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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상처가 사람을 만든다.

영화의 위로 : 못 보낸 원고 11-여교수의 은밀한 매력(2006)

by 최영훈

발목을 잡는 과거

과거가 발목을 잡은 적이 있다. 어떤 과거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중 하나다.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재혼도, 형제의 죽음도, 바다의 풍랑도 내가 어찌할 수 없다. 그 과거들은 벼락같은 천재지변이고 깜빡이 안 키고 들어 온 자동차이기에 내 탓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거들은 오늘의 나를 흔든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천 년대 초반까지의 여러 사건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빨간 마후라> 사건이다. 감독은 어느 날 이 사건의 주인공들은 지금 뭐하고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이 사건이 97년이었고 영화는 2006년에 나왔다. 십 년은 이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의 인생이 바뀌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그만큼 이 사건은 큰 사건이었다.


뭐, 다들 검색해 볼 테고 얼마 전 <차이나는 클라쓰>에서도 다뤘다고 하니 사건에 대해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십 대 청소년들이 8m 비디오로 성교 장면을 찍었고 그것이 유출된 사건이 이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과 용산을 중심으로 불법 VHS 복제물이 유통되던 때라 지금처럼 급속하게 영상이 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전국으로 퍼졌다. 그 뒤로 유사한 사건이 연예계에도 있었고 그런 사건들은 인생, 특히 여성의 인생을 유린했다. 설령 유린되고 망가지지 않더라도 그 과거를 숨겨야 했다. 이 영화는 숨겨야만 했던 과거의 이야기이자 그 과거에서 벗어나 살아내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찌질한 남자들

80년대 한 동네에서 잘 나가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중에 여학생은 한 명. 리더이자 석규의 형인 석호의 여자 친구 은숙이다. 석호는 석규와 그의 친구 용두에게 둘이 싸워서 이긴 사람에게 은숙하고 한번 자게 해주겠다고 한다. 두 소년은 물 빠진 수영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무승부로 결론이 난다. 그 뒤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고 이들은 흩어진다. 20여 년 후, 이들은 다시 심천대학을 중심으로 엮이게 된다. 은숙은 염색학과 교수로, 석규는 만화과 강사이자 환경 만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한쪽 다리를 살짝 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와 기운으로 인해 심천 대학과 그 지역의 최고 셀러브리티였던 은숙과 그 은숙을 추종하던 남자들은 찌질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비루하고 찌질하다. 평범한 남자들이 한 여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중엔 유부남도 있고 얼빠진 교수들도 있다. 그들은 여자가 가진 신체적 결함조차 섹시하게 본다. 아니 오히려 그 결함 때문에, 그 비대칭성 때문에 그녀의 고유성이 확보된다. 그냥 예쁜 것이 아니다. 그냥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남다르게 하는 무엇 때문에 남자들은 끌린다.


외모와 결함에 대해

외모가 성적인 매력의 전부는 아니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것만큼 우리가 이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이유 또한 제 각각이다.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했을까 싶은 사람도 그럭저럭 애 낳고 사는 거 보면 신기하다. 거기엔 답이 없다. 왜 사랑하는지 묻는 말에 마땅한 답이 없는 건 당연하다. 저 사람이 왜 좋고, 뭐가 좋은지 묻는 물음에도 답을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냥 그 사람이어서 좋은 것이고 끌리는 것이다. 이 설명될 수 없는 케미스트리가 없었으면 인구는 진즉에 멸종됐을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다름에 끌리는 본능이 수많은 질병을 이겨내고 인류를 살아남게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함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고 우리의 매력을 만든다. 고유의 버릇이나 습관이 체형을 만들고 특징을 만든다. 애가사 크리스티가 에큘 포와로를, 코난 도일이 셜록 홈스를 묘사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뭔가를 가진 사람은 다르게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성격, 목소리, 외모, 걸음걸이.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이다.


사람에겐 다리를 절뚝이게 하는 과거가 있다. 흉터가 있고 상처가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것이 살아온 과거든 생김새든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것은 흠이 있고 그 흠이 차이를 만든다. <마네킨>이라는 영화와는 달리 우리가 마네킹에게 끌리지 않는 건, 언제나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영화 <Her>의 목소리와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 한건 어쩌면 그 신체와 목소리가 완벽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흠이 없는 존재는 신의 것이었다. 구약에 나오듯이 흠 없고 정결한 짐승만이 번제물로 바쳐졌다. 병들고 약하고 상처 있는 것은 사람의 것으로 남았다. 인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완벽한 짐승이 필요했다는 건, 역설적으로 말하면 살아있는 것 중에 완벽한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의 탐문

그 타자의 다름을 만끽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 다름의 이유를 캐물을 때 사랑은 위기에 봉착한다. 이 영화에서처럼 과거를 캐묻기 시작하면 사고가 난다. 그저 SNS나 뒤적거리는 건 봐줄 수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탐문 수사를 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탐문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기억을 묻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소문의 진상을 쫓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왜곡되어 저장되고 소문은 부풀려진다. 부풀려진 소문은 편견을 만들고 편견은 오해와 배제와 격리를 부른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다.


소문과 편견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 혼자서 날 키우시는 바람에 편모 가정의 아들이라는 편견이 꾸준히 따라다녔다. 지금이야 이혼도 흔하고 편모, 편부 가정, 조부모 가정도 흔하고 숨길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이혼이 무슨 엄청난 인생의 실패라도 되는 양 집 안팎으로 쉬쉬하던 때였다. 십 대 후반 어머니와 둘이 평택의 한 촌동네로 이사했을 때는, 같은 이유로 그 촌의 교회 아이들과 어울리기까지 꽤 애를 먹었다. 심지어 그 교회에 십여 년 다닌 후에 목사 딸과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 목사의 부인이 어찌나 말렸던지, 지금 생각해도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대학원 시절엔 선배들이 어떻게 내가 검정고시 출신인걸 알았는지 내 과거를 궁금해했다. 결국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다 왕년에 내가 잘 나갔던 양아치 었을 거라 결론 내리고 날 조심스럽게 대했었다.


대학 강사 시절엔 더 재미난 경험을 했다.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쓰는 사람에게 대학 강단에 서는 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학생이 들이는 돈과 수고에 대해 예의를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등록금이 만만치 않고 그렇게 비싸게 다니는데 수강신청 때마다 머리를 싸매야 한다. 수강신청을 하는 날이면 원하는 강의를 선점하기 위해 인터넷 빠른 PC방까지 가서 여러 대의 컴퓨터를 동시에 돌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내 강의를 신청한 학생의 수고와 비용에 걸맞은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나름의 생각이었다. 자연히 옷차림에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새삼 슈트를 사기 뭐해서 회색과 네이비의 블레이져를 사고 안에는 좋아하는 터틀넥을 입기로 했다. 넥타이를 안 매면서도 단정해 보이는 옷차림이라 여겼다. 다행히 대학의 학기는 여름을 피하니 그럭저럭 버틸만한 옷차림이었다. 매번 그렇게 입고 부산과 대전의 대학을 다니며 강의를 하던 어느 날, 나랑 친해진 한 학생이 같이 점심을 먹다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왜 터틀넥만 입으세요?”,

“뭐, 셔츠 단추 끼는 것도 귀찮고, 적당히 단정해 보이고, 환절기 목 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가볍게 대답하니 그 친구가 작은 한숨을 쉬며 아이들의 추측을 들려줬다. 봄 학기, 가을 학기 할 것 없이 터틀넥만 입으니 목에 문신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추측은 안 그래도 창의적인 젊은 친구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펴서, ‘목의 옆이나 뒤로 올라온 문신이라면 아마 용 문신일 것이다.’라는 구체성을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사이자 장차 업계 선배가 될 사람, 게다가 외모 또한 만만치 않게 생긴 남자에게 대뜸 문신을 보여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못한 채 추측만 차곡차곡 쌓여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알고 싶은 과거

한자 편견(偏見)과 영어 Prejudice는 귀납과 경험의 안일함을 경고한다. Prejudice는 경험과 귀납에 의거한 판단이다. Prejudice는 Pre+judice인데, Pre는 말 그대로 앞서서라는 뜻이고, 뒤에 Judice는 판단한다는 뜻이다. 즉 Judgement와 그 뜻이 같다. 어원이 된 라틴어 프라이유디키움(Praejudicium)도 선례, 전례, 판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 현재 마주한 상황이나 사실, 사건, 인물에 대한 평가 및 인식을 과거 유사한 사례의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자 편견(偏見)을 뜯어보니 거기에 담긴 의미도 그러하다. 앞의 치우칠 편자는 사람 인(人)에 작을 편(扁)자가 합쳐진 것이다. 작을 편에서 주목해야 할 건 부를 이루는 지게 호(戶)자인데 문이 반쯤 열린 모양새다. 그러니 편견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사람이 문을 반쯤 열고 내다보는 데서 발생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절반의 틈으로 내다보며 문 밖의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편견의 발단이라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도어체인을 건 채 그 틈으로 문 밖의 사람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결국 편견은, 그 틈으로 보이는 형체의 일부와 그로인한 필연적인 정보의 결여 속에서 타자를 평가해야 하는 막막함을 문 안쪽에 발생시키고, 문을 다 열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고 해를 입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려 줄 수 있을 텐데 보이는 일부만으로 그것을 설득해야 하는 답답함을 문 밖에 발생시킨다. 조금 밖에 열지 않아 타자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건지, 문 밖의 타자에 대해 다 알지 못하여 발생한 공포와 불안으로 그 문을 반밖에 열지 못하는 건지, 그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뜯어 본 두 단어는 낯선 타자를 내 안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관용을 넘어 우의(友誼)가 필요함을 가르쳐 준다. 한병철은 우의를 “그러함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타자를 관용처럼 “그저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여의 태도로 타자의 그러함과 관계 맺는 것”이다. 그래서 우의는 “그와 나 자신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강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그 관계 맺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마음의 문을 다 열지 못하고 경험이라는 셔터를 반쯤 내린 채 사람을 대하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알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캐묻진 않았다. 몇 사람의 마음과 몸을 거쳐 온 사람이건 지금 날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금의 나로 연인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내가 부족해서 다른 사랑의 필요를 느끼는 건 문제가 되지만 내가 있어 어느 누구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의 정보를 알려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려는 욕망, 그 이상이다. 현재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까지 알아 타자의 인생 모두를 관통하는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 정보를 통해 그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들여다봄을 통해 그를 내 것으로 만들고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마치 부동산의 과거 이력이 속속들이 기재되어 있는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는 사람과 같은 심리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그 산의 기운과 풍경을 만끽하지만 산을 사려는 사람은 그 산의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 이 둘의 차이를 향유와 점유의 차이라 부를 수 있다.


향유와 점유의 차이

향유(享有)는 누리어 가짐이다. 영어로는 enjoyment다. 점유(占有)는 같은 있을 유자를 쓰지만 앞에 점은 점령하다는 뜻이다. 점치다 할 때의 그 점의 뜻도 있다. 재미있는 건 향이라는 한자에는 제사를 지내다, 라는 뜻도 있다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에서 향유는 단순한 쾌락이 아니다. 죽음을 각오한 향락, 쾌락, 흥분의 추구다.


단순한 쾌락에서의 타자는 주체의 흥분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성, 상징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내가 존재할 수 있다. 이 쾌락엔 사회적 용인의 맥락이 있다. 아무리 즐거운 걸 추구해도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은 사회가 정한 선을 넘지를 않는다. 반면 향유는 자신의 소멸을 불사한다. 당연히 타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랑을, 연인을 향유의 대상으로 볼지, 점유의 대상으로 볼지 그건 평소 삶의 태도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점은 내 운명을 점쟁이한테 물어보는 것이다. 점쟁이는 타인의 운명을 손아귀에 주고 그의 미래를 볼 능력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타자보다 강한 존재가 된다. 둘 사이에 수평적 관계는 없다. 반면 제사는 주고받음이 있다. 산 사람에 의한 죽은 사람을 위한 상차림이다. 그것은 예의이고 기억함이다. 조상이 찾아와 축복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제사를 차리는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차린만큼 조상도 뭔가를 베푸는 것이다.


차림의 실체와 주체는 전적으로 차리는 자의 몫이다. 나누는 것도 산자의 몫이다. 의무이기도 하지만 축제이기도 하다. 반면 점은 축제도, 잔치도 아니다. 점의 확실성과 상관없이 점의 공간 안에 들어가면 예언과 대가의 관계가 형성된다. 소비자는 그 점쟁이의 시간과 예지력을 점유하고 점쟁이는 소비자의 시간과 자본을 점유한다. 철저히 교환 관계다.


향유해야 될 사람과 사랑

사랑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고 삶 속에서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 향유가 되어야 한다. 소유를 넘어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야말로 불살라져야 한다. 반면 점유를 위한 사랑을 하면 타자를 사물화 시키고 소비하는 것이어서 점거 농성처럼 점거의 날들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내가 너를 이렇게 오랫동안 점거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상호 간, 그리고 사회에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고 할 때의 골키퍼의 은유는 사랑을 점유와 점거의 맥락에서 볼 때 맞는 말이다. 골키퍼는 공격을 막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골대를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지킨다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랑을 유지한다는 말과 함께. 우린 사랑을 유지하고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에로스는 스쳐 지나가는 열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유의 맥락에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에로스를 이데아로 가는 방법이라고 했다. 물론 거기선 더 고차원적인 맥락에서의 에로스였지만.


‘에로스(Eros)’는 ‘포로스(Polos)’라는 ‘풍요와 만족의 신’과 ‘페니아(Pennin)라는 궁핍과 빈곤, 결핍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플라톤의 향연에 이 대목이 나온다. 누가 누구를 꼬셨을까? 페니아가 포로스를, 흔한 말로 덮쳤다. 페니아는 아프로디테, 그러니까 미의 여신인 비너스의 생일파티에 구걸하러 왔다. 그때 그 파티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포로스를 발견하고 덮쳤다. 그때 에로스를 가졌다. 그 에로스를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시종으로 둔다. 그래서 비너스, 또는 아프로디테를 그린 그림엔 에로스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작은 하프를 들고 있는 오동통한 아이가 바로 에로스다. 에로스를 이데아를 향한 열정이나 열망이 아니라 그야말로 에로스로 받아들이면 에로스는 우리에게 풍요와 만족을 줄까? 궁핍, 빈곤, 결핍을 줄까?


사랑에 흔들리며 사람이 된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매번 즐거울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진지하고 싸우고 고민하고 심각한 순간도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도 풍요와 결핍의 양 극단을 오간다. 연애하는 동안 우린 완성과 파멸을 경험하고, 가을의 풍성함과 사막의 황량함을 겪는다. 그런데 종종 우린 연애가 끝난 뒤에 황폐해지고 망가지고 울고 술 마시고 하소연한다. 그런데 진짜 연애를 했다면 우린 이미 연애 중에 망가져야 한다.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운 마음과 다시 오지 않을 가뭄을 동시에 겪어야 한다. <감각의 제국>과 <베티 블루 37.2> 같은 영화에 그런 진폭이 잘 나온다.


사랑의 민낯

망가진 다는 게 뭘까? 인간은 사회가 만든 소위 상징계에 살고 있다. 쉽게 말해 사회생활을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우린 안 그래도 희미한 주체인데 그 주체마저 상실한 채 살아간다. 철저하게 사회적 무장, 변장, 가장을 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 스스로도 망각한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안타깝게 말한다.


“참으로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의 얼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는 없으리라. 그대 현대인들이여! 누가 그대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온몸에 과거의 기호들이 가득 적혀 있으며, 또 이 기호들 위로 새로운 기호들이 덧칠해져 있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모든 기호 해독자로부터 자신을 잘도 숨겨 놓았다!”


사랑은 결국 민낯을 볼 때 시험대에 오른다. 얼굴이든 내면이든 말이다. 애초에 사랑을 시작할 때 가면을 쓰고 시작하지 않으면 이런 위기를 겪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연인들은 이 민낯을 보기 위해 SNS 등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소개팅하고 연애를 한다. 하지만 정작 SNS엔 민낯이 없다. 니체의 말처럼 과거의 기호들만 있을 뿐이다. 한병철 씨가 말한 투명사회를 살고 있지만 정작 우린 타인의 민낯, 욕망의 저 바닥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가 연인의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막심 샤탕의 <악의 심연>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엔 인간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파는 시장이 나온다. 입구는 지상에 있지만 그 시장까지 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내려가야 한다. 그 시장엔 그야말로 정상적인 시장에선 절대 구할 수 없는 "상품"이 있다. 다크 웹 같은 곳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욕망의 침전물이 있다. 에로스는 그 침전물을 휘저어서 내 안에 갇혀 있던 <그것 thing>이 풀어준다. 심해에 살고 있는 괴물을 깨우는 것처럼. 우린 에로스가 내 심연의 욕망을 흔들어 깨울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침대에서 거짓 연극을 한다.


지금, 내 앞의 사람

영화 속 한 남자 교수는 아무 관계도 아닌 석교와 은숙의 관계를 질투한다. 그 질투는 두 사람의 과거를 캐게 한다. 현재의 사랑이 과거의 유령에 발목 잡힌다. 우리 또한 종종 그런 실수를 한다. 과거의 것으로 오늘을 산다. 그 경험과 귀납의 세계는 상식의 세계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 반복되지 않으면 우린 의외로 불편하다. 버스 시간도, 기차 시간도 반복되지 않으면 세계는 무너진다. 우리가 정보에 집착하는 이유다.


사람을 정보로 다루는 건 마케팅 회사나 유통회사, 정치 광고 회사, 금융회사 밖에 없다. 소비자의 행동과 삶은 데이터로 바뀌어 해석되고 그 해석은 메시지 전략을 만들어 다시 소비자에게 보내진다. 몇 명이란 잤다고 떠벌리는 사람도, 몇 명이랑 연애해 봤다는 사람도 같은 부류다. 그러나 연애를 많이 한 사람은 많은 연인에게 그만큼 반품됐다는 의미다. 살 때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막상 써보니 디자인과 기능, 품질이 기대 이하였다는 의미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과거를 따지는 건 오늘, 그 사람에 비해 부족해 보이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을 흠집 내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마주하면 된다. 결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흉터와 상처가 있으면 있는 대로 사랑하면 된다. 이 사람이 아니면 날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을 기다리면 된다. 나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 받아주면 된다. 전력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의 사람을 으스러지게 안아주면 된다.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면 된다. 오늘 본 이 사람을 어쩌면 내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이 순간 연인에게 몰입하면 된다. 이것뿐이다. 우리가 연인을 만날 때 해야 될 건, 사랑에 빠질 때 해야 될 건, 사랑을 만날 때 해야 될 건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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