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이 살짝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는 사람이 될 때, 그러니까 아내가 출근하고, 딸도 학교에 보낸 뒤 내가 외출을 해야 할 때, 작업실에 나가야 할 때, 그때마다 반복하는 일들이 있다. 가스레인지 스위치가 정확히 가운데 있는지, 가스 중간밸브를 잠갔는지 확인한다. 욕실에 물은 잠갔는지도 확인한다. 커피머신은 껐는지 확인하고, 보일러도 외출로 해 놨는지 확인한다. 나가기 전에 적게는 두세 번, 많으면 서너 번 확인한다.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확인하기도 한다. 빌라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2층, 우리 집으로 올라가서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올 때도 있다.
그렇게 집을 나와 걷다가 돌아본다. 당연히 집은 거기 있다. 내가 보나 안보나 거기 있다. 며칠 오지 않아도 집은 거기 있다. 그러나 종종 불이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다가 중간쯤 가서 내가 나오면서 모든 걸 확인했는지 걱정할 때가 있다. 그래도 꾹 참고 간다.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예전에 집에 불난 적 있나?”하고 묻곤 한다. 당연히 그런 적이 없다. 홍수가 나서 침수된 적도 없고, 태풍에 지붕이 날아간 적도 없다. 그나마 겪은 천재지변이라고는 평택 살 때인데, 집 앞의 길이 물에 잠겼던 정도다. 게다가 이때 집은 이층에 살았으니 딱히 공포를 느끼지도 않았다. 평택 사는 내내, 그 도시 이름답게 많은 눈도, 많은 비도, 많은 바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사건사고를 겪은 적도 없고. 뭐 굳이 있다면 젊은 시절 시비에 휘말려서 이빨 몇 개 부러진 거 말고는 이렇다 할 사건사고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게 내 인생 최악의 사고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그런데, 왜? 왜 이런 강박이 생겼을까? 최근에서야 어쩌면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의정부에 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 너무 많이 이사를 다녀서 그런 건 아닐까? 집세를 못 내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할 때마다 허름한 리어카에 살림살이를 싣고 다시 셋방을 구해서 이사를 가야 했던 기억 때문일까? 그때마다 “이 집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까?”부터 먼저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보다 더 어린 시절, 기억에는 없지만, 혹시 잠깐 밖에서 놀고 왔더니 엄마가 사라져 없어졌던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당연히 있었어야 될 누군가가, 뭔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험을 한 것이 뇌리에 박혀 있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다.
한 집에서 오래 살며
그렇게 추측을 하다 보니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 덕에 지금 사는 집에서 근 십몇 년을 살고 있다. 안 좋을 일도 있었고, 죽고 싶었을 만큼 마음이 괴로웠던 적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일도 많았다.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는 것도 봤다. 딸이 태어났고 무럭무럭 자라서 열 살이 됐다.
가구를 많이 바꿨고, 안방과 은채 방의 인테리어도 새로 했지만 여전히 내가 서식하는 서재는 그대로고, 창밖으로 보이는 앞집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근처의 집 하나는 허물어서 터무니없이 높은 원룸 아파트가 됐지만 나머지 집들은 묘하게도 그대로 있다. 심지어 은채 어린이집 동기이자 학교 친구인 정화네 집은 있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그대로 집을 지어 아직도 그 자리에 산다. 우리 빌라도 몇 집이 이사 가고, 이사 왔지만 대체로 오래 사는 편이고, 몇 분의 어르신은 은채가 크는 걸 드문드문 지켜보셨다. 종종 은채가 인사하면 “하이고, 많이 컸다.”하고 놀라시면서.
그렇게 흔들리지 않은 십몇 년의 거주였다. 물론 삶에 기복이 있었고, 그에 따라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그래도 밤마다 머리를 누이는 곳은 “집”이었다. 돌아갈 곳, 머물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족 여행을 제외하곤, 내 개인적으론 단 한 번도 외박을 한 적이 없다. 이 집에서 산 후 단 한 번도 나 혼자 밖에서 잔 적이 없다는 말이다.
뭐, 특별히 아내와 사이가 좋아서 바람을 안 피웠다거나 정절을 정말 중요시 여겨서 늘 한 여자만 바라봤다, 뭐 이런 말이 아니라, 그냥 잠은 꼭 집에서 자야 했고, 자고 싶었다. 아내가 십몇 년 전에 아주 심사숙고해서 비싸게 산 두툼한 라텍스 매트에서 잠을 자야만 했고, 자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밖에서 아무리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도-물론 그런 경우는 지난 십몇 년 간 다 합쳐도 서너 번 밖에 안 되지만 - 꼭 집에 돌아와서 혼자 조용한 거실에 앉아 맥주 한잔을 하고 잤다. 그렇게 안방에 들어가서 아내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은채가 태어난 후에는 은채의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고, 아기 냄새와 숨소리를 듣고 잠이 들었다. 이 평온한 가정을 만들어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물론 말은 안 했지만.
이 집, 이 가정에서 딸을 키웠다.
딸은 키우기 쉬웠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쌌다. 앞서도 말했듯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진 그거 세 개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라고 말해줬다. 그러니 공부 스트레스는 받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크는 동안, 안아달라고 할 때 안아줬다.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가르쳐줬다.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줬다. 살이 찐 거 같으면 운동을 시켰고, 엄마는 한약에 성장침도 맞게 해 줬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많이 놀아주셨고 많은 걸 가르쳐주셨다. 같은 부산에 살면서도 감전동에 있는 외갓집에 갈 때마다 집에선 경험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 주셨다. 삼촌은 게임을 가르쳤고 고기의 맛을 가르치면서 은채가 크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은채는 지금도 키우기 쉬운 아이다.
자라고 하면 자고 일어날 때가 되면 일어난다. 공부할 때 되면 공부하고 쉬어야 할 때면 쉰다. 원하는 콘텐츠가 있으면 알아서 찾아가고 안 봤으면 하는 건 적당히 말하면 알아듣는다. 책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한다. 혼자도 잘 놀지만 친구와도 잘 어울리고 수업시간에 집중한다.
그렇다. 솔직히 무슨 복인지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놓고 봤을 땐 완벽한 아이다. 지금도 방에서 옷을 골라 와서 뉴스 보는 아빠 옆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아이다. 아빠에게 안기는 걸 좋아하고 나도 안는 걸 좋아한다.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한참 충전하고 휴식을 얻는다. 이제는 손 힘도 늘어서 어깨를 주무르면 제법 시원하다.
슈퍼 베이비라는 말은 어쩌면 이런 뜻일지도.
모든 아이는 부모에게 슈퍼 베이비다.
이렇게 편 수가 많아질지 몰랐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자주 가지 못했던 2학년 시절부터 3학년까지의 일상과 생각을 옮겼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팀이 바쁘게 돌아간다. 단체장이 바뀌면 일의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급한 일 몇 개를 쳐내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써 놨던 원고를 연재하려 한다.
젊은 시절, 그리고 다른 청춘들이 애지중지 하던 사물과 공간에 대한 엉뚱한 생각들을 제법 길고 이상하게 써 놓은 글들이다. 함께 다시 읽으면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