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습격에 대비하지만
사랑은 스파이를 보낸다. 영화 <매트릭스>의 오라클의 말처럼 사랑에 빠진 걸 아는 건 자기가 네오인지 아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 외에는 사랑이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사랑의 대상도 모르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느닷없이 일어난다. <색계>에서처럼 아주 계략적이고 비즈니스적인 만남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영화 <차이나타운>에서처럼 빚 받으러 갔다가 습격당할 수도 있다.
아무리 첨병을 보내고 수색대를 보내고 사랑이 오길 기다리며 밤샘 매복을 해도 우린 언제나 사랑에 기습당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작되는 것과 사랑을 누군가와 하는 건 다르다. 상대도 나에게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우린 타자에게 스파이를 보낸다. 첩보위성을 띄우고 미행을 붙인다. 진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설령 실제로 그렇게 하더라도 영화처럼 야단을 떨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24시간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스파이와 염탐꾼이 하는 짓이다.
사랑이 시작돼도 우린 여전히 스파이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스파이는 이제 이성과 사회의 영역으로 보내진다. 어느 강연에서도 같은 얘길 했지만 연애는 사회적 행위다. 특히 이제 막 하루 이틀을 헤아리는 순간에는 약속 대련 같은 데이트가 펼쳐진다. 그건 마치 명절에 모든 이들이 다른 집에서 다른 가족과 같은 모양새로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다 다른 연애를 하지만 다 같은 데이트를 한다.
이런 사회적 행위는 이성의 영역이다. 모두가 비스름한 모양새로 연애한다는 건 연애가 사회적 행위임을 말하며, 이 수준에서의 연애는 아직 정신 줄을 놓지 않았음을 의미 한다. 옷도 잘 입고, 화장도 잘하고, 식사도 대체로 깔끔한 걸 먹는다. 감자탕이나 곱창전골은 이 초반, 이성을 동반한 탐색전, 사회적 행위로써의 연애 시기의 메뉴로는 부적절하다.
스파이가 퇴출 되는 순간
스킨십의 웜홀을 통해 연인은 이성 저 너머로 빨려든다. 저 너머의 영역은 둘만의 자유로운 비밀의 영역이기에 스파이는 퇴출된다. 상대를 느끼는 일은 이제 땀과 피부, 눈빛, 손끝, 뜨거운 숨결에게 맡겨진다.
스킨쉽은 연인의 모든 육체적 행위와 은밀함, 뜨거움을 담고 있는, 위대한 콩글리시다. 영어의 표현은 Cuddling이나 Touching을 쓰는데 이런 행위를 통틀어 Physical affection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하듯 다른 나라들도 나름 이쪽 분야엔 복잡다단한 속어들이 쓰이지 저런 뻔하디 뻔한 교과서적인 단어를 쓰진 않을 것이다. 우리네 스킨십과 같은 포괄적인 어떤 단어 아래 수 없이 많은 은밀한 속어들이 한 시대와 세대를 풍미했다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은밀함과 저들의 은밀함, 중년의 은밀함과 청춘의 은밀함이 그 모양새가 제 각각이든 그 쓰는 단어 또한 그러하겠지만 그 안에 담긴 뜨거움은 같을 것이다.
지루한 사랑은 없다.
말할 수 없는 일,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는 시간은 결국 이 영화에서처럼 긴 씬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죽여야만 하는 조국의 적과 나눈 정사여서 동지들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사는 그렇게 말로 표현되는 순간 평범한 사건이 되어버리기에 말할 수 없다. 색계에 나왔던 모든 체위가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저 평범한 필라테스 자세 설명하듯 무미건조한 난이도 높은 신체 행위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은 비밀이 된다. 모든 사랑은 결국 비밀의 영역을 만든다. 세 평 남짓한 모텔에서 일어난 일을 다 말할 수 없다. 어떤 자세로 했고, 몇 시간을 했고, 둘이서 했든 셋이서 했든 밖에 나오는 순간 안의 일은 사라지고 설명될 수 없다. <색계>의 스파이 행위는 이 말할 수 없는 사건에 다다르는 여정의 함축이다.
경험이 없는 주인공이 서툰 스파이 동료들과의 섹스를 통해 섹스의 경험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 경험만 쌓으면 뭐든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언제나 이렇게 경험 없는 이들뿐이다. 단언컨대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듯 섹스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의 사랑으로 오늘의 사랑을 판단하는 이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지금 이 사랑의 충격이 지난 사랑의 충격과 같을 수 있을까? 사랑이 그런 경험에 불과하다면 우린 두 번째에서 이미 지루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랑을 자신의 경험으로 해석해버리는 이는 이미 지루한 인생을 사는 것이니 다른 사람까지 지루하게 하지 말길. 결국 연인들은 비밀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자신들의 뜨거움을 표현할 단어는 세상에 없다. 세상에 있는 단어는 연인의 환희를 박제로 만들어 버린다. 죽어 박제 되느니 침묵을 택한다.
결국 모든 사랑은 비밀과 침묵 속에 파국을 맞는다. 이 파국에서 연인을 구할 수 있는 제3자는 없다. 그렇게 연인은 파국 앞에 무력하다. 한병철은 에로스는 주체를 타자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에로스는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주체가 죽어야 성사된다. 아니 최소한 죽음을 무릅쓴 각오만이 진정한 에로스를 향한 다리를 놓는다. <색계>는 결국 사랑과 그 사랑을 통과하면서 겪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한 주체가 사랑을 통과하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랑을 통과하고도 어제와 같은 존재로, 어제와 다름없이 산다고 담담히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랑에 신체적, 정신적 모험을 걸지 않은 사람일지도. 사실 <색계>에 나온 그 위험한 체위들은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 곡예 같은, 낯선 마음의 도약을 동반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그 체위를 흉내 내는 바람에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웃픈 뉴스는 역설적이게도 영화 같이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없는 많은 연인과 부부들이 그 불가능한 체위의 흉내를 자신들의 지루한 사랑에 대한 변명과 방패로 삼았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게 병원에 누운 연인들은 그 체위를 실천하면서 사랑의 뜨거움과 육체적 뜨거움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절감해야 할 것은 그 지루하고 밋밋한 사랑의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체위의 불가능함이 연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뻣뻣함에 있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가야 할 병원이 정형외과가 아니라면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