질서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은 남아 있기에 결국 에로스는 문명과 남성이 수용할 수 있는, 길들여진 상품이 된다. 상품이 된 에로스와 야수성을 흉내 낸 상품이 일탈이라는 이름으로 만연해진다. 금기가 많은 사회일수록 이 일탈에 관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얼마 전 김영하 작가가 말했듯이 우리 사회는-특히 남자에게- 만취에 관대하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성매매는 성인 남자의 일종의 통과 의례 대접을 받기도 했다. 권력에 의한 폭력의 시대와 그 사회의 상품화된 에로스와 타자화 된 여성들이 상품화됐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적 권력이 만들어낸 형식화된 야만이었다. 그렇게 우린 이십 세기말을 보냈고, 그 시기 에로스는 음지의 구조를 형성했다. 덕분에, 불행히도 잃어버린 야성, 가정에서 추방된 관능을, 불륜과 성매매에서 찾아 회복하려는 헛된 시도들이 세기를 넘어 잔존하게 됐다.


삿포로의 바니 걸

안 방에서 에로스와 여성의 야수성을 감당할 수 없던 남자들은 그것을 전시된 형태로라도 보고 싶어 한다. 한 십여 년 전 삿포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관광객들이 인도에 서서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막 맥주를 사서 편의점을 나오던 나도 그들의 시선을 쫓아갔다. 대로변, 평범한 건물 2층엔 창문 대신 철망이 있었다. 그 안에 바니 걸 복장을 한 여자들이 길을 향해 등을 보인 채, 바를 사이에 두고 남자들의 술 상대를 하고 있었다. 그 안의 남자들은 자기 애인이나 아내에겐 차마 말할 수 없었던, 할 수 없었던 말과 욕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문명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은 그렇게 바니 걸이라는 상징에 의지하여 자신의 욕망을 토해냈다. 그건, 그렇다. 구토 그 자체였다. 이런 남자들이 종종 연인이나 아내에게 코스튬을 입히고 역할극을 시도하는지 모르겠다. 그 코스튬과 역할극은 자신의 연인을 타자로 규정하고, 그 타자의 야수성에 세상에 있는 적당한 이름을 붙인 뒤 다시 일상으로 보내기 위한 안전한 장치다. 이 또한 에로스를 일상에서 몰아내려는 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에 나온,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는 문장엔 바로 이런 상황이 함축되어 있다.


에로스의 정글

안 방도 에로스의 정글이 될 수 있다. <캣피플>의 반인반수, 검은-표범-인간은 섹스를 할 때마다 밖에 나가 타인을 죽여야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 순서와 대상이 바뀌었다. 문명의 나를 문명의 시공간 밖에서 죽이고 들어와야 에로스의 공간에서 비로소 야수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연인이라면 그 안과 밖의 연인 모두를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가 만든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야수성을 부르짖을 수 있게 한다.


결국, 연인에게 영혼과 육체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나와 타자를 볼 수 있는 것이 에로스다. 그래서 나에게 야수성을 보이는 타자에게 감사해야 하고 나에 야수성을 뛰어놀게 하는 이에게 감사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기꺼이, 오직 당신에게만 길들여지겠다는 표현이다. 개가 배를 보이며 순종을 표시하는 것처럼. 짐승 같이 날 먹어치우던 연인을 강아지처럼 쓰다듬으며 보낼 수 있는 오르가슴 이후의 시간의 역설적 상황의 공존은 가능하다.


당신의 침대에서 그 어떤 제한도, 자기 검열도 없이 맘껏 노는 연인을 보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당신과 있는 성애의 공간이 그녀의 실재, 일상 세계를 온전히 지켜주는 놀이터이길 바란다. 에로스는 야성이며 난폭하고 그래서 자유 그 자체이기에, 자유롭지 않다면 그건 에로스가 아니다. 자유롭지 않다면 그건 야성이 아니기에.


나만의 정글, 나만의 야수

이 야수성의 자유로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연인은 서로를, 그리고 두 사람 모두를 볼 수 있다. 사진이나 촬영도 필요 없다. 그런 건 불안만 남기고 기억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에로스를 볼 수 있다. 타자를 관음 하지 않아도 우린 충분히 볼 수 있다. 모텔이나 호텔 벽에 거울이 많은 이유다.


그 거울은 우리의 야수성을 확인하는 관람 장치다. 거울 속의 나는 타자화 된다. 동물원의 짐승처럼 전시된, 야수화 된 주체가 보인다. 타자에 대한 인식은 이성의 일이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섹스를 하고 있는 나와 연인을 본다는 건 야수가 된 나를 인식하는 이성적 행위다. 이성과 문명의 금기를, 지금 깨고 있는, 혁명가적인 자신과 연인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혁명가이자 그 혁명을 목격하는 증인의 순간. 야수의 행위와 이성의 관람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한병철의 글을 다시 인용하자. 그는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사귀었던 여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평범한 여자들이다. 집에선 착한 딸, 직장에선 근면 성실한 직장인, 학교에선 모범생, 교회에선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나에게는 연인이었다. 에로스였다. 연인이자 에로스 그 자체인 사람이 날 미친 듯이 탐식한다고 해서 그녀의 고귀함이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날 믿고 내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그 야성을 숨김없이 드러내 준 여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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