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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갇힌 짐승

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 12- Intimacy (2001)

by 최영훈

수요일의 여자

앞의 영화에서 주제를 이어받는다. 영국 영화 Intimacy를 아는지. 이 영화, 황당하다. 매주 수요일 낮에 한 여자가 남자의 집에 찾아온다. 대화도 거의 없이 아주 격정적으로 섹스를 한다. 그게 다다. 근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나이, 이름, 직업, 유부녀인지 유부남인지. 그러다 어느 날 남자가 이 여자 뒤를 밞으면서 그야말로 사달이 난다. 오던 여자가 안 온다. 이 무슨 SNS시대의 망발이냐 싶겠지만 이 영화는 2001년도 작품이다. 이런 상상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보듬어 주는 이의 소중함

이 영화의 구조를 뜯어보면 특이하다. 남자의 과거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플래쉬백으로 남자의 과거를 보여준다. 직장도,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도 보여준다. 섹스도 남자의 남루한 집에서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도 관객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다. 남자는 관객의 역할을 대신하여 여자의 뒤를 쫓는다. 도대체 어떤 여자 길래 이런 찌질한 남자랑 자는 건가. 본인도 보는 우리도 궁금하다.


남자의 일상 뒤에 섹스 장면이 붙는다. 그 후 플래시백으로 회상 장면을 통해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설명된다. 그 뒤에 또 정사 장면이 붙는다. 현재의 미지의 존재와의 육체적 관계가 남자의 확실한 존재와의 사회적 관계에서 얻은 상처,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 같다. 무명의 존재가 이름 있는 존재로부터 얻은 상처들을 감싸주고 치유해준다. 에로스와 사랑은 결국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이라는 거. 그게 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주제를 찾기 위해 우린 여자가 아마추어 연극배우라는 점에 주목해야 된다. 이 영화에서의 정사씬은 진정한 연극이다. 여자의 진짜 내면이 나오는 순간이다. 여자는 정사라는 야성의 순간을 위해 매주 수요일, 낯선 집에 간다. 그녀는 일상의 자신을 숨김으로써 에로스를 위한 무대를 획득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직업인 배우와 연극이라는 무대가 평범해 보인다. 뭐든지 일상이 되면 거기엔 드라마가 없고 드라마가 주는 카타르시스 또한 없다. 에로스의 시간, 야성의 순간이 있었기에 에로스와 거리가 먼 평범한 일상의 유지가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일상과 에로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다른 주제가 이 분리된 공간, 분리된 주체에 있다. 사회에 연극적인 면을 보여줘야 내 욕망, 길들여지지 않는 나를 지킬 수 있다.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연인이라고 부부라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통제하겠다는 의도다. 정직과 투명성을 혼돈하면 안 된다. 서로의 욕망을 존중하고 에로스를 하나의 퍼포먼스적 시간으로 만들지 않으면 결혼 생활과 부부 또는 연인의 일상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알랭 드 보통이 인생학교에서 지적한 부분이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

마지막 주제를 고르라면 남자의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어리석게 여자의 뒤를 캐는 남자 말이다. 영화는 결국, 남자에게 날 안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에 얼마나 감사해하고 감동해야 하는지 묻는다. 짝짓기 예능이나 포르노를 많이 본 사람은 그걸 당연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을 시작할 때 날 안아줄 신체보다 그 사람의 정보에 더 관심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신체라는 미디어와 섹스라는 메시지로 소통한 타자보다 정보를 통해 파악한 타자가 더 안심된다고 여기는지도.


타인을 알고 싶은 욕망

소개팅이 들어오면 일단 뒷조사부터 한다. 인터넷을 뒤져서 현재의 신체조건, 옷차림, 분위기, 스타일, 출신학교, 언니 오빠 다 알아낸다. 심지어 타고 넘어가서 전 남친, 전 애인, 썸 타는 누구까지 파악한다. 그 뒤 마주하면 그건 소개팅 아니라 면접이다. 필자의 대학 학창시설, 그러니까 90년대의 CC가 깨지는 이유는 일상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공유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요즘 커플들은 시작도 전에 일상을 공유한다. 시작부터 이게 뭐 하는 건지.


이성(理性)과 이해(理解)의 한자 이(理)에는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이성과 이행의 이는 무엇이 무엇을 다스리는 걸까? 내 이성이 밖의 현상과 사물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 내어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성의 반대말은 야성이다.


범주화라는 감옥

연인을 이해한다는 건 그/그녀를 내 머리로 들여와 다스리는 것이다. 일종의 길들임이다. 그 이해는 타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이해한 타자는 내가 만들어낸 타자이지 내 밖에 있는 그가 아니다. 그 타자는 나의 이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이해의 영역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타자는 그래서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다. 권택영 이 <생각의 속임수>에서 “사랑은 숭고한 짐승”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린 그 길들여지지 야성의 것을 불안해한다. 결국 타자를 이해하려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의 권력을 누가 줬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권리를 준 적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해는 이성과 문명의 영역이다. 그것은 타자와 사물, 낯선 세계와 이웃을 상식과 경험, 이성의 세계로 재단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결국 이해한다는 말은 타자를 내 생각에 끼워 맞추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다.

이해의 효율성을 위해선 범주가 필요하다. 계몽주의 시대에 백과사전에 열광했던 이유다. 타인에 대해, 연인에 대해 알고 이해하려는 것도 결국 타자의 범주화에 불과하다. 그 범주는 동물과 식물, 도서관의 책을 분류하는 그 분류 체계와 닮았고, 이 분류 체계가 학계와 업계, 심지어 전 지구인들에게 공유되어 있기에 이 분류는 가능해진다. 결국 타자와 내가 동일한 이성과 문명을 공유할 때 비로소 이해는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특정 범주에 들기 위해 애쓰며 준비한다. 사회가, 저 밖의 타자가 원하는 나를 갖춰나간다. 체계와 범주, 이성과 상식에 어울리는 나를 준비한다. 그러나 그 나를 벗어버리는 순간이 언젠간 찾아온다.

알몸을 볼 때까지

관음증이나 프로이트, 라캉의 이론을 가져오지 않아도 우린 알고 있다. 성적 만족감은 봄으로써 시작한다. 그건 성경에도 나오는 고전적 동의다. 연인들이 마주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성애는 시작된다. 그런데 주체가 만들어 놓은 상징계가 무너질까 봐, 알몸을 보는 모험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사람이 있다. 그걸 보자는 협상과 합의를 누가 먼저 말할지 계속 핑퐁 게임을 한다. 알몸을 보여줌으로써 발생할지도 모르는 그 상징계의 무너짐, 창피,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페에서 커피잔을 붙잡고 버틴다. 봉인되어 있을 땐 그나마 후퇴할 수 있으니까. 에로스와 애정 전선으로부터.


그러다 드디어 알몸을 보이면 둘 다 성적 흥분과 함께 해방감을 느낀다. 첫 경험의 경우엔 그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다. 보는 쾌락과 하는 쾌락의 경계가 말이다. 연인들이 얼굴과 더 나아가 알몸을 마주 보는 건 사실 엄청난 사건이다. 엄마가 아닌 이성이, 아빠가 아닌 이성이 내 눈을, 그리고 내 얼굴을 그렇게 오래 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까.


이 시선은 면접관이나 의사의 시선 하고는 다르다. 그런 시선 앞에선 우린 사회적 존재이자 임상적 존재다. 연인 앞에선 그 한 꺼풀 안쪽을 보여준다. 에로스적 관계로 접어들면서 보여주는 알몸은 그 안쪽의 에로스적인 알몸이다. 그건 목욕탕에서 보여주는 몸하고는 다른 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누워있어도 엄마 아빠가 감탄하고 예뻐하던 아기 시절의 몸도 아니다.

알몸은 알몸이 아니다.

이렇게 알몸을 보여줘도 다 보인 건 아니다. 감춰진 것이 남아 있다. 몇 해 전 독서모임에서 한 20대 여자 후배가 이런 얘길 했다. 자기 남자 친구에게 그 남자도, 자신도 못 해본 남다른 섹스를 해보기 위해 친구 커플의 예를 빌어 자기의 욕망을 넌지시 비쳐봤다고 한다. 친구 커플이 코스튬을 하고, 페티시를 실현해서 새로운 경지에 가봤다더라 하고 말을 꺼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질색을 하더라고 했다. 남자는 늘 한결같은, 자연스러운 그녀가 좋다고 했다고 했다.


알랭 드 보통은 부부들이 섹스리스에 빠지는 건 일상과 환상의 간극이 너무 멀어서라고 지적한다. 침대에서 새로 살 냉장고 색깔을 함께 고민하다가 갑자기 "날 거칠게 대해줘."라는 대사 따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대사를 하면서 과격한 섹스를 했다가 섹스가 끝나고 나면 다시 냉장고 색깔에 대해 얘기하다 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상과 환상의 자유로운 전환이 어렵고 낯설기에 우린 가족인 아내나 남편과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녀와 야수의 교훈

<미녀와 야수>가 새롭게 해석되는 지점이다. 평범한 아가씨는 성에 사는 야수를 만난다. 야수는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마법이 깨지고 젠틀한 왕자로 깨어난다. 우린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게 문제일지 모른다. 문명화된 남자는 사랑에 빠질 때까지 최대한 젠틀하게 배려하고, 문명화된 여자도 최대한 누가 봐도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기 위해 메이크업과 의상으로 포장하고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때로는 그 이후로 한참 있다가 민낯과 알몸을 보인 채 본성을 드러낸다.

우린 결국 문명화된, 포장된 자신과 야수로서의 자신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한다. 그런 분열은 우리를 불안에 빠트린다. 야수가 된 이후엔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섹스를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선 그 간극의 건널 수 없는 폭을, 사랑과 섹스의 간극을, 일상과 에로티시즘의 간극을, 일상 속의 나와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간극을, 그 두 극의 거리가 그렇게 멀다는 것을 오히려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그녀에게 사회적 시선 앞의 "나"가 아닌 민낯의 "나"여도 된다고 허락해야, 아니 더 나아가 격려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 후배에게 내가 한마디 했다.

"00 씨. 우린 집 밖에 나서면 더 이상 자연스러운 그 누구도 될 수 없어. 나도 오늘 여기 나오려고 머리 감고, 냄새 안 나는 티 골라 입고 속옷 갈아입고 나왔어. 집에선 딸이 눈치 줘도 트렁크 하나 입고 있어. 남친이 보고 있는 00 씨는 자연인 00 씨가 아니야. 두 사람은 서로의 야수를 아직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거야"


야수의 시간과 장소

우린 이 야수를 보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클럽을 가서 원나잇을 한다. 내일의 나, 일상의 나를 볼 일이 없는 그/그녀와 섹스를 할 때만 야수가 풀려나기 때문이다. 늘 만나던 연인, 아내, 남편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그 야수가. 아침에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낮에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하고 저녁을 하고 같이 뉴스를 보는 사람에게 절대 보여 줄 수 없었던 그 모습.


이 모습을, 우린 일탈의 시간과 공간에서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만 보여준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고 섹스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부조리함을 깨는 답을 <미녀와 야수>가 갖고 있다. 먼저 야수를 보여준 뒤 젠틀한 일상을 함께하는 게 오히려 정상 아닐까? 미녀와 야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그게 아닐까?


아내나 연인한테 드러내지 못한 욕망의 해소를 위해 수많은 한국 남자들이 골프백 메고 필리핀, 태국과 같은 동남아를 떠돈다. 이러느니 애초에 그 깊은 심연에 있는 본능을 연인에게 먼저 보여주고 연애를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우린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해야만 한다. 내일을 약속하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를 만들어서 그/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야수를 드러내어 야수에게 숨 쉴 공간과 시간을 주면서 일상에선 평범한 아내, 남편, 여친, 남친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킬 앤 하이드>, <헐크>처럼. 위험하다. 위태롭다.


짐승을 봤던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내면의 야수를 모른다. 지금의 나를 정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굳이 꺼내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물론 나중에 그걸 보게 되면 말 그대로 속칭 늦바람이 난다. 돌이킬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젊을 때 만나는 게 좋다고 본다. 물론 내 안에 짐승을 본 사람이라도 그 기억을 간직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아주 뻔뻔하게 얌전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제법 침대에서 보낸 시간과 엉켰던 사람이 많지만 짐승의 순간을 만들어준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침대에서 이성이 툭 끊긴 뒤 나를 잊고 온전히 내가 안고 있는 연인에게 몰입한 순간이었다. 어느 날 불쑥, 그녀가 내게 “개새끼”라는 욕을 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리 와 내 개새끼.”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그때 내 이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느낌이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도 잃어버린 순간. 으르렁 거리며, 개처럼 그녀를 물어뜯었다. 그 뒤로도 그녀는 날 풀어놨다. 침대 위에서 자길 물어뜯게 놔뒀다. 흉터도 없고 피도 없었다. 오직 땀과 숨소리, 쾌감에 눌려 간신히 성대를 빠져나온 탄성과 비명만 있었다. 그 시간과 공간은 기억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가 없다.


그 개는 술이 불러낸 것도, 분노와 폭력이 불러낸 것도 아니다. 내 모든 걸, 내 과거와 오늘과 불투명한 미래와 내 자신감과 그 뒤에 웅크린 상처까지 모두 사랑하는, 그 바닥까지 온통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던 사랑이 불러낸 것이었다.


그 이후... 제법 겉보기엔 무난하게 살면서 얌전히 나이를 먹었다. 내면의 짐승을 교수라는 지위를 얻자마자 연약한 학생들에게 풀어놓아서 수많은 상처와 피해자를 유발했던 사건들이 캠퍼스를 뒤집어 놓을 때도 별 잡음 없이 강사 짓을 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이 절반이 넘는 강의실에서도 불편함 없이 강의했다. 요즘도 그렇게 잘 살고 있다. 여자 후배들과도 편하게 지내고 시장이나 구청장을 만나도 딱히 주눅 들거나 긴장하지도 않는다. 모든 고객에게 공손히 대할 수 있고 대중강연을 해도 뻔뻔하게 잘한다. 짐승은 우리에 가눠놓고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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