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혼자 영화를 본다. 대부분의 영화는 그렇게 봤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영화관을 다녔고,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같이 본 영화가 드물다. 드물어서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어 대학교 다닐 때 기숙사 친구 몇 명과 본 유일한 영화는 <제5원소>였다. 첫사랑에게 고백하기 위해 함께 보자고 한 영화는 <레옹>이었고 그날 내가 뭘 입었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토시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다. 대학 4학년 때 사귀었던 여자 하고는 <약속>이란 영화를 같이 봤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온 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내 곁에 찰싹 붙어 대전 시내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아내랑 처음 본 영화는 <친구>였다. 광안리 근처에 있는 부산 MBC홀이었다. 당시에는 영화관도 겸했었다. 그 뒤, 그러니까 부산에 정착해서 카피라이터 일을 하고 이 나이 먹도록 다른 사람과 본 영화는 몇 편 안 되고, 그나마도 아내나 딸과 함께 본 영화가 전부다. 딱 한 편을 제외하고.
원래 무슨 영화 보는 모임, 책 읽는 모임 같은 걸 꺼려한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책과 영화는 모두의 취향을 고려한 맹숭맹숭한 것들이어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한 영화 모임에서 봤다. 그 영화의 이야기 길라잡이로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라면 그런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초대에 응했는데 하나는 그 영화 모임이 열리는 공간의 주인장에게 내 후배가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자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Incendies라는 말의 의미
<그을린 사랑>의 원제는 <'Incendies>다. 영어로는 <Scorched>. 직역하면 큰 불, 그을린, 동란(動亂), 전란(戰亂)이라는 뜻이 있다. 뜻의 추적을 여기서 멈추고 이 영화를 봐도 무방하다.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의 뜻을 불교 용어에서 찾으면 영화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불교 용어로 이 단어는 업화(業火)라는 뜻이 있다. 업화란 중생이 과거에 지은 악업으로 받은 과보(果報)의 몸을 가책하는 지옥의 맹화(猛火)를 뜻한다.
여기서 과보란 우리가 인과응보(因果應報)로 아는 단어의 축약으로 그 뜻은 당연하게도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업화란 쉽게 말해 자기가 지은 업으로 인해 지옥에서 벌로 받는 불을 말한다. 그래서 이 업화의 뜻엔 범부의 악업의 힘이 맹렬함을 불에 비유할 때도 쓰인다. 평범한 사람이 지은 악한 업의 양과 그 업이 불러올 뒷날의 벌과 화의 맹렬함을 동시에 표현할 때도 쓰이는 것이다.
주체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려면 한 번 본 사람보다는 영화를 더 잘 이해해야 하는 건 기본 예의니까. 집에서 혼자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는 한국의 번역 제목처럼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영화는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고, 더 나아가 한 개인의 현존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난 이번 달 칼럼 소재로 영화 <향수>를 선택해 써서 보낼 예정으로, 현재 초안을 썼다. 영화와 소설 <향수>는 오늘을 사는 주체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현재적 구성 요건은 무엇이고, 존재의 위상과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한 사회적 주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고, 향수로 메워져야 될 공백은 무엇인지 묻는 영화다.
또, 결국엔 이렇게 채워진 나는 “나”인가 사회적 존재인가 묻는 이야기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는 "나"와 사회적 나를 넘어서 그 내면에 감춰진 진짜 나, 욕망까지 향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인공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린 그 감춰진 욕망의 무제한적 노출을 목격할 수 있다.
반면 <그을린 사랑>은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지, 아니 심지어 오늘의 나를 변하게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되는지 그 윤리에 대해서도 묻는 영화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다른 영화, 예를 들면 <블레이드 러너>나 <시카리오>, <컨택트>도 넓게 보면 유사한 질문을 하고 있다. 또 할리우드의 타임 루프나 타임 슬립 영화에 담긴 은유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졌던 의문도 이 물음들과 맥을 같이 한다. 과거는 우리를 구성하는가,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업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기억은 우리를 구성하고 현재의 삶을 결정짓는 요인인가, 잘 못 된 과거를 고칠 수 있다면 오늘의 우리도 달라지는 가였다.
이 영화가 던진 또 다른 의문은 자식들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가라는 유언에 대한 살아 있는 주체의 반응에 관한 것이었다. 자식들은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고, 그 기원의 명확한 토대 없이도 이민자의 나라 캐나다에서 잘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이 유언을 받아 실행함으로써 기원과 마주하기로 한다. 사진이라는 흔적과 흩어진 기록을 지팡이 삼아 더듬대며 상처의 굴곡과 모퉁이를 돌고 돌아 기원의 고통스러운 윤곽을 확인한다. 그리고 결국엔 그 비극적인 기원과 마주한다. 이 여정과 비극의 드러남을 보면서 유언을 남긴 엄마와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합의 안 된, 강요된 고통스러운 유언의 실행은 정당한가? 알 권리와 모를 권리는 같은 가치가 아니었던가?
한 장의 사진, 그 잔인함
영화 속 한 장의 사진은 잔인하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묻어 놨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몰라도 별 탈 없이 살았던 남매의 삶을 뒤흔들 어머니의 기억과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노스탤지어와 잔인함의 이유는 근본적으로 같다. 지나간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순간을 담고 지나간 순간을 멈춰 기억으로 저장한다. 사진은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조차 박제시킨다. 순간을 강제로 담아 기억을 강요한다. 남매가 들고 추적했던 교도소에서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진이 향수(鄕愁), 즉 노스탤지어에서 잔인함으로 전환될 때는 어느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가 잊고자 하는 기억을, 잊혔으면 하는 기억을 사진 한 장으로 추적할 때이다. 더 나아가 사진 한 장을 빌미 삼아 오늘의 삶을 뒤흔들려할 때이다. 앞서 말했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담긴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어머니의 유언은 과거로부터 온 편지다. 영화에선 이 편지와 사진 한 장으로 과거를 추적한다. 이 추적의 의미는 뭘까? 역사를 살아낸 주체의 현재적, 주도적 자기완성의 불가능함을 말하는걸까? 그렇다면 우리가 <박하사탕>에서 만났던 그 은유와 닮았다. 안온한 일상을 사는 주체에게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그 은유 말이다.
업화, 내 과거가 나에게 쏜 화살
업화는 결국 과거의 나로부터 쏘아져 오늘의 나에게 날아온 화살이다. 미투와 빚투, 학폭 사건, 정관계 인사들의 아빠 찬스, 땅 투기, 위장전입 같은 것들, 이 모두가 그렇게 과거로부터 날아온 화살이다. 이 화살의 범람을 보면서 또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니다. 십 대 이후부터 서른몇 살까지, 과거는 직접적으로 내게 날아왔다. 지금도 여리게,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스쳐간다. 과거는 그런 것이다. 영화 속 유서에 담긴 내용도 그런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묘비명을 새길 자격이 없다.”, “유년기의 기억은 목구멍에 박힌 칼 같아서 잊히지 않는다.”
과거는 이렇게 가혹한 것인가. 과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편하게 죽을 권리도 없는 걸까? 묘비명을 새기기 위해서 우린 죽기 전에 모든 약속을 완수하고, 완수가 불가능한 약속들에 대해선 사죄받아야 하는가? 묘비명을 새길 자격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죽은 자에겐 산 자에게 채무가 없고, 산 자 또한 죽은 자의 기억을 따라갈 의무도 권리도 없다. 예수의 말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과 일은 다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업화는 내가 죽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 양과 강도, 모두 말이다.
주체는 미래에서 온다.
<그을린 사랑>과 알렉스 프로야스의 <다크 시티>는 기억과 과거가 주체 형성의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 기억으로 형성된 주체를 말한다. 더 나아가 과거의 기억과 주입 된 다른 기억이 오늘의 주체를 덮치면 주체 또한 새로워지고 달라진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알게 되면, 누군가 내게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면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까?
기억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묻혀지는 것이다. 새삼스레 주입되지 않아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의 창고를 자신도 모르게 운영하고 있다. 그 기억들은 <그것>, <지퍼스 크리퍼스>처럼 때가 되면 나타나거나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이런 공포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것들과 투쟁했듯이 과거가, 과거의 기억이 오늘의 나를 흔들지 않도록 우린 투쟁할 권리가 있다. 더 나아가 미래의 나를 규정하지 못하도록 투쟁할 권리도 있다. 드니 빌뇌브 같은 이들이 만든 세련된 영화들이 말하지 못한 이 투쟁의 가능성이 공포 영화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비현실적인 공포, 현실감 없는 존재를 다루는 것이 공포 영화니까 말이다.
역사의 토대 속에 오늘의 주체가 성립한다. “누구에게나 역사는 필요하고, 이를 통한 정체성의 고정 역시 필요하다.”는 백상현의 말은 이를 설명한다. 백상현은 이 설명 뒤에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라깡 학파의 정신분석이 규정하는 정체성은 언제나 도래하는 시간 속에 있으며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누구도 타자(부모)에 의해 새겨진 과거의 흔적을 숙명으로 짊어져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이 담긴 책은 <라깡의 루브르>다. 과거만 담긴 박물관, 그 박물관에 걸린 과거의 그림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얘기하면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우리의 과거는 기억의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담겨 있는 유산이 오늘의 재산이 될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기억을 돌아보고 꺼내볼 필요는 있다. 미래를 향해 아무리 나아가도 그 박물관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물관에 내 미래를 발목 잡히지 말자. 과거의 흔적을 숙명으로 짊어져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