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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배지에서

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 3 -지독한 사랑(1996)

by 최영훈

강수연의 대표작

이 영화로 강수연을 기억한다. 누군가 강수연에 대해 물으면 퍼뜩 생각나는 그녀의 모습이 이 영화 속에 있다. 까만 단발머리, 피할 수밖에 없는 당돌한 눈빛, 여과 없는 말투. 수많은 강수연의 작품 중 이 영화만 기억에서 불거져 있다. 왜일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제목과는 다르게 그냥 평범한 사랑 이야기인데 말이다. “아니, 무슨 소리야. 불륜을 다룬 영화인데.”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영화만큼 사랑의 민낯을 보여주는 영화는 없다. <연인>처럼 이 영화 또한 낡은 이야기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모든 사랑 이야기는 낡고 상투적이고 이 영화는 그 상투성의 극한이다.


작품론이나 작가론이 아닌 이 글의 성격에서 벗어난 말을 몇 마디 억지로 얹자면, 난 이명세 감독을 좋아한다. 특히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영화관에서 봤을 때의 충격은 <중경삼림>을 영화관에서 봤을 때의 충격과 같았다. 한국에도 이런 감독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 : 듀얼리스트>에서의 테크닉이 대중들의 기호와 어긋났을지 몰라도 영화는 결국 빛과 색, 이미지의 놀음임을, 그는 증명했다.


뻔한 사랑의 민낯

다시, 영화 속 사랑 이야기로. 시인이자 교수인 중년의 유부남과 여자 기자가 사랑에 빠진다. 아내까지 이 사랑극에 참전하면 <해피엔딩>이나 <언페이스풀> 같은 복수극, 또는 <부부 클리닉-사랑과 전쟁>에서 다룰법한 비윤리적 사건이 됐겠지만 영화는 그리 가지 않고 두 남녀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다.


“응? 잠깐, 불륜을 욕하지도 않고, 사건으로 다루지도 않는다고?”, 그렇다. 이 영화의 장점이자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은 시작할 때처럼 예고 없이 끝나는 것이라고. 그러니 사랑하는 동안 열심히 사랑하고 치열하게 싸우고 궁상맞은 공간이더라도 함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음껏 누리라고. 불편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이 흔한 불륜의 이야기로 사랑의 속성, 그러니까 신격화되지도, 미화되지도, 선남선녀의 것만이 아닌 그저 흔한 사랑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한다.


사랑의 유배지

지형은 삭막하고 공간은 궁핍하고 궁상맞다. 황량한 해안 마을에 덩그러니 집 한 채가 있고, 그 안에 방 한 칸이 있다. 사랑의 터전이자 전장이다. 함께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고 여자는 출근하고 남자는 시를 쓰는 시늉을 하고 연탄불을 갈고 저녁을 준비하고 설거지 때문에 싸우고 밥을 먹다 눈이 맞아 섹스를 하고 조그만 부엌 구석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한다. 사랑을 하고 사랑 때문에 싸우고 사랑을 끝낸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여기에 있었다.


이 사랑의 유배지에서, 여자는 일상으로 나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한다. 반면 남자는 거기 머문다. 남자에게 이 공간 밖은 가정이다. 가정은 일상이고 정상의 세계이자 이성의 세계다. 남자는 그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밖에서는 교수이자 시인이지 남편일 수 있지만 이 사랑의 공간에서는 남편이자 연인으로 살 수 없다. 그 불가능함을 아는 남자는 은둔한다. 스스로 유배당한다. 스스로 사랑의 감옥에 들어간다. 사랑에 감염된 자가 격리.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박라연의 시를 인용하자면, “전기가 나가도 좋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사랑은 낯선 사건이다. 전에 없던 사람에게 전에 없던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반복해 말하건대,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랑은 없다. 그렇기에 사랑은 시공간을 왜곡시킨다. 혹시라도 새 애인을 데리고 옛 애인과 갔던 장소를 가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이유다. 애초에 사실, 사물, 공간 따위엔 의미가 없다. 모든 의미는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다. 공간은 사람과 함께 개별적으로 기억되고, 사랑으로 인해 의미부여된다. 이명세 감독은 그걸 알았고, 그렇기에 그 남루한 공간에 사랑에 눈먼 두 남녀를 데려다 놓은 것이다.


사랑이 공간의 조건이지 공간이 사랑의 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한다. 세련되고 모던하게 인테리어 한다고 해서 사는 모양이나 사람 생각까지 그렇게 되진 않는다. 인테리어 좋은 곳에서 섹스를 한다고 새삼 잘되는 것도 아니고 한 평짜리 고시원에서 한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어떻게 섹스를 할 수 있냐고 연인이 따지거들랑 헤어져라. 어떻게 나를 이런 곳에 데려올 수 있냐고 따지거들랑 헤어져라. 사랑으로 그 공간이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끝난 것이다. 사랑이 빠져나간 공간은 폐허가 된다. 사랑이 빠져나간 사람 역시.


운명이 묶이는 몸 둘 바 모를 축복

사랑만이 둘만의 격리된 공간을 창조한다. 이 사랑의 격리는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떠올리게 한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길 원하는 바람은 지독하게 사랑 중인 연인이나 품을 수 있는 염원이다. 이 격리의 소망은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라고 시인이 고백하듯, 평생 한번 겪을까 말까 한 무서운 열병 같은 사랑만이 이뤄줄 수 있다. 그 사랑의 충동만이 두려움 없이 막장의 공간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 그곳에서의 격리는 함께 겪는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이자 유배다. 아주 먼, 이성과 시선이 닿지 않는.


옛사랑에게 들은 얘기다. 서예 동아리 활동을 하던 국문과 여자다. 그 친구가 언젠가 선배 동아리 부부 얘기를 해줬다. 사과 궤짝 같은 걸로 적당히 세간을 만들어 살림집을 차린 후 애들 서예를 가르치며 신혼살림을 시작했다는. 그 몇 달 후였나... 친구는 집에서 하도 날 반대하니 자기랑 도망가자며, "내가 먹여 살릴 테니 내가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줘." 하며 한 카페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날 똑바로 보며 말했었다. 내가 늦게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벌써 4학년이었으니 빈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도 저 사랑의 유배를 겪을 뻔했다. 벌써 30년 가까이 된 일이다.


저때만 해도 저런 멘트는 보통 남자가 했었는데, 여자한테 저런 말을 들었던 걸 보면 그 친구가 참 시대를 앞서 갔거나 무모했고, 그렇게 앞서가고 무모할 만큼 날 사랑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친구랑 살았다면, 또는 그 이후에 만났던 무난했던 사람들 중 하나와 살았다면 이런 부산 같은 대도시의 삶과는 무관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젊은 날의 소망대로 작은 동네에서 서점이나 꽃집을 하거나 팔리지도 않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현실 감각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사랑까지 현실적으로 할 거면 사랑하지 마라. 사랑이 환상이어서도 안 되지만 현실의 연장이어서는 더 안 된다. 사랑은 현실의 남루함을 이겨내는 사치스러운 축복이니까. 누가 먹여 살리든,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는 게 남루해도 잔치 같은 사랑이 넘치던 시간이 있었다. 박라연의 시처럼 길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함께 살면서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에서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함께 꿰매던 시절이 있었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하며, 명절 때마다 자식들 앞에서 민망한 척, 부끄러운척하며 사랑이 넘치던 공간과 시간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 사랑답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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