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안과 B안 사이에 있는 기쁨과 슬픔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19

by 최영훈

복수의 시안 앞에서

복수의 시안을 제시하는 건 이 업의 숙명이다. 물론, 내부 회의를 거쳐 어떤 방향이나 느낌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정해지면 카피도 그렇게 간다. 그러나 우리의 바른 방향과 좋은 시안이 고객의 바람과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이 불안이 여러 개의 시안을 쓰게 한다.


물론 경쟁 PT라면, 또 TV CF라면 말이 달라진다. 콘티를 만들기 위해 삽화 비용이 든다. 심지어 영상으로 만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니 여러 개의 시안을 만들 수는 없다. 그야말로 하나의 시안에 집중해서 다듬고 고치고를 반복한다.


TV CF나 스팟, 공공 캠페인의 경우에도 여러 개의 카피를 쓰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제작 기간이 너무 짧아서 자료 화면으로만 만들어야 할 경우엔 그 조합의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두세 개의 카피를 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영상물의 경우엔 영상의 컷 구성과 카피라이팅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개의 시안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다양한 라디오 카피 시안들

라디오 카피는 그나마 좀 쉽다. 그 형식이 정형화되어 있고, 들어갈 정보도 구체적인 데다가 글자의 수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 영상 표현까지 신경 쓸 필요 없이 음악과 성우의 톤만 상상하여 쓰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나름의 고충도 있다. 앞서 다른 글에도 썼듯이 성우 한 명이 정보를 알리는 형태의 카피를 쓰는 건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대화형이나 그 대화에 감정이 담긴 드라마 형태를 쓰기 위해선 두 사람의 상반된 목소리는 물론이고 캐릭터까지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중형 세단 광고라고 해보자.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80년대 중형 세단인 스텔라 광고에서 봤듯이 그 성능과 기능을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두는 광고는 그야말로 정보제공/고지형/스트레이트 형이다. 이 자동차 광고에 드라마를 담으려면 자동차를 사는 사람, 운전하는 사람, 동승하는 사람의 사연을 담아야 한다.

잘 나가던 시절의 일본 자동차 광고처럼 사회에 나간다면 이제 00 자동차, 과장의 품격엔 000 자동차, 부장이 짊어진 책임만큼 중후하게 000... 뭐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일본 광고를 80년대와 90년대 국산 자동차 광고들이 답습했다.


홍보 영상의 경우

최근 홍보 영상 러닝 타임이 많이 줄었다. 필자가 이 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15분이 넘어가는 홍보 영상도 흔했다. 요새 우리 팀이 추천하는 시간은 3분 안쪽이다. 시간이 짧다 보니 종종 전체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인트로 콘티나 시놉시스를 복수안으로 제시할 때도 있다.


홍보 영상으로 복수안으로 제시할 때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표현 전략을 담은 시안과 고객, 특히 보수적인 공무원이나 공공 기관 담당자, 기업 담당자가 받아들일만한 시안을 준비한다.


두 개의 콘티를 제시하다.

이런 식으로, 홍보 영상에도 복수의 표현 전략을 제시하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다. 이 해의 파일을 보니 인근의 시의회 콘티가 있다. 러닝타임은 40초, 캠페인성 광고다. 그 해 가을에 일이 진행됐는데, 파일을 보니 9월 초에 두 개의 카피를 감독에게 전달했다. 두 개의 콘티 제목은 각각 <감성편>과 <홍보영상 스타일>이다. 내심 미는 시안이 A안이기에 <감성편>이 A안이다.

A안의 내용은 시민이 주인공이다. “000시의 근로자입니다.”하는 형태로 농부, 학부모가 차례로 등장한다. 이어서 “당신의 이웃이자 고향 친구이며 동료입니다.”하고 멘트를 한 후, “당신이 웃을 때 행복했고, 당신이 힘들 때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000 사람입니다. 우리는 000을 위해 일하는 000 시의원입니다. 000시의회”로 끝나는 시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의원도, 시민도 잊고 있는 사실이기에 스팟에 담고 싶었다. 원래 광고는 당연한 것을 특별한 것처럼 말하거나, 특별한 것을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까.


다른 시안, B안은 뻔한 카피였다. 시의회가 시민을 위해 열심히 뛰겠다. 시의 발전과 시민의 안녕을 위해 이러쿵저러쿵... 그렇다. 진부한 카피였다. 시안 결정은 한 달 뒤, 10월 초에 났다. 당연히 B안이 됐다. 거기에 맞춰 세세한 콘티 작업이 이뤄졌다.


선택과 외면의 갈림길에서

이 일을 제법 오래 했지만, 광고주가 뻔한 카피나 시안을 고르면 여전히 힘이 빠진다. 감독이 이번 프로젝트에 해보고 싶다며 보여준 영상 속의 표현 전략과 기술들은 뒤로 미뤄진다. 감독의 보여준 레퍼런스 영상의 리듬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쓴 카피와 구성한 콘티 또한 컴퓨터에 잠든다. 언젠가, 유사한 형태의 고객의 일이 들어오면 부활할지도 모르지만, 기약할 수는 없다.

아주 가끔, 우리의 야심이 고객의 취향과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사실 그때가, 이런 경우가 일이 훨씬 많다. 앞선 글에 썼듯이 새로운 표현을 위한 장비를 사야 할 때도 있고, 적절한 효과를 위해 CG비용을 많이 들이는 경우도 있다. 다른 베테랑들을 불러 모으거나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엔 촬영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감독과 함께 로케이션 헌팅도 다녀야 하고 스태프들의 스케줄도 조정해야 하며 야외 촬영의 경우엔 몇 주간의 일기예보도 챙겨야 한다.


고객이 우리를 믿어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더 귀찮은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새로운 시도와 모험에 고객이 선뜻 동참해주면 없던 힘도 난다. 한 십 년쯤은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단편 영화를 찍는 대학생의 설렘도 잠시 스쳐간다.


감독이나 나나 고객이 우리의 실력을 믿고 색다른 카피와 콘티를 골라준 걸 알기에, 그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애를 쓴다. 이런 이유로, 매번 일을 할 때마다 꼰대도 됐다가 신인도 됐다가 한다. 흥에 겨워 신명 나게 일을 했다가 밥벌이를 위해 묵묵히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고객의 장단에 맞춰 살다 보니 세월이 갔다. 그렇게 보낸 올 해도 얼마 안 남았다.


생일 즈음과 연말이면 우울증이 도진다. 많이 마시고 많이 후회하지만 생일 즈음의 우울증은 가을이 오면 낫고, 연말에 찾아오는 우울증은 새 날이 오면 낫는다. 새해, 첫 일의 발주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씻은 듯이 낫는다. 그렇게 롤러코스터 타듯, 높은 산의 정상과 깊은 계곡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보낸 세월이었다. 내년이면 2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