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와 세상의 끝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07

by 최영훈

이제 다음 해로 넘어간다. 2004년 폴더에 담긴 일들의 목록을 보다 혼자 웃었다. 참 별의별 일을 다 했구나 싶었다. 그 희한한 일, 희한한 장소 중 하나에 대해 써보려 한다.


카피라이터로써 가 본 곳들

부산, 울산, 경남을 주 무대로 일하다 보니 일반인이라면 평생 들어가 보지 못할 곳에 가서 신기한 것을 보곤 한다. 우선, 지역의 거대 조선소는 다 가봤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대우조선해양은 확실히 갔던 기억이 있다. 여기에 이들 기업의 하청 업체라 할 수 있는 중견 조선 업체와 중공업 기업, 선박 설계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엔지니어링 기업에도 가 봤다. 이 지면을 통해 조선업의 복잡한 구조와 위계, 다종 다양한 풍경을 다 말할 수는 없으니, 그건 다음을 기약하자.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도 들어가 봤다. 관련 하청 업체도 몇 곳 가봤다. 뿐인가, 일반인은 갈 수 없는 직원용 통로를 이용해 부산의 롯데호텔 곳곳을 구경한 적도 있고 울산문화예술회관의 단원 연습실과 백스테이지에도 가 봤다. 학생들도 택을 찍어야 출입이 가능한 울산과학기술원에 가서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정확히 이해를 못 하는 엄청난 장비와 그것을 이용해 세계의 학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교수님들도 만나 뵀다. 그러니까 반도체를 나노 단위로 쪼개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억 짜리 전자현미경.... 그만하자. 어차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내 경험도 감독의 경험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감독은 국립박물관 소속 학예사들과 전국 곳곳을 누볐고 울릉도와 독도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이니까.


이곳은 도대체, 뭘 하는 곳인가?

파일을 보니 2004년 봄이다. 누구랑 갔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참 AE인 미진 씨와 나, 박 감독이 동행했던 것 같다. 미진 씨가 와서 기업 홍보 영상 때문에 미팅을 가야 한다고 했는데 기업 이름만 듣고서는 뭐하는 곳인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구글도 없을 때였고 검색만 하면 기업 정보를 파악할 만큼 기업들이 자신들의 정보를 부지런히 업로드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여하간 우린 회사차를 타고 이동했다. 당시엔, 지금은 카페 거리로 유명한 부산 전포동에 부산진구를 사업 지역으로 하는 케이블 방송국 건물이 있었다. 지금도 그 건물은 있다. 여하간 그 건물 꼭대기 층이 그 기업의 사무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복도로 나서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이렇다 할 집기가 안 보였다. 그러니까 사무실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책상과 의자, 파티션으로 구분된 개인과 부서의 구분, 복사기나 프린터 같은 것이 안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둥그런 테이블이 곳곳에 있었다. 그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어깨를 비비고 앉아서 누군가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선 파이팅을 하거나 박수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 다가와서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고 AE가 용건을 말하자 회장실로 안내됐다.


회장실엔 짙은 갈색의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 회장님은 얼핏 보면 대학 교수 같았다. 그 안에 앉아 있는 남자들 중 몇몇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어떤 남자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지만.


달변에 묻힌 진실

소파에 파묻히듯 앉자 마자 얘기가 시작됐다. 회장은 달변이었다. 유려한 말솜씨가 우리 고참 AE를 압도했다. 기업은 유통기업이었다. 조만간 전국에 백화점과 마트를 열 것이고 회원들의 고정적 수익구조를..... 눈치챘나? 그렇다. 다단계 회사였다. 뭐, 지금은 없는 회사일 테니 이름을 말하면, 아람 네토피아라는 회사다.


돌아오는 길, 다들 말이 없다. 다들 서른을 넘긴 나이, 세상 물정을 모를 리 없다. 담당 AE의 고민이 깊어 보였다. 일은 진행됐다. 고객이 원하는 결과물은 전진 대회 홍보 영상. 쉽게 말해 대형 실내 체육관에 회원들을 모아 놓고 사업 설명회 같은 걸 하는데, 그때 회원들의 마음을 흔들 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폴더를 보자. 파일이 네 개다. 2월 21일에 초안을 써서 3월 10일에 픽스된 것 같다. 이 마지막 파일을 열어보자. 그 오프닝, 이렇게 시작한다.

누가 성공을 원하는가? 누가 성공을 의심하는가?
새로운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성공 전략.
이제 당신이 알던 성공의 신화는 잊어라.
당신이 알던 마케팅의 법칙은 잊어라.
신개념 마케팅으로 새로운 성공의 시대를 연다.
아람 네토피아.

격정적이다. 작심하고 썼다. 본론은 경영철학, 사업 현황, 허황된 비전, 로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마무리 멘트를 보자.

아람 네토피아가 여러분의 꿈을 이뤄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열정만 가져오십시오. 성공, 성공, 성공, 부자의 꿈.
이제 당신이 이룰 차례입니다.

흠... 정말 작정하고 썼나 보다. 심지어 대표이사가 할 말도 직접 써 줬던 모양이다. 그 멘트 이렇다.

아람 네토피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드는 네트워크의 유토피아 건설을 통하여
유통 보국의 사명감으로 프로슈머 왕국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프로슈머 여러분, 아람 네토피아에서 여러분의 꿈을 이루십시오.

뉴스에 나오는 고객

뭐, 그럭저럭 일은 마무리됐고 결제는 됐다. 그 정도였으면 이 일이 내 기억 속에 그렇게 오래 남았겠는가. 그 뒤 한 달, 두 달 뒤였나,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와 작은 원룸에서 뉴스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뭘 먹었더라... 여하간 중앙 뉴스가 몇 개 지나가고 지방 방송으로 넘어왔을 때, 첫 뉴스로 이 회사 이름이 나왔다. 뭐, 뻔 한 뉴스다. 다단계 회사가 회원들의 돈으로.... 그만하자.


일부 광고홍보학과에선 광고 윤리론을 가르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광고엔 윤리가 없다. 심의 기준은 있어도 윤리는 없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 업을 하면서 광고를 해도 안 팔릴 게 뻔한 제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적도 있다. 물론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 제품은 안 팔릴 제품이었다. 그러나 고객이 그 제품이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으면 카피라이터 또한 그래야 한다. 우리는 애널리스트가 아니라 치어리더니까.


돌아보면 참숯가마나 찜질방 광고를 위해 그곳에서 종일 있었던 적도 있다. 다들 살기 위해 돈과 시간과 인생을 투자한 사람들이었다. 카피라이터는 그 투자가 헛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그들의 상품을 소비자와 시장에 소개할 뿐이다.


당연하게도, 쓰면서도 이것이 뻥이라는 걸 알았다. 백화점과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고, 전국 대도시에 지사를 운영하며, 350개의 상품을 유통한다는 말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카피라이터는 쓸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광고 인문학을 운운하는 몇몇 책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광고는, 그리고 카피라이터는 인간의 심연, 그 막장까지 내려가는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글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 그 표면과 심연을 급하게 오가며 의미를 건져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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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카피라이터라면, 이종격투기 선수처럼, 휘둘러야 될 주먹을 휘두르듯 카피를 휘둘러야 한다. 하드보일드 하고 누아르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소설처럼,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