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전진 대회에 모인 회원들의 마음을 흔들어 달라는 주문에 충실했던 홍보 영상 이야기를 했었다.
말이 나온 김에 감정을 흔드는 카피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려 한다.
카피로 말하는 법
몇 개 더 있지만, 대표적인 라디오 광고 타입으론 다음의 네 개를 들 수 있다. 스트레이트/고지형, 대화형, 드라마형, 캠페인형. 첫 번째 것은 말 그대로 상품의 정보 전달에 주력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은 상품의 정보를 두 사람 이상의 대화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좋은 성우와 대조되는 캐릭터, 드라마가 섞인 대화라면 감정이나 이미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드라마형은 상품을 사용한 소비자의 이야기를 카피화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라면 광고라면 맛이 어떻고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얘기하기보다는 그 라면 한 그릇에 담긴 개인 사정, 사연 등을 담는 것이다. 이 경우, 당연한 말이지만, 타깃 소비자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그 효과가 크다. 마지막 것은 상품이나 브랜드에 맞는 사회적 이슈나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등산복 브랜드라면 가을 안전 산행이나 산불 예방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기업, 브랜드, 상품의 사회적 위상과 이미지를 향상 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특히 요즘 같이 착한 소비가 일종의 소비 트렌드로 정착하는 시점에선 효과적인 광고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다양한 소구 방법이 있다. 쉽게 말해 말하는 방법이다. 위협 소구와 유머 소구, 성적 소구 등이 있다. 하나를 말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경우의 수가 많다. 이 모든 형태에 자신 있다고 말하는 카피라이터가 있을까?
고객과 AE의 특별 주문
가벼운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이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고객과 AE의 특이한 주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의 몇십 주년 기념식 영상의 경우엔 대체로 가슴이 뭉클하거나 보는 사람이 울컥하게 해달라고 한다. 그런 기념식의 목적은 직원들의 일체감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 직원들의 가족들도 참석하는 경우엔 상호 간의 연대감을 다지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조선소의 창사 30주년 기념식 영상의 피날레 멘트를 보자
당신의 손을 잡고 싶습니다. 가족을 위해, 0000 조선을 위해 늘 부지런히 움직이며 쉬지 않았던 당신의 거친 손. 그 마디마디, 굵어진 당신의 손을 꼭 붙잡고,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0000 조선 30년의 성공, 당신과 함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당신의 무수한 땀방울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세계는 당신과 당신의 0000 조선을 최고라고 합니다. 모두가 당신 덕분입니다. 당신은 오늘의 갈채를 받아 마땅합니다. 감사합니다.
뭉클하지 않나?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가족들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한 패스트푸드 회사의 컨벤션 영상엔 가족들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후기를 들었다.
사랑하는 내 아가. 직장 생활 많이 힘들지? 요즘은 처음 네가 근무를 시작했던 때와는 달리 많이 성숙해진 것을 이 엄마는 느낀단다. 특히 월급 타고는 엄마 아빠, 동생 선물을 사들고 오는 것을 보면, 힘들게 번 돈으로 낭비한다고 뭐라 하기도 했지만... 엄마한테는 그런 네가 얼마나 큰 자랑거리인지 모른단다.
어깨에 힘을 빼야 나오는 경쾌함
문제는 유머다. 그러니까 가볍고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만들어달라면 숨이 막힌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밝게 해주는 건, 더 나아가 웃게 만드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각적 이미지 없이 목소리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라디오 광고의 경우엔 더 어렵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뻔뻔해져야 한다. 유치해져야 한다. 누가 봐도 유치하고, 누가 봐도 이상하지만 그게 가장 효과적인 것 같으면 모른 척하고, 시치미 뚝 떼고 써야 한다. 어차피 서너 개의 시안을 보내는 거, 그중 하나는 미친 척하고, 대충 쓴다는 기분으로, 그렇게 가볍게 써야 한다.
짧고 유치한 카피
파일을 보니 이직 직전, 2004년의 4월이다. 당시엔 웨딩 업체들이 막 전문화되던 시기였다. 물론 그전에도 이런 업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예식장을 끼고 하는 일종의 계열사 느낌이 강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부터 소위 웨딩 플래너라는 개념이 들어와 정착되기 시작했고 2천 년 대 들어서 기업화, 전문화됐다. 부산을 포함한 인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폴더를 보면 부산, 대구, 마산 지역의 웨딩 업체 광고 카피가 있다. 대구 지사에서 의뢰한 건 <웨딩 박사 닷컴>, 마산 지사에서 의뢰한 건 <시집가는 날>, 부산의 오중식 AE가 의뢰한 건 <E&C 웨딩>, 후배 곽유진 AE가 들고 온 건 <혼례청>이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웨딩 대행업체 광고는 결혼 준비하는 이들의 드라마를 통해 감동과 분위기를 전달하거나 타깃인 젊은 층의 귀에 쏙 들어가도록 가볍고 경쾌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난 이때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였고 결혼엔 그야말로 1도 관심 없는 “남자”였기에 카피를 밀고 나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혼례청>의 경우엔 밝고 경쾌하게 해 달라는 특별 주문이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 그렇다. 어깨에 힘을 빼고 먹물 기운 쭈욱 빼고 작정하고 유치해져야 한다. 몇 개의 카피를 건네면서 슬쩍 이 카피를 넣었다.
남자) 날씨가 궁금하면?
여자) 기상청.
남자) 멋진 결혼을 하고 싶을 땐?
여자) 혼례청!!
여자) 아름다운 신부.
감동 있는 결혼식
드레스에서 예식장까지.
혼례청은 믿음이 가요
남자) 문의 부산 807-2025
여자) 날 잡으면 전화하세요.
여직원들의 선택
정확히 90자다. 일반적으로 20초 라디오 카피의 적정 글자 수는 100자 내외다. 많으면 120자까지 읽을 수 있고, 적어도 100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카피의 글자 수는 아주 적은 편이다. 전화번호와 광고가 다 끝난 것 같은데 한마디 덧붙여 여운과 재미를 주는 트레일러 카피-날 잡으면 전화하세요.-가 자리한 후반부 두 줄을 빼면 70자 밖에 안 된다. 담당 AE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가볍게 쓴 것이니 일단 가져가 보라고 했다.
나중에 AE한테 이 시안이 됐다고 전해 들었다. 사장은 다른 시안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미창석유와는 달리 이 사장은 젊은 부하 직원, 특히 여직원들을 모아놓고 투표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여직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카피가 바로 이 시안이었던 것이다.
경쟁이 한창 치열해지던 시장에서 광고주의 이름이 소비자들에게 각인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또 트레일러 카피를 사용해 웨딩업체를 찾는, 결혼 준비를 하는 젊은 여성 고객과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랐다. 이 광고는 직원들의 응원과 소비자들의 반응 덕분에 제법 오래 라디오를 탔다.
나이 들 수록 어깨에 힘을 빼려 한다.
요즘엔 광고 의뢰가 들어오면 직관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상품과 소비자의 욕구가 바로 연결되는 뭔가를 찾아 직접적이면서 쉽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가 쓰는 다른 글, 예를 들어 칼럼이나 브런치와 같은 플랫폼에 올리는 글, SNS에 올리는 글과는 달리, 그리고 내가 읽는 불친절한 인문/사회과학 책에 담긴 글과는 달리 그야말로 한눈에 들어오고 해석 없이 소화되는 그런 카피를 쓰려고 애쓰고 있다. 이를 위해 나이를 먹을수록 가벼워지려고 한다. 광고와 카피를 위해선 나이의 무게를 벗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