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업계 후배를 찾고 있었다. 난 쉰이 넘었고 감독도 그 목전이어서 우리가 하기엔 단가나 일의 성격상 안 맞는 일이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가 하는 것보다 젊은 후배들, 여러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한 신생 업체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나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하반기부터 감독과 난 틈날 때마다 몇몇 후배들을 떠 올리며 검토했지만, 마땅한 팀이 없어서 결국 우리가 했었다. 올 상반기에도 그런 성격의 일이 들어왔었다. 처음 거래하는 것이라 예의상 몇 개는 우리가 했지만 역시 일의 성격이나 단가,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서 하반기엔 다른 후배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이때도 마땅한 후배를 찾지 못해 일만 털어내고 다른 업체 찾는 건 그쪽에 일임했다.
성장이 더딘 신입
사실, 작년 봄에는 감독의 영상 노하우를 전수하려고 신입도 뽑았었다. 정초부터 감독과 난 이력서를 받아 면밀히 검토한 끝에 한 명을 뽑았다. 체형도 듬직했고 서울에서 촬영 보조한 경험도 있었다. 이력서엔 편집 툴 다루는 능력을 상중하 중에서 <중>이라고 써 놨었다. 그러나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감독은 촬영의 기본부터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발전이 더뎠다. 마침 일 년 내내 아카이브 촬영이 있어서 아쉬운 마음에 데리고 있었지만 결국 올해 여름, 자신의 발전이 더디다는 걸 인정한 신입은 일을 그만뒀다. 배움이 느리면 시간을 들여 수십 번의 반복도 불사해야 하는데, 그 친구에겐 그런 열정이 없었다. 우리가 꼰대가 됐나? 감독과 난 우리가 고지식한 건지, 세상이 변한 건지 한참을 얘기하곤 했었다.
어려운 후진 양성의 기회
2004년부터 대략 십여 년 간 대학에서 카피라이팅을 강의한 적이 있다. 후진 양성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연차 때부터 대학을 들락거린 것이다. 그때는 그게 아주 큰 의미였고, 그 의미를 업으로 삼고자 박사과정도 진출했지만... 이 얘기는 좀 뒤에 하자. 어찌 됐든 후배들에게 카피라이팅 노하우를 전해주기 위해 나름 애를 쓴 시간이었다. 강사법이 개정된 이후 강사들이 대학을 나올 수밖에 없게 된 이후, 대학에서의 강의는 끊겼다. 그러다 2년 전에 맘에 맞는 청춘 세 명을 데리고 카피라이팅 세미나를 하기도 했다. 서너 달 정도 했던 것 같다. 그중 한 명만 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인간, 어디서 배운 거지?
아주 세밀한 기획 없이 글을 쓰다 보니 빠트린 부분이 있다. 이 연재를 읽어오신 분들도 궁금한 점 아닐까? “이 인간, 카피라이팅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인터넷 언론사에 있었다는 인간이 하루아침에 카피라이터가 됐다고? 그럼 그전에 그걸 배웠다는 거야?”, 이 의문에 답할 시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러니까 이 연차, 이 나이가 되어서야 솔직하게 말하는데, 난 카피라이팅을 배운 적이 없다. 업계 선배도, 사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 카피라이팅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내 스타일이다. 물론 대학, 그러니까 학부 전공은 광고홍보학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1기다. 이걸 길게 설명하면 한정 없으니 간략히 설명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광고홍보학과는 89년 광고과에서 이름을 바꾼 중앙대학교 광고홍보학과다. 광고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69년에서 멈춘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 대부분의 광고홍보학과는 90년대 초반에 생겼고 내가 들어간 대전의 학교도 이 시기에 학과를 개설했다. 부산에서 광고홍보학과가 생긴 건 더 나중으로, 99년, 고신대학교에 생긴 것이 최초다.
1기의 어려움
자, 대학을 1기로, 그것도 스물넷이나 돼서 들어갔으니 1기가 동기의 형님 노릇을 해야 했다. 나이 어린 동기들을 추스르고 마음을 합하고 그렇게 함께 막연한 학과 생활을 헤쳐 나갔다. 수업 시간에 카피라이팅을 배웠던가? 커리큘럼에 그런 과목이 있었나? 기획론, 제작 실무 같은 강의는 기억이 나는데 카피라이팅을 배운 기억은 없다. 아마 적절한 강사를 못 찾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최근, 대학 시절 교재를 정리할 때도 카피라이팅 관련 교재는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간 대학원
그럼 대학원에선? 97년 IMF가 터진 뒤, 우린 4학년을 맞았다. 입학할 때, 졸업만 하면 대전, 충남 지역, 심지어 수도권의 굵직한 대행사에서 앞다퉈 우리를 모셔갈 것이라는 교수들의 호언장담은 이 전대미문의 글로벌 금융 재해 앞에서 공수표가 됐다. 4학년 2학기가 됐는데 취업한 동기는 거의 없었다. 남자 동기들은 군대에 있거나 막 전역해서 공포에 질려 있었고, 졸업을 앞둔 여자 동기들과 부푼 꿈을 안고 편입한 내 또래의 학생들은 그 꿈을 접었다. 그 접은 꿈을 묻은 채 대학원으로 도피했다.
98년도, 가을 학기, 대학원 시험의 응시자가 얼마나 많았을까? 난 서울의 유명 대학의 대학원 시험 서너 개를 봤는데 응시자 대기실마다 수십 명, 많게는 백 명 가까운 사람이 앉아 있었다. 대학원 한 기수의 정원이 열 명 안쪽임을 감안하면 거의 십 대 일에 가까운 경쟁률이었다. 결국 졸업 후, 한번 더 준비해서 서울의 한 대학,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이 때도, 당연히 카피라이팅을 배우지 않았다. 당시 그 학교뿐만 아니라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선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한 이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커뮤니케이션 이론, 영국의 문화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소위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이론이 학계의 주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나 홍보에 관한 공부를 하는 선후배는 없었고 나 또한 이 당시에는 문화이론과 저널리즘 이론 등을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하고 느닷없이 -그 전후 사정은 기회가 되면 자세히 말하겠다. - 부산에 오게 됐고 당시에도 나라 안팎으로 경제 상황이 안 좋았던데다가 취업을 위해 뭘 준비하라는 선배가 없었기에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이것저것 하다가 카피라이터가 됐다.
사수 대신 독학
회사에도 사수가 없었다. 업계에서 지랄 같기로 유명한 사장이었기에 그만두고 나가는 선배들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기 때문이다. 당시엔 이렇다 할 인수인계에 대한 내부 방침이 없었기 때문에 영업을 하고 광고주를 관리하는 AE들을 제외한 다른 부서 사람이 그만둘 때는 더 붙잡을 방도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독학이었다. 세부적인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심의서를 읽는 것, 하나는 광고 실무 고전을 읽는 것. 심의서는 광고심의서를 말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광고는 사전심의제다. 광고심의위원회에 광고 카피와 관련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전문 위원들이 보고 방송 여부를 결정했다. 당시엔 이 결과지를 출력해서 광고공사와 방송국에 패스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대행사마다 이걸 출력해 놨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십 년 치 정도가 정리되어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걸 들춰 봤다. 그 심의서엔 매체 종류, 시간, 카피 멘트와 자막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시대의 광고 교과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로는 다양한 책을 보는 거였다. 전설적인 카피라이터들의 책은 물론이고 마케팅 책도 수 십 권 이상 봤다. 그중 가장 도움이 많이 된 건 우에조 노리오의 <카피 교실>이다. 이 책에는 세부적인 실무 지침들이 잔뜩 들어 있다. TV CF 카피는 이렇게, 신문과 잡지 광고는 저렇게 써라. 헤드의 역할은 이렇고 서브의 역할은 저러하니 바디는 그에 따라 이렇게 써야 한다. 20초 라디오 카피는 몇 글자 정도가 좋다. 광고주나 상품명은 세 번 이상 반복해라. 핫 버튼(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핵심 문구)은 반복해라와 같은 조언과 사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다음으로 도움받은 건 일본의 유명 광고 회사인 덴츠의 카피라이터들이 사보에 쓴 글을 모은 책인 <워딩 100>과 <카피 100>이다. 난 카피가 막힐 때마다 이 책들을 들춰봤다. 당시엔 이렇다 할 이미지 사이트도 없었고 유튜브도 없을 때였다. 그러니까 벅스 뮤직으로 음악을 들을 때였다는 말이다. 참조할만한 레퍼런스는 국내외 업계 전문지 밖에 없었기에, 대행사마다 디자인과 광고 관련, 국제 유수의 광고 대회에서의 수상작을 모아놓은 책들로 한쪽 벽을 채워놨었다. 나 역시 그 책들을 수시로 꺼내 봤다.
이것도 팔자라면 팔자여서
자의 반 타의 반 선배 없는 인생이었다. 초등학교는 파주에서 시작해 의정부에서 졸업했고, 중학교까지 다녔지만 파주는 안 간지 40년이 넘었고, 의정부도 30년이 넘었다. 평택에서 십 대 후반부터 20대를 다 보냈지만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퉁쳤고 대학은 대전에서 다녔으니 선배라 할 만한 이는 없고, 교회 형님들이 계실 뿐이다. 그마저도 2002년 떠나온 후 대부분 인연이 끊겼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동기 및 후배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던지라 동기나 교수님들은 내가 죽었거나 이민을 갔을 거라 추측했었다. 선배 없는 삶이 이걸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더 어이없는 얘기는 다음에 하자.
여하간 지금도 업계에서 선배라 부르는 분은 현재 화승 그룹에서 홍보 책임자로 일하시는 김병호 선배밖에 없다. 현업에 있을 때 서로의 소문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얼굴을 본 건 한 번인가 두 번 밖에 없다. 2003년인가 2004년, 카피라이터 모임에 딱 한 번 나갔었는데 그때 병호 선배의 얼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 같다. 벌써 20여 년 전 이야기다. 그 사이 세상이 좋아져서,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그 모임에서 봤던 열명도 안 됐던 업계 선배들은 다들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른다.
후배에게 남겨줄 것에 대해
이젠 선배보다 후배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이다. 죽을 때 싸가지고 갈 노하우도 아니어서 기회만 되면 나눠주고 퍼주고 싶은데 그게 또 쉽지 않다.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린 몇 년 전부터 묘한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 이러다 그냥 은퇴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래서 우리가 가진 유무형의 노하우를, 우리가 몸으로 부딪혀 체득한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해주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후배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생을 하며 이 길을 걷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난 대학에서 실컷 강의라도 해봤지. 감독은 그럴 기회도 없었으니 그 초조함이 더할 것이다. 다음엔 이 어이없이 시작한 대학 강의 이야기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