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사 시절 제자들이나 최근에는 종종 업계 후배들을 만나 얘기를 하다 보면 놀라곤 했다. 먼저, 감정의 진폭이 상당히 넓고 깊어서 이미 감정의 결이 단순해지고 딱딱해진 중년의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또 엄청난 자기애와 바닥 모를 자기혐오가 공존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떤 날은, 요즘 친구들 말로 Flex를 연신 외치면서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고, 어떤 날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을 읊조리고 흙수저 신세를 한탄하면서 매번 하는 일마다 폭망 했다고 끝도 없이 자조했다.
이 청춘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기 확신과 자기애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가 정박 효과라며 표현한 소위 닻 내리기 효과조차 없는, 그러니까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준거가 없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건 어쩌면 그들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자본주의는 소비자가 어디 한 군데 닻 내려서 정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분기별로, 계절별로, 연도별로 계속해서 태도를 바꾸기 원한다. 이번 겨울에 롱 패딩이 진리라고 믿었다면, 다음 겨울엔 숏 패딩이 정답이라고 믿길 원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큰 변화 없이 이 년 동안 두 시즌 반복된다면 그건 거의 내복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소위 말해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자기 확신이 없는 시대
이런 시대에 청춘들이 자기 확신을 갖고 나를 지탱하며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중년의 아저씨나, 할머니들처럼 유행과 상관없이 등산복을 입거나 꽃무늬 바지를 입는 건 청춘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늘 외풍에 시달리고, 그 시달림 끝에 쓰러지고 그 모양새를 바꿀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요즘의 청춘이고 이 자본주의가 원하는 소비자다.
이렇게 살다 보면 당연히 모든 분야에서 자기식대로 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톡방의 흐름에 따라 사교육을 하고, 대학에 올라가면 전도유망한 학과를 지원해서 든든하거나 트렌디한 자격증 따기에 열을 올린다. 그도 아니면 안정된 공무원 관련 시험을 준비하고. 이쯤 되면 8살 때부터 최소한 서른 살까지는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사람인지 찬찬이 뜯어볼 시간 없이 성장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렇게 성장하다 보면 나는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대 애를 먹게 된다. 정체성이 없는 주체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DC나 마블의 영웅처럼 가면을 쓰고 활약하는 영웅을 사랑하는 것과 그 가면 안의 자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의외로 아주 일찍부터 세상이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모범생의 전형이 만들어지고 어떤 친구들은 순발력 있게 그 전형에 부합하는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부모들이 전화를 받게 되어 있다. 심하면 주의력 결핍 장애가 아니냐며 주변의 우려를 산다.
이쯤 되면 우리가 남에 눈치 안 보며 사는 시간은 길어야 영아기와 노년기를 제외하면 얼마 안 된다. 대부분의 생은 사회화된 인간으로 산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가진 욕망, 욕구들은 요구로 승화되어서 기호화된다.. 그 기호들은 소비재로 치환되면서 우리의 지름신을 불러오게 되고, 결국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표어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살게 된다. 이런 삶이 계속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고, 결국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꿈도 못 꾼다.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회에 내놓은 나를 사랑하고 가꾸는 방향으로 자기애가 발전하게 된다.
두 명의 잘 생긴, 그러나 미친놈
<셰임>과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비슷한 두 청년이 나온다. <셰임>에는 회사에선 멀쩡한 여피족이지만 섹스 중독증에 걸렸고, 그래서 정작 어느 누구 하고도 정서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심지어 여동생조차 부담스러워하는 브랜든이.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모두와 관계를 맺고 전시된 삶을 훌륭히 살아내지만 그 커튼 뒤에 연쇄살인마의 본성을 숨겨 놓은 패트릭이.
두 사람은 물론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다. 자랑할 것도 없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과시도 없고, 으스대는 것도 없다. 단지 섹스, 그 자체에 중독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음을 주는 여자와는 섹스가 잘 안 될 뿐-물론 이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문제지만-이다.
반면 패트릭은 요즘 친구들 말로 관종과 플렉스의 전형이다. 학벌, 직장, 외모, 옷, 심지어 명함까지 일류가 아니면 내놓지를 않는다. 친구가 멋진 명함을 자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여 버리니까. 그리고 섹스를 하면서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이렇게 섹시한 남자를 본 적 있어? 뭐 이런 표정으로.
나라는 알맹이를 사랑하는 데 실패하다.
그러나-둘은 아주 상반되게 표현하긴 하지만-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다.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브랜든은 과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모르지만 섹스 외에는 여성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외로워도 슬퍼도 섹스가 만병통치약이다. 여자를 볼 때도 중간 과정 생략하고 무조건 섹스만 생각한다. 모처럼의 데이트를 통해 만난 여자하고 아주 멋진 호텔을 갔지만 정작 발기가 안 돼서 그 여자가 떠난 후 콜걸을 불러 섹스를 할 정도로 중증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다. 라캉식으로 얘기하면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승화시켜 줄, 그래서 그 어린 시절의 것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 시간, 상징을 갖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오직 섹스만이 욕망의 대체물이자 모든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혐오, 반복된 자기 자책과 회개, 그리고 그로 인한 파괴를 반복하고 다시 섹스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어린 왕자에 나온 술주정뱅이처럼 술에 늘 취해 있는 게 부끄러워서 그걸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
반면 패트릭은 모든 것에 욕망을 투사한다. 옷, 차, 직장, 헤어스타일, 고급 식당의 금요일 밤 예약, 그 유명한 명함 신을 만들어낸 멋진 명함과 명함 케이스, 섹스를 하는 자기 자신. 그러나 그것으로도 자신의 충동을 어찌하지 못해서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 어떤 사물로도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타자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전지전능함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겐 회개도, 자책도, 반성도, 두려움도 없다. 오직 신이 돼가는 자신을 확인하는 쾌락뿐이다. 그래서 스스로 외로운 존재라는 것, 바닷물을 마시는 조난자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성공한 두 남자 - 심지어 잘 생기고 정력 좋고 학벌 좋은-는 왜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할까? 태진아 선생님이 그랬다. “사랑은 진실인 거”고 그래서 진실하지 않으면, 어쩌면 사람을 “만나도, 만나도 느끼지”못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국 “외로운 건 마찬가지.”라고. 그렇다. 두 남자 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고, 정작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 결국 타자도 섹스의 대상, 욕망의 분풀이 대상으로만 본다.
결론적으로, 둘 다, 근본적으론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는데 실패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브랜든은 동생을 부담스러워하고, 정상적(?)인 데이트를 힘들어한다. 패트릭은 약혼녀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자신이 그 약혼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는 것도 괘념치 않는다. 어떤 타자보다 자신의 욕망이 우선하기에 모든 관계는 자기중심적이고 전지전능한 위치를 보존하는 데만 타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셰임과 아메리칸 사이코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세상에 자연 그대로 존재케 하면서 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달리기의 두 종류
그나마 <셰임>의 브랜든은 그 문제를 알고 있다. 자신에게 어떤 하자가 있는지를. 포르노 CD와 잡지, 그리고 음란물과 음란 채팅으로 인해 바이러스가 가득해버린 노트북도 버려가면서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소위 정상적인 남자로 돌아가려 애쓴다. 그리고 또 하나, 달리기를 한다.
그의 달리기는 책망의 달리기이자 금욕을 위한 달리기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든 눌려보려, 다른 방향으로 풀어보려 달린다.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잊기 위해 달린다. 그래서 그의 달리기는 상징체계로 미처 환원되지 못한, 승화되지 못한 욕망을 현실 속에 정박시키려 애쓰는 위태로운 닻줄이다. 달리기는 사회적 존재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싶은 그의 자기애의 다른 표현이다.
반면 영화 <아워 바디>에서 자영의 달리기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고, 더 나은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며 살다 잃어버린 진짜 자신과 만나는 도구다. 둘 모두에게 달리기는 자기애의 표현이고 그 경로 중 하나인 것 같지만 브랜든의 달리기는 책망과 훈육의 달리기이고 자영의 달리기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드디어 사랑하게 되는 달리기다.
능동적으로 날 사랑하기
이 영화, <아워 바디>에서 주목해야 할 건 두 명의 여주인공 현주와 자영이 궁극적으론 비슷한 존재라는 것이다. 현주는 작가이고 자영은 앉아서 공부를 하는 고시생이었다. 둘 다 책의 세계, 글의 세계가 그들 세계의 전부였고, 특히 자영에겐 공부 그 자체가 이십 대 전체를,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 이후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뭔가를 해서 자신의 몸을 바꿔나가는 그 능동적 세계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사법고시나 임용고시 같은 시험은 아이러니한 제도다. 똑같은 걸 공부해도,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더 노력하는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에게 질 수 있다. 게다가 그날의 컨디션이나 시험의 난이도에 따라 발생하는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의 삶의 통제권이 밖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내가 선택했지만 결과를 통제하는 건 눈에 안 보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택의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자기 폄하, 혐오, 비하로 악화된다.
그 악화의 기로에서 자영은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렇게 변화된 자영은 성적인 쾌락과 판타지의 실현을 위해 자기가 먼저 유혹하고, 거리낌 없이 고급 호텔을 예약해서 자위를 한다. 사회적 존재로 살고 살아내고 앞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내기 위해 소외시켰던 자기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어찌 보면 자영의 달리기는 자신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과정이다. 남자의 유혹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소한 환상의 완성을 위해 남자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서 굳이 사회가 용인한 쾌락의 구조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을, 그 구조가 완성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 결과, 자영은 고급 호텔에서의 섹스라는 환상을 실현한다. 혼자 체크인하고, 침대에 누워서 자위를 하는 것으로. 게다가 어린 남자는 자신의 몸만 자랑하지만 나이 든 남자는 그렇지 않다면서, 나이 든 남자랑 섹스를 해보고 싶다는 현주의 바람을 자영은 실제로 연하의 남자와 섹스를 해보고 이해하고 나이 든 부장과 섹스를 한다.
여성, 특히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 이후로 자기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점점 소외된다. 운동장은 그야말로 체육 시간에나 나가보는 곳이고 고등학생쯤 되면 등교할 때 지나치는 곳일 뿐이다. 요즘엔 실내 체육관이 많아져서 운동장 스케일의 운동은 여성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오죽하면 KBS와 EBS에서 운동하는 여성과 여학생의 학교 체육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을까.
여성들의 신체는 자본주의와 사회의 시선으로 재단되어서 그저 옷의 사이즈만 알면 됐다. 운동을 해서 자기 몸을 변화시키고 몸의 능력을 향상하는 일은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기며 성장했다. 자영도 그런 여학생 중 한 명이었고, 이십 대 때는 고시라는 우선순위에 육체적 쾌락이나 향상은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그래서 자영의 달리기는 사회와 취업, 시험에 뺏겼던 자기 신체 통제권의 회수이자 자기 자신 만들기의 가능성을 열면서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통로다.
예쁜 여자의 딜레마
예전에 업계 여자 후배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섹스는 선택권은 여자가 주도권은 남자가 가진 섹스라고. 그러나 자영은 이 두 개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든다. 선택도 주도권도 자기가 쥘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린 이것이 아주 쉬운 것, 아주 흔한 것이라고 여겨선 안 된다. 한 십여 년 전에 제자이자 대학 후배와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이 친구는 과는 물론이고 단과대 안에서도 독 보이는 미모였다. 이 친구는 아주 낡은 내 편견을 깨 주기도 했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엔 예쁜 애들은 공부를 못하거나 안 한다는 생각이 상식이었다. 또 실제로 개중엔 그런 선후배 동료들도 있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적당히 공부하고 졸업 한 뒤 대학 졸업장을 혼수 삼아 결혼을 일찍 할 거라고 말하는 애들도 있었다.
처음 강의실에서 이 친구를 봤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좀 지나 보니 지각 한 번 안 하고 강의 시간에 딴청 한 번 안 하기에 외모에 비해 성실하구나 싶었다. 그러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이 친구가 거의 탑을 찍었다. 틀린 문제가, 내 기억이 맞다면, 한 문제도 없었다. 아마 광고 매체론이었나 그랬던 거 같은데 이 과목은 광고홍보학과의 여러 전공과목 중에서 지루하고 재미없고 딱딱하기로는 아마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이것보다 더 지루한 과목을 꼽으라면 조사론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게 첫 시험에서 내 편견에 돌멩이를 던진 후배는 모든 시험에서 탁월함을 보여줬다. 다른 과목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나중에 성적을 살펴보니 옷 잘 입고 화장 잘하고 미모도 탁월한 친구들은 성적에도 무지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 같은 꼰대의 그런 편견, 예쁘면 공부를 안 할 거라는 그런 편견이 지독히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종의 불안의 한 증세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 후배가 졸업을 앞두던 학기, 나랑 밥을 한 끼 먹자고 했다. 그때까지 여학생하고 단 둘이 밥을 먹은 적이 없던 터라 망설였지만 내가 언제 또 이렇게 미모의 여대생과 마주 앉아 밥을 먹어보겠나 하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 청을 수락했다. 학교 안에 있는 부대찌개 집에 가기로 했다. 그때 그 친구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어, 야, 너 옷 괜찮겠냐?”
“네? 아, 네 괜찮아요. 교수님.”
그렇게 대답한 후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왜 울어?”
“아... 저 이렇게 남자한테 배려받아 본 게 처음이에요.”
“응? 뭔 소리야. 네가 왜?”
사연은 이랬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역 내에서 미모로 명성을 떨쳤던 후배를 흠모하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다들 이런저런 경로로 관심을 표했지만 그 미모의 후광에 기가 눌려 들이대는 놈은 없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들이대는 놈들이 있었는데 꼭 나쁜 놈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놈이 나쁜 놈인 줄 알면서도 헤어지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왜?”
“아... 그러니까 예쁜데 남자까지 자주 바뀌면 사람들이 욕할까 봐서요.”
농담 같겠지만 진짜다. 그래서 한 명을 사귀면 차이기 전까지 죽으나 사나 연애를 했다고 한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나랑 밥을 먹던, 그러니까 4학년 2학기 때는 예비역 선배랑 사귀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었다. 너무 솔직하게-사실 이게 정상인지도, 대학 강사이자 십몇 년 전에 졸업한 선배를 남자로 보고 고민을 솔직하게 못 털어놓는 것이 더 이상하지-얘기해줘서 놀라면서도 기가 찼다. 데이트할 때 일단 모텔부터 시작하는 건 기본이고, 저녁 메뉴부터 영화 취향까지 제 멋대로였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부르면 가야 했고 섹스할 때도 지만 좋으면 그걸로 오케이였다. 말이 끝나갈 때쯤, 후배는 한숨과 눈물을 쏟고 있었고 찌개는 식어 있었다. 분노의 맞장구를 쳐 준 후 이렇게 처방했다.
“너 그러면 네가 꼬신 놈은 없다는 거야?”
“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 학기잖아.”
“네.”
“너. 졸업하면 대전에 있지 않을 거지?”
“네. 아마도요.”, 학교는 대전이었고, 이 후배의 본가는 포항인가 울산인가 그랬다.
“그럼. 뭐, 졸업하면 다시 대전에 올 일도 없겠네? 당분간은.”
“네. 아마 취업도 서울로 할 것 같아요.”
“그렇지. 네 성적이면... 자, 그럼 지금부터 하는 얘기 잘 들어. 너, 남자 선후배나 그냥 오다가다 알게 된 남자들 중에서 맘에 들었던, 또는, 그래 까놓고 얘기해서, 쟤는 잠자리에서 어떨까 궁금했던 애 있었지?”
“네. 있었죠.” 후배는 경쾌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자 그럼. 그 놈들 명단을 쭉 적어. 뭐 연락처야 한 두 다리 건너면 알아내는 거야 간단하고... 그다음 제일 맘에 드는 놈부터 전화를 해. 그리고 걔랑 하고 싶었던 걸 해. 뭐 밥을 먹어도 좋고, 술을 먹어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고... 그냥 뭐 만나자마자.. 뭐 그래도 되고.. 대신 네가 스케줄을 짜고 데이트 끝날 때까지 네가 리드해. 그냥 그놈은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게만 해.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면 그러면 한 십 년, 아니 한 이십 년 넘게 네 맘대로 못 살아. 그러니까 마음 가는 데로 저지르며 살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올 가을이 마지막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렇게 헤어졌다. 그 후배가 실천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후배만 그런 게 아니라 의외로 많은 미모의 제자와 후배들이 이런 식의 연애에 애를 먹는 걸 자주 봤다. 세상과 남자에게 주도권을 뺏긴 채 그 눈부신 미모와 청춘이 사그라드는 걸 너무 자주 봤다.
우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브랜든의 달리기와 운동은 책망과 학대의 의미와 함께 자기 자신의 성적인 능력의 향상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얼핏 보면 엄청난 자기애의 실현 같아 보이지만, 결국 자기 몸을 쾌락의 도구로만 여기는, 궁극적으론 성적인 도구로만, 주체 밖의 개체로 자기 신체를 전용하고 전락시키는, 유능하게 하는 훈련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의 달리기엔 운동 그 자체의 쾌락과 그로 인한 심신수양은 없다. 결국 달리면 달릴수록 허무하고 절망한다. 책망의 달리기 끝에 다시 쓰리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로 선택했다. 달리기는 그 도구이자 상징일 뿐이다. 또 달리기로 변화되는 몸도 자기애의 본질은 아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자기 선택, 자기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 그것이 자영의 달리기에 담긴 의미다.
좋은 물건을 사거나, 여행지에서 고급 호텔에 투숙하고 명품을 사들여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것을 자기애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기호나 상징 없이도, 어떤 사물 없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미래에 도래할 자신의 변화처럼, 그 선택으로 달라질 자신의 정체성을 기대하며 지금의 나를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자기 사랑의 본질이다.
삶을 바꾸는 동력은 내 안에 있다. 내 선택에 있다. 그 조건을 외부에 두고, 사물에 둬서 그로 인해서만 주체가 바뀔 수 있다는 건 주체를 사물로 전락시키는 생각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나를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다. 바꾸기로 마음먹고 달리기를 하고, 달리기를 하면서 다르게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것과 레깅스를 입고 멋지게 달리는 언니들처럼 달리기를 열심히 하면 나도 저런 언니들 같이 바뀌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하는 달리기는 그래서 다른 차원의 달리기다. 후자는 브랜드의 달리기와 차이가 없다.
이런 선택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달리기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메타포다. 엄밀히 말하면 미래를 향한 모든 선택엔 훈련이 동반된다. 자영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도,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서도 훈련을 해야 했다. 그저 현주처럼 뛰고 싶다고 해서 내일 바로 뛸 수 있게 된 건 아니다. 이런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지겨운 일상을 벗어나 작가가 되기로 선택했다고 바로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 공부하고, 읽고, 써야 한다.
우리가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나를 기대하면서도 그 미래로 향하는 선택을 미루는 건 이 선택이 고통스러운 훈련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든이 쾌락 중심의 섹스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섹스 중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버리는 훈련, 섹스 외적으로 사람과 관계 맺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평생 투견으로 살아온 개가 반려견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살기와 공격성을 버리는 법과 다른 개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브랜든도,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 채 영화는 끝난다. 패트릭은 여성을 침대에서 지배하고 타자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통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꼭 찾아야 될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다. 브랜드도 성적 욕망을 이겨낼 수 있는, 그 욕망의 본질 안에 있는 온전한 나를 찾아내는데 실패한다. 영화 말미, 지하철에서 마주친 환상의 여인이 보여주는 결혼반지를 통해 사회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주체란 욕망을 승화시킨 상징에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받지만, 브랜든은 여전히 섹스 외에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한, 섹스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미성숙하고 유아적인 존재로 남는다.
그에게 섹스는 사랑도, 종족 번식도 아닌 오직 자신의 욕망, 남성성을 외부로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하기에 일상적 섹스를 감내해야만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로의 진입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지하철에 바라보던 그 환상의 여인과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확인한 브랜든 그 여자를 유혹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타자를 보라
브랜든이 컴퓨터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만큼 바이러스에 감염될 정도로 포르노에 몰두하고, 소개팅에 만난 여인과 섹스에 다다를 수 없었던 것은 성인이 된 스스로를 정면으로 마주 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와 소통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인간은 타자와도 소통할 수 없다. 그렇다. 포르노에도, 스마트폰에도, 쾌락을 위한 섹스에도, 책망하기 위한 달리기에는 주체도 타자도 없다. 스마트 폰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타자를 마주 봐야 한다.
브랜든은, 라캉의 은유를 빌리면 어린 시절 어떤 욕망의 금기를 신화화하는데 실패했을지 모른다. 그 신화화 속에서 자신만의 성전이나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라캉과 백상현에 의하면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금기에서 좌절된 자신을 애도하는 시간, 그리고 그 애도하는 상징물로 이뤄진 기억의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은 성인이 돼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다. 헛된 사물이나 욕망에 집착해서 그것의 실현만이 자신의 욕망의 실현이고 완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정작 성인이 된 자기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한다. 그 욕망의 무조건적 집착이 유아기적이고 금기시된 무엇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 그렇기에 그것이 불법이라는 걸, 그 불법에 유치하게 집착하는 성인은 어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성향들을 약간씩 갖고 있다. 이런 성향이 없는 대신 완벽하고 완전하게, 사회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사람 중엔 오늘날의 그런 자신을 만들어준 완고한 성전에 타자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두는데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설령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해도 그 타자는 자신의 성전에 들어오는 신자이기에 자신의 성전의 율법,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러니까 자신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출입시키지 않거나, 지킬 때까지 자신의 율법을 강요하는, 소위 내면의 꼰대, 완고한 노인이 되어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브랜든은 그런 남자의 전형이었다. 그의 집과, 컴퓨터, 침대, 콜걸은 모두 그의 신전이고 시녀였다. 그가 돈으로 구매해서 자신의 욕망의 신전에 전시시켰던 것들.
자영은 책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뛰기 시작했다. 공부 외의 다른 대안들을 보기 시작했고, 공부의 경쟁을 벗어난 다른 경쟁들을 하기 시작했다. 뒤로 미뤄놨던 욕망들을 자발적으로 실천했다. 그래서 그녀의 청춘, 인생은 고개를 들고 앞으로 달리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달리면서 타인의 템포를 느끼고 속도를 느끼고, 자신의 신체의 변화를 느끼며 자신의 신체적 변화에 눈을 떴다.
이를 통해 결국 성적인 선택권뿐만 아니라 생의 주도권도 그녀 스스로 갖게 됐다. 신체적 쾌락의 장에서 기꺼이 손님이나 남자가 만들어 놓은 신전의 성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신전을 짓는다. 그 신전은 브랜든의 완고함으로 지어진 신전이 아니라 타자와 세상을 향해 열린 신전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그 구절을 실천하는 바로 그런 신전이다.
물론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애로 신전을 짓는다. 그러나 그 개방성에 있어서는 브랜든과 자영처럼 큰 차이를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일요일에만 개방되는 교회처럼 타자를 받아들이는데 완고하고, 개종을 하지 않으면 들여놓지 않겠다는 방어적인 신전을 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유럽의 대성당들처럼 “돈만 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전이냐. 내가 너희들에게 보는 것을 허락해주지.”라고 말하며 여유롭게, 어쩌면 거만하게 타자의 발 들여놓음을 허락하는 신전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마치 사찰과 명산의 경계가 모호해서 입구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유명 사찰들처럼. 내가 볼만하니 보고 싶다면 일정한 비용을 내라는 자신감이다.
이런 성당과 사찰들은 훼손을 걱정하지 않는다. 적당한 감시의 눈과 안전 대책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는 이들이 그 너른 품과 품격, 도도함과 당당함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용일 수 있고, 위엄일 수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사랑하는 주체는 그 고유의 위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위엄의 오리지널리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국,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사랑하라. 고개를 들고 똑바로 걷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선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꺼내 들어라. 다들 깜짝 놀라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 당신을 보더라도. 자신의 위엄으로 성전을 짓고 나면 그 성전의 회랑을 걸으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로 보고 싶어 하는 이가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