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만에 전문가가 될 순 없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32

by 최영훈

샅바를 놓치지 않고 씨름을

작업실에 출근해서 종일 기획서, 카피와 씨름했다. 사실 지난해 말, 예술단의 카피를 감독에게 처음 넘겨줄 때부터 좀 길지 않나 싶었다. 타이트하리라 예상했다. 컷편집을 끝내면 카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까 싶었다.


저번 주, 오케이 컷을 붙인 걸 처음 봤을 때, 카피를 좀 줄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요즘, 전지현이 나온 가나 초콜릿 광고에 쓰인 영상 테크닉인 스텝프린팅 기법을 사용하여 예술단원들의 연습장면을 몇 컷 넣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컷까지 들어가 봐야 카피의 리듬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주, 중견 해양조선엔지니어링 기업의 PR 기획서 초안을 갖고 갔다. 잠시 회의를 한 뒤 감독은 예술단 광고에 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기존 카피를 두 개의 시안으로 만들자는 것. 그 말을 듣고 카피를 다시 들여다보니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카피, 즉 멘트를 줄이고 음악과 영상이 더 많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였다. 영상 하나에 어울리는 카피 두 개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점심 먹고 바로 해드릴게요.”하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또 그렇게 되지도 않고. 오후에 컷 편집을 더 세련되게 다듬은 감독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말했다. 오프닝의 콘트라베이스 장면을 흑백으로 시작한다는 것. 아니 왜 그걸 이제 얘기해. 결국 오후 내내 나올 듯 말 듯 한 카피와 실랑이를 벌였다.


추구하는, 그러나 다다를 수 없는 완벽

퇴근 한두 시간 전, 감독과 다시 컷편집본을 봤다. 그 순간, 카피 한 줄이 머릿속에서 스쳐갔다. 붙잡아야 했다. 초조하고 조바심이 났다. 감독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감독의 말이 끝난 후 다시 책상에 앉아 그 한 줄을 썼다. 내가 기존의 카피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그리고 예술단 직원과의 회의에서 나온 말들의 조각들이 품고 있던 그림이, 내가 예술회관 백스테이지를 서성이며 생각했던 컨셉이, 촬영 현장에서 무대에서 애쓰는 단원들의 퍼포먼스를 보는 내내 마음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았다.


만족이 없는 직업이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물론 종종 “뭐, 이쯤 했으면 됐어요.”하고 말한 적이 있지만 언제나 돌아서면 미련이 남았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쪽 전문가들은 완벽을 추구하지만 그 완벽에 다다를 수 없어 다음번엔 그 완벽에 좀 더 다가가길 희망하며 오늘도 카피와 영상 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다.


전문가의 의미: expert, specialist, professional

사전에서 전문가를 검색하면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설명한다. 영어로는 expert, specialist, professional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


영어의 세 단어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반대말을 보면 그 차이가 도드라진다. 각각 inexpert, generalist, amateur다. Expert는 기량의 숙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한 직종이나 기술에 숙련된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반대말은 당연히 미숙하거나 기량이 미달인 사람이다.


Specialist는 특정 범주의 기술에 특화된 사람, 특정 범주가 속한 더 큰 범주 내의 사람들 중에서 그 특정 범주의 기능과 재주를 독보적으로 갖고 있어 다른 이들이 모두 그 특별함을 인정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의 경우, 이 Specialist는 의대-전공분야-분야 내에서의 세부 전공으로 좁혀 들어가면서 그 가치를 만들고 확보한다.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들 중에서 유별나게 특정 부분의 수술을 잘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Specialist인 것이다. 반면 의사여도 어느 한 분야에 특출 난 재주가 없는 의사, 어느 부서에 갖다 놔도 일을 잘하지만 어느 직무에 특화됐다고 말하기 곤란한 사람은 Generalist다.


운전면허를 따서 승용차를 모는 사람들이 Generalist라면, 택시 운전사, 버스 기사, 화물차 기사, 특수 차량 기사, 더 나아가 F1 드라이버는 Specialist다. 운전의 예에서 눈치챘겠지만 Specialist는 그 재능이 경쟁 상대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특출 나면 날수록, 그런 사람만이 활동할 수 있는 분야일수록 그 존재가 희소하다. 결국 이 희소성으로 인해 Specialist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지만 Generalist는 누구라도,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다.


Professional의 반대말은 amateur다. 사전의 뜻에는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것이 생업이 아니면, 그러니까 그걸로 돈을 벌지 않으면, 설령 그 사람이 아무리 그 “취미로 하는 사람들” 중에서 독보적인 재주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amateur다.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람

이 세 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전문가는 한 분야에 숙련된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자, 특정 기술에 숙련됐거나 남다른 재주를 갈고닦아서 대체될 수 없거나 대체되기 힘든 특별한 사람이며, 그로 인해 적절한 보상을 받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결국 국어부터 영어까지, 이 단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간, 숙련, 성과와 대가라는 단어가 관통하고 있다. 특히 숙련과 차별화의 맥락에서 보면 타고난 능력과 함께 시간이라는 단어를 무시할 수 없다.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했거나 관련 기술을 익힐 수 있는 학원을 다녔다고 해서 전문가로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격증이 없는 전문가의 입증법

대학에 들어갔을 때 광고 관련 자격증이 없어서 불안하다는 말이 동기들 사이에서 나왔었다. 카피라이터 자격증, AE 자격증, 감독 자격증 같은 거 말이다. 내가 알기로는 옥외 광고나 시각 디자인 쪽엔 관련 자격증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앞서 말한 이런 직종의 자격증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자격증이 없는 사람은 돈을 받을만한 사람임을 독보적인 재주로 입증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빚어낸 경험과 통찰이 만들어내는, 그 세월과 경험이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사람, 그러니까 업계에서 앞서 말한 것들을, 자기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우린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재주의 입증은 돈을 지불할 만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돈을 지불한 만한 사람임을 입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재주가 그 돈의 값어치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건 일종의 믿음이다. 그 사람에 대한, 그 재주에 대한, 결국은 그 전문가에 대한 믿음이다.


전문가를 만들어준다는 광고들

지하철역에도, 지하철에도, 아니 곳곳에서 전문가를 만들어준다는 광고를 본다. 몇 개월만 학원을 다니면 비전공자를 IT 전문가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3, 4개월만 교육을 받으면 영상 디자인, 시각 디자인을 총괄하는 콘텐츠 편집 디자인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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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광고는 기만이다. 사기다. 교육을 받는 사람에게도, 업계와 업계의 진짜 전문가에게도 피해를 주는 광고다. 처남 같은 최상급 프로그래머에게 물어보면 코딩 배우고 막 업계에 들어온 애들은 그저 단순 노동만 시킨다고 한다. 촬영은 안 하고 편집만 주로 하는 후배들의 사연을 건너 들으니 촬영 본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고 한다. 의사의 멘트를 정면에서 찍었는데 어두워서 의사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예능을 찍었는데 정수리를 날려 먹고 초점도 안 맞는다. 이렇게 찍어 놓고 촬영을 했다고 돈을 달라고 한다.


막막한 시간과 어려운 단계를 넘어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바로 택시나 버스를 몰 수 없다. 당연히 F1 머신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꿈을 꾸는 건 자유지만, 그 꿈을 이루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속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원하는 단계로 툭툭 넘어가면 좋겠지만, 그게 또 그렇게 쉽지 않다. 어디 인생이 내 맘대로 되던가. 4칙 연산에선 발굴의 실력을 보이던 초등학생이 분수나 소수 앞에서 좌절하는 것처럼 전문가로 향하는 여정에도 그런 장벽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별 수 없다. 진짜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스페셜리스트, 프로페셔널이 되고 싶다면 학교와 학원 밖의 시간을,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는, 그 막막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 막막한 시간에 해답의 작은 구멍을 내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종종 질문을 기다리는 선배들이 있을 수 있다. 소주 한잔, 맥주 한잔, 아니면 그냥 커피 한잔 사라. 참고로 난 요즘 우리 전통주를 좋아한다. 아, 사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