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과 기초, 그다음에 응용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16

by 최영훈

그래도 끝까지 버티는 책들

해가 바뀌면 책을 버린다. 많게는 100권, 적게는 50권가량. 분야로는 가장 먼저 버린 책은 개신교 관련 종교 서적과 자기 계발서 따위를 가장 먼저 버렸다. 그다음으론 트렌드에 민감한 마케팅 분야의 책을 버렸다. 광고 관련 책들도 제법 많이 버렸다.


그렇게 집에서 쫓겨나가는 난리 통 속에서도 버티는 책들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샀는데 아직 못 읽은 책들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이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다. 하루키, 레베르테, 코엘료, 폴 오스터, 스티븐 킹, 백상현, 권택영 등으로 그 명단은 늘면 늘었지 줄진 않는다.


또 하나 버리지 않는 책들은 내 업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들이다. 특히 광고와 마케팅 관련 고전, 학부나 석사 수준의 교재로 쓰일 법한 책들은 버리지 않았다. 물론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이 졸업한 후에는 <맨큐의 경제학>을 좀처럼 다시 펴보지 않듯이 나 또한 이런 <수학의 정석> 같은 표준이 되는 책은 잘 펴보지 않지만 혹시나 해서 놔둔다. 실제로 이런 책들은 쓸모가 있다. 2019년 겨울, 카피라이팅에 관심 있는 청춘 세 명과 몇 달에 걸쳐 세미나를 진행했을 때도 이런 책들이 유용하게 쓰였다.


대기업 메니페스토

2010년, 한 유통기업의 경영 철학을 담은, 일종의 매니페스토 서적을 대필한 적이 있다. 책의 목적은 간단했다. 오너의 경영 철학을 전 직원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고객이 제공한 자료는 크게 두 가지였다. 오너의 육성이 담긴 세미나 파일, 다른 하나는 육성을 옮겨 놓은 문서였다.

놀란 점 세 가지

난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놀랐다. 하나는 이 정도 기업의 이 정도 오너가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경영 상황을 챙기나 하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오너는 실적 차트와 부분별 차트를 번갈아 보며 멘트를 하고 있었다. 문서엔 여름의 실적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그저 실적이 저조하다고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니었다. 부진한 부서를 지목하며 면박을 주지도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 뒤지고 있는데 그 뒤지고 있는 부분을 마진이 적은 부분의 판매고로 만회하려다 보니 전체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 지적 뒤엔 대안 몇 가지까지 제시했다.


두 번째 놀란 것은 고객에 대한 접근이었다. 지금이야 상식적인 얘기지만 대형 유통기업으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접근이었다. Consumer와 Customer의 차이에 대한 통찰과 해석도 남달랐다. 고객을 이해하기 위해 그 스스로 트위터를 비롯한 다양한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신선했다. 또 그 차이를 추상적으로만 알던 매입과 머천다이징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 놀랐던 것은 그 기업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업을 예로 들면서 디자인과 브랜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점이었다. 그 오너는 특히 당시 기존 신용카드 디자인과 서비스 구성을 혁신하며 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현대 카드와 스타벅스를 주요 사례로 들었다. 여기서 다 얘기할 순 없지만 그의 말을 읽고 현대카드 광고와 그 서비스 내용을 살펴본 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현대 카드는 자신들이 금융 회사, 카드 회사라는 생각 자체를 버렸었다. 카드 자체를 라이프 스타일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뭔가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트렌드의 맥을 짚다.

그러나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따로 있다. 그의 논지는 내가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하고 나서 마케팅과 관련 트렌드의 맥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에 담긴 내용과 저자들의 생각과 유사했다는 점이다. 그중 몇 가지만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디퍼런트>의 문영미 , <미래를 경영하라>의 톰 피터스, <러브마크 이펙트>와 <러브마크 브랜드의 미래>의 케빈 로버츠, <제3의 공간>의 크리스티안 미쿤다. <체험 마케팅>의 번트 슈미트, <보랏빛 소가 온다.>, <빅 무>, <마케터는 새빨간 거짓말쟁이>의 세스 고딘 등이다.


탄탄한 기초를 엿보다.

그리고 내가 관심 갖게 본 것 중 하나는 그 논지의 바탕에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그 입지가 탄탄해서 현재도 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고전 마케팅 이론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켈로그 경영대학원 교수진이 쓴 <마케팅 바이블>이나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의 <포지셔닝>, 코넬리스 크뤼버 등이 쓴 <전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과 그 책에 담긴 이론들이 그런 예다.


후배들에게 안타까운 점

감독이 요즘 영상 하는 후배들에게 안타까워하는 점 중 하나가 기본 부족이다. 구도, 컷의 리듬, 앵글, 패닝과 틸팅의 사용법, 부감과 앙각이 갖고 있는 상징적 효과, 영상 내러티브의 완급 등이 그런 기본들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숏폼이 많아지고 자막도, 멘트도 없는 자극적인 영상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영상을 배우고 업에 뛰어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며 대학에서 그런 것들을 가르칠만한 여유가 없어진 것인지 그 원인에 대해선 모른다. 다만 일이든, 삶이든 결국 멀리 가려면 기초 체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후배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3라운드와 5라운드의 차이

UFC를 보는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기는 3라운드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열리는 메인이벤트 경기나 타이틀전은 5라운드다. 산술적으론 한 라운드에 5분, 3라운드면 15분이고, 5라운드면 25분이다. 고작 십 분, 큰 차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종종 5라운드를 뛰어보지 않은 도전자는 4라운드나 5라운드에 접어들어 수차례 타이틀을 방어한 노련한 챔피언에게 말리곤 한다. 5라운드 게임 플랜을 갖고 있는 것과 그 플랜으로 수 없이 많은 경기를 치른 것 하고는 다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카피라이터 5년 차까지, 마라톤을 했었다. 하프 코스 대회를 수도 없이 나갔다. 그때, 하프 코스를 한 시간 반 안쪽으로 뛰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풀 코스 욕심이 났다. 어느 해였나, 풀코스에 도전했다. 산술적으론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이라는 서브 쓰리(세 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는 힘들더라도 세 시간 삼십 분 대에는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천만의 말씀. 네 시간이 넘게 걸려 간신히 들어왔다. 같은 달리기여도 저 세계와 이 세계는 다른 세계였다.


후배들, 특히 20대 중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사이의 후배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그들에 대해 건너 들으면 그들은 연습도 없이, 하프 코스의 경험도 없이 풀코스를 꿈꾸는 사람 같다. 3라운드의 경험도 없이 5라운드의 메인이벤트와 챔피언에게 도전할 수 있는 타이틀 샷을 원하는 풋내기 격투가 같다. 수학의 정석도 모르면서 양자 물리학을 멋지게 설명하고 싶어 하고 기초 공사 없이 고층 빌딩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 같다.


미술을 전공한 친구들은 알 것이다. 학원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소묘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지. 통기타를 배워본 친구들도 알 것이다. 손가락이 그 쇠줄의 장력을 버틸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지를.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현란한 세일즈 프로모션을 주말마다 던져대는 잘 나가는 유통 대기업의 오너도, 그 밑의 똑똑한 직원들도 탄탄한 기본을 중요시 여긴다. 그 기본을 발판 삼아 트렌드의 흐름을 간파하고 읽어낸다. 때로는 더 멀리 도약하여 트렌드를 앞서 가기도 한다. 어떤 업이든 오래 하고 멀리 가고 싶은 이라면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