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도 당황할 때가 있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09

by 최영훈

카피라이터는 사실 대부분의 상품이 처음이다. 자기가 아는 상품에 대해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안을 안고 사는 삶이다. 대행사 시절, 내일은 또 AE가 뭘 가져 오려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출근했었다. 요즘도 작업실에서 감독과 같이 있을 때, 또는 감독의 랭글러로 이동 중일 때 감독의 휴대폰이 울리면 살짝 긴장한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

앞서 얘기했듯이 이 업을 하면서 특이한 장소도 많이 가봤고 황당한 제품도 많이 겪었으며 특별한 사람도 많이 만났다. 연차가 쌓이면 어지간한 건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나이를 먹는 동안 세상도 변한다. 어제까지 없던 상품과 서비스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생긴다. 내가 편하게 자는 동안 세상의 에너지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온 세계가 주목하는 첨단 연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몇 년 전부턴 울산과학기술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커피 찌꺼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벤처 기업, 해수의 삼투압 작용으로 전기를 만드는 -원리는 묻지 마라. 다 까먹었다. - 학교 기업에도 가 봤다. 뉴스에 나오다시피 세계가 구매하려는 원전기술의 핵심 인력을 키우는 연구실에서 교수님들도 만났었다. 적게는 수 천만 원, 많으면 수억 원짜리 장비를 직접 봤고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에 한 두 개 밖에 없다는 장비도 봤다. 이 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자국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나라의 고급 인력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다양한 국가의 젊은이들도 봤다. 이 직업이 아니었다면, 평생 못했을 경험이었고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었다. 참고로 유니스트(UNIST·울산과학기술원)는 2022년, 한국의 교육 기관 중 세계 상위 1% 연구자(HCR)를 가장 많이 배출한 기관이다.


물론 이렇게 거창한 곳만 드나들었던 건 아니다. 카피 목록을 보면 피트니스 센터, 찜질방, 호텔, 대학, 상가, 아파트 등 다양한 곳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특히 2천 년대 들어서는 병원들의 경쟁도 심화돼서 병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최근 몇 년 동안엔 시청, 구청, 경제자유구역청과 같은 공공기관 문턱을 자주 넘었다. 기억을 더듬고 파일 목록을 살펴보면 지역의 주요 기관 중 군부대를 제외하곤, 어지간한 곳엔 다 들어가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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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직장, 새로운 상품

2004년 여름에 이직을 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월쯤이 아닐까 싶다. 첫 출근을 하던 날 장마가 시작되어서 폭우 속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출근했던 기억이 있다. 이직한 회사는 제작사였다. 앞서 대행사, 기획사, 제작사의 차이를 설명했으니 넘어간다.

이 회사는 지역 기업의 사내방송 프로그램 제작이 주력인 회사였다. 그러나 그 외의 일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 “그 외의 일들”의 적임자로 날 선택한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돈보다도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 더 컸기에 그걸 오케이 해줬다는 이유 때문에 이직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햇수로 3년, 만으로 2년 정도 다닌 것 같다. 제법 많은 일들을 쳐냈는데 생각보다 파일이 많지는 않다. 회사에서 중간에 컴퓨터도 바꾸고 하드도 밀면서 많은 파일들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나마 있는 파일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이게 팔린다고?

앞선 글에서 얘기했듯이 팔리지 않는 상품일 것 같아도 어떻게 하든 팔릴 수 있다고 믿고 최대한 노력해서 카피를 쓰는 것이 카피라이터의 숙명이다. 내가 한 일 중, 그 대표적인 예가 의자였다. 파일이 없어서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가 브랜드 네이밍은 물론이고 인포머셜의 대사까지 다 써 준 상품이어서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사장이 특허 출원 설명서를 건네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 사장님이 자세 교정 의자로 특허를 받고 상품화시키기 직전이다. 인포머셜로 상품을 판매하려고 하니 최 과장-당시 직급이 과장이었다. 원래 이 바닥은 직급 인플레이션이 좀 심하다.- 이 자료를 좀 보고 미팅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심지어 잠시 후엔 그 의자가 사무실로 배달되어 왔다.


지금이야 자세 교정 의자나 관련 상품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런 제품이 흔치 않았다. 잘해야 등받이가 두 개로 나눠진 제품이 몇 개 있었을 뿐이다. 그 제품은 딱 그렇게 생긴 의자에 아주 특이한 부속품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게 특허 출원의 포인트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팔걸이 하단에 기다란 바가 달려 있었다. 앉는 이의 허벅지 양쪽을 그 바를 좁혀 오므리게 하면 하체가 고정된다. 그러니까 인위적인 차렷 자세가 되는 것이다. 그 바가 마치 목공 작업대의 물건을 고정시키기 위해 설치된 바이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상상이 가나? 실제로 그런 제품이었다. 앉아서 작동시켰다. 물론 바는 수동이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좁혔다가 다시 같은 소리를 내며 피면 됐다. 몇 번이고 반복했다. 흠... 이게 팔릴까?


문제는 이걸 인포머셜로 판다는 것. 광고업에는 기사와 광고, 홈쇼핑과 광고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재가 있다. 전자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하는데 우리말로는 기사형 광고, 전문 용어로는 애드버토리얼이라고 한다. 거 왜, 일간지를 넘기다 보면 “분양 호재, 여기를 주목하라.”, 뭐 이런 헤드라인 밑에 전면이나 반면 가량의 분량으로 장황하게 써 놓은 부동산 기획 기사 같은 거를 떠올리면 된다. 아니면 건강 정보라고 열심히 읽었는데 알고 보면 특정 제품 광고인 경우나.


후자의 경우엔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나오는 1분 이상의 광고를 떠올리면 된다. 이만기 씨나 남진 씨가 나와서 열심히 파는 영양제 광고 같은 걸 떠올리면 된다. 영화 채널에서 멀쩡한 영화를 1부와 2부로 나눈 뒤, 그 사이에 길게 나오는 광고도 같은 종류다.


난 이때 처음 알았다. 그 긴 인포머셜 멘트가 애드리브가 아니라 철저한 대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게다가 거기에 나오는 모든 자막 또한 한 명의 카피라이터가 다 쓴 다는 것을. 심지어 홈쇼핑에 나오는 호스트의 멘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자막과 영상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있다는 것을.


자, 여하간, 내가 해야만 했다. 이거 어쩐지 안 팔릴 것 같은데, 자세 교정 효과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가격이 비싼데, 게다가 내가 지어준 이름조차 구린데... 이런 수많은 불안 속에서도 일을 끝내야 했다. 어찌어찌 시나리오가 완성됐고 심의가 통과된 후, 지금도 이런 종류의 광고에 종종 등장하는 재야의 베테랑 호스트를 기용하여 제작을 했다. 난 실제로 딱 한 번 방송되는 걸 봤다. 좀 팔렸을까?


이건 어떻게 먹는 거지?

좀 다른 맥락에서의 낯선 상품도 있었다. 이건 파일이 있다. 2006년, 봄이다. 분량이나 톤으로 보니 1분에서 2분 정도 되는 인포머셜로 보인다. 방송 중간에 나오는 굴비나 고등어 광고와 비슷한 분량, 비슷한 성격의 광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느 날 사장이 초록색 해초가 담긴 팩을 내밀었다. 처음엔 파래인 줄 알았다. 물어보니 매생이란다. 지금이야 매생이가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부산엔 매생이를 주재료로 하는 음식이나 식당이 흔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전남 해안 지역에서 많이 먹었던 식재료였다. 지금 우리가 아는 매생이국이나 매생이굴죽 같은 형태로 말이다.


설령 그런 식당이 있었다고 해도 이제 경우 부산 살이 2, 3년 차에 접어드는 카피라이터가 찾아 먹었을 리 있을까? 그야말로 낯선 식재료였다. 사무실까지 찾아온 관계자의 말을 듣고 넘겨준 자료를 들여다본 뒤에도 그 판매 포인트를 잡기까지 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길을 가다 매생이 전문 식당을 보면 이때 생각이 난다.


선택받는 직업

<원 나잇 스탠드>의 주인공 맥스는 광고기획자다. 출장 갔다가 회사에 돌아오니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피클 광고. 맥스는 담당 AE에게 아르마니 같은 걸 가져오라고 화를 낸다. 이건 아마추어의 투정이다. 우린 광고주를 선택할 수 없다. 광고주가 우리 회사와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회사는 그 선택에 감사하며 어떤 일이든 받는다. 먹고사는 일은 그렇게 물불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요즘 우리 팀은 가끔 일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시간이 안 되거나, 더 솔직하게 말하면 체력이 안 돼서 거절하는 것이다. 고객이 시간의 여유를 더 주거나 일을 미뤄주면 할 수도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또, 우리와 거래했던 고객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우리가 하려고 한다. 특히 감독의 성향 자체가 의리파여서 - 울산 장생포 토박이로 울산에서 한 두 다리 건너면 거의 다 형님이거나 동생, 또는 그 형님과 동생의 친구이거나 가족이어서 자의 반 타의 반 의리파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긴 하다. - 어려울 때 일을 준 고객의 의뢰라면 예산이 부족하고 시간이 촉박해도 되도록 해주려 한다. 물론 이성적인 내가 그 일을 안 하는 게 좋겠다거나 다른 팀이나 후배에게 넘기자고 할 때도 있지만...


여하간 우린 거의 대부분의 직업처럼 선택받는 직업이다. 선택받는 직업 대부분이 그러하듯, 우리도 긴장의 끈을 완전히 풀지 않고 산다. 스트레스 없는 삶은 누구에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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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선택의 후회에 대해 써 보려 한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으로써 누군가의 좋은 선택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