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에 기꺼이 자기 살갗을 문대던 사람이 있었다. 피부를 뚫고 들어오려는 기생충처럼 살갗과 살갗 사이의 경계를 없애며 더 깊이 품을 파고들던 사람이 있었다. 살 냄새를 맡기 위해, 자신의 살 냄새에 날 중독시키기 위해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내게 안기던 사람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내 땀의 맛에 중독되어 갈증에 시달리며 사막을 건너온 사람처럼 내 땀방울을 몸서리치게 갈망하던 사람이 있었다.
대화를 할 때마다 늘 눈을 마주치고 날 받아들일 때도 눈을 똑바로 보며 그 환희를 몇 개의 파열음으로 표현하던 사람이 있었다. 더 깊이 안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 품을 열어 내 영혼과 몸을 빨아들이듯 온 몸으로 날 안아주던 사람이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등에 말캉한 가슴을 문대며 꼭 안은 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물건의 무게를 가늠하듯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다시 일으키던 사람이 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때로는 모텔 창에 기대어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차가운 병맥주 한 모금으로 식히고 있을 때, 뱀처럼 다가와 흐르는 땀을 자기의 몸으로 닦아주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 없이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로 유영(遊泳)하게 놔두던 사람이 있었다.
빛바랜 영화
<연인>엔 빛바랜 정서가 있다.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향수 어린 작품이었다. 신작으로 나왔을 때부터 이 영화는 과거의 것이었다. 기억의 씨줄과 날줄을 얼기설기 직조해낸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빛바랜 채 세상에 나온다. 이야기되는 사랑은 이미 과거의 사랑이기에 오늘 처음 발화되는 그 사랑 이야기는 이미 퇴색되어 있다. 추억의 영광을 덧입을 뿐 모든 사랑은 결국 낡고 닳는다. <연인>은 그런 이야기고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 또한 그렇다.
<연인>의 주인공,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백인이든 중국인이든. 완벽하게 차려입었든 맥고모자에 낡은 구두를 신었든. 나이 든 남자도 앳된 여자도 모두 속박되어 있다. 식민지에 묶여 있던 프랑스처럼, 제국의 과거에 젖어있던 중국처럼.
대부호의 아들인 “중국 남자”는 노동하지 않는다. 시간과 돈이 남아돈다. 이렇게 돈 많은 중국 남자가 은밀한 연인을 두는 건 관례였고, 그 연인과의 밀회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것 또한 관례였다. 반면, 아무리 가난한 프랑스 여자라도 격식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가난이 도를 넘으면 격식을 지키며 살 수 없고 낡은 구두와 남자들의 맥고모자를 쓴 채 원주민으로 가득한 배에 유일한 유럽 소녀로 승선하여 의문스러운 시선들을 감당해야만 한다. 큰 홀에 수십 개의 침대들만 놓여있는 기숙사에서 사생활을 포기하며 학교를 다녀야 한다.
모두가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결국, 누가 자유를 쟁취했던가? 프랑스 소녀의 가족은 부유한 중국 남자의 자본으로 경제적 자유를 갈망한다. 유색인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중국 남자를 식사에 초대한 이유다. 그러나 프랑스 소녀는 그런 자유를 꿈꾸지 않는다. 다만 사랑할 뿐이다.
모든 걸 가진 남자는 수많은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지 못했던 자유를 오직 그녀의 품에서 찾게 된다. 널 만나고 고통을 알았다는 중국 남자의 고백은 이 만남이 그의 인생에 유일한 사랑이었음을 말한다. 그전에 그가 했던 것은 사랑의 모사품, 모조품에 불과했다. 진공관이 필요 없는 시대에 만들어진 진공관 앰프처럼. 남자가 알게 해 준 건 육체적 행위였을 뿐, 사랑의 자유는 온전히 프랑스 소녀의 가르침이었다.
사랑이 추억이 되는 이유
결국, 이 사랑이 끝난 후, 실질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두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사랑을 겪은 모든 이들은 그 전과 후가 달라져야만 한다. 철학자 이정우 교수가 <주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산다는 건 경험이고 경험은 결국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을 겪을 때마다 우리에겐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 차이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기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기억한다는 말은 그래서 아이러니다. 사랑 이후 달라진 내가 사랑하는 동안의 나와, 그 사랑 이전의 나를, 그리고 사랑하는 동안의 연인을 이미 달라져버린 주체인 내가 애써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 때문에 기억은 추억이 된다. 사랑할 때의 내가 아닌 그 사랑을 겪은 후의 나는 그 사랑의 순간을 그 사랑을 겪을 때와 다른 존재가 되어 그 기억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래서 모든 사랑을 겪은 이들은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랑을 회고한다. 그 회고는 추억으로 이어진다.
중국 남자는 어린 소녀를 평생 기억한다. 그랬다고 통화에서 말했다. 기억의 용량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평생 기억하기 위해선 아주 많은 사람을 기억 속에서 몰아내야 한다. 백 명을 안아도 한 명의 살갗이 문신처럼 남을 수 있다. 수십 번의 사랑을 해도 단 하나의 사랑만 후회를 남긴다. 단 한 명의 사람만 내게 자유를 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