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전설의 시작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04

by 최영훈

올 하반기엔 예술회관을 들락거렸다.

시립예술단의 SNS 홍보 방안에 대한 몇 차례의 회의 때문이다. 회의를 위해 당연히 타 시도의 예술단 사례를 조사했고 홍보 사례나 캠페인, 광고 전략 등을 분석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예술회관 관장이 공석이었던지라 결정이 미뤄졌던 상황에서도 방향과 방법이 정립되면서 가을로 접어들었다. 감독과 내가 정신없이 바빴던 9월이 끝나고 10월 중순이 됐을 무렵, 몇 가지 프로그램 포맷이 정해졌고 시립예술단 홍보 캠페인 예산이 책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무관은 우리보다 열몇 살 어린 사람으로, 감독과 인연을 맺은 지 십 년이 넘었고 그 사이 제법 중요한 위치에까지 성장했다. 콘티나 카피의 방향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작가님하고 감독님이 전문가이시니까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말을 했다. 고객한테 들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말이면서, 동시에 가장 무섭고, 무거운 말이다.


공연 광고는 촌각을 다툰다.

TV로 나오는 공연 광고를 업계에선 공연 스팟이라고 부른다. 스팟(SPOT)은 말 그대로 한 지점이다. 일반 광고처럼 몇 개월 단위로 광고 송출 계약을 한 뒤 광고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목전에 두고 공공 캠페인이나 비어 있는 광고 시간대를 사서 짧은 기간 송출한다. 그런 이유로, 당연하게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팀의 경우 영상 스팟이라면 일주일, 라디오 스팟이라면 그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준다. 주요 공연 정보는 공연장, 그러니까 예술회관이나 시민회관 담당자가 정리해서 보내준다. 기관에 따라선 문구 전체를 완성해서 보내주는 곳도 있다. 이 경우 카피라이터는 윤문만 해준다.


세 시간 후, 예정된 녹음

초년병 시절, 공연 광고 파일은 없다. 그러나 분명 한 적이 있다. 내 카피라이터 인생에서 가장 급하게 쓴 카피인데 잊을 수 있을까. 2003년 가을인가, 그다음 해 봄인가 했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기획실에 들어오니 AE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 팸플릿을 건넸다. A4 지를 세 번 접은, 전형적인 6면 팸플릿이었다. 뭐냐고 물었다. AE의 주문은 간단했다. 네 시에 녹음이 잡혔다. 그때까지 카피를 좀 써 달라. 내일 바로 방송에 내보내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다. 미안하지만 부탁한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그 공연이 악극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윤문식, 김성녀 선생님이었다. <번지 없는 주막>이었나? 여하간 당시는 악극과 마당놀이 형태의 무대극이 막 전성기를 맞았던 시기였다. 90년대 후반, 명절 특집으로 편성되던 마당극이 무대에 올랐고 그때까지 무대 예술 소비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노년층이 급격히 흡수되면서 시장이 커졌다. 그리고 그 시절 윤문식, 김성녀, 김성한 선생님은 악극과 마당놀이의 흥행 보증수표였다.


자, 각설하고, 다시 긴박한 제작실로 돌아가자. 성우는 네 시에 온다. 기억이 맞는다면 40초짜리 라디오 스팟이었다. 자료는 달랑 팸플릿 하나.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녹음실이 있었다. 녹음 부스와 그 앞에 큰 오디오 믹서가 있는, 제법 그럴싸한 녹음실이었다. 내 자리에서 열 걸음도 안 떨어진 거리, 제작실 안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성우가 오기 직전까지, 그 최후의 순간까지 카피를 쓸 수 있다는 거니까.


첫 경험이었다. 쓰기의 속도가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아야 했다. 아니 앞서가야 했다. 분량도 체크해야 하고 성우가 발음하기 좋은 단어로 되어 있는지도 살펴야 했다. 성우가 오기 전에 카피를 썼고 녹음할 수 있었다. 녹음하는 내내 부스 밖에 있었다. 제작 상무님이 녹음을 진행하는 동안 성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피를 함께 읽었다. 어색한 부분, 빠진 내용, 틀린 내용이 있는지 거듭 살폈다. 아무리 카피가 좋아도 공연 장소와 일시가 잘 못 나가면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한 공연 광고니 말이다.


자판기 전설의 시작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동료들이 날 자판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동료들이 그렇게 불렀고 다른 회사 AE들에게도 날 그렇게 소개해서, 내가 모르는 다른 회사 AE들도 날 그렇게 부른다는 소리를 건너 들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들어간 회사는 당시 대행 순위 50위권이었다. 업계 전문지에선 매달 대행 수수료로 대행사의 순위를 매기는데 그 순위가 전국 50위권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10위 내의 기업과도, 심지어 20위권 기업과도 큰 차이 나는 50위권이었지만, 그래도 부산에서 1,2위를 다투는 수준이었다. 내가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부산에 부산백화점, 태화백화점 등이 버티던 시절만 해도 압도적인 1위였다.


이 회사는 부산 본사에만 AE가 열 명 정도 있었다. 여기에 마산, 대구에 지사를 두고 있었고 서울에도 영업 사무소가 있었다. 지사별로 담당 AE는 한두 명뿐이었지만 제법 영업 수완들이 있던 베테랑들이어서 자주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카피라이터는 본사에 딱 한 명, 나 밖에 없었으니까.


AE는 스무 명, 카피라이터는 한 명?

대행하는 기업이 많으면 기업의 성격에 따라 시기별, 계절별, 월별로 주기적 광고들이 많다. 게다가 라디오 광고는 제작비와 매체료가 저렴했기 때문에 AE들이 신규로 유치하기 용이했다. AE들이 있는 영업부서와 제작팀과 기획팀이 서식하던 제작실 사이엔 키(특수) 촬영이 가능한, 벽이 파란색으로 칠해진 스튜디오가 있었고 그 스튜디오를 마주 보고 화장실이 있었다.


AE들이 그 공간을 지나 제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AE의 표정만 봐도 내일까지 카피를 써 가야 한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광고주는 최대한 빨리 카피를 보고 싶어하고, AE 입장에서도 얼른 좋은 카피를 들이밀어야 계약을 진행할 수 있다. 그렇게, 광고를 걸어야 사장한테 예쁨을 받는다. 물론, 회사에도 보탬이 되고.


나름 광고주를 다룰 줄 아는 고참 AE 미진 씨를 제외하면 다들 이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했다. 그것이 부산 사람들의 성급함인지, 무서운 사장을 지척에 두고 일하는 AE들의 초조함 때문인지, 그 까닭은 지금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써달라는 날까지 카피를 써줘야 AE와 우리 회사에 대한 광고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이미 얻은 신뢰 또한 유지될 수 있었다.


마라톤과 맥주 한 잔의 시작

그렇게 적을 땐 열몇 명, 많을 땐 스무 명 가까이 되는 AE들이 돌아가며 일거리를 던졌다. 하나의 카피를 놓고 고민하는 건 사치였다. 결국 한글 파일 창을 여러 개 열어 놓고 동시에 여러 카피를 쓰는 버릇이 생겼다. 하나의 카피가 막힌다고 사무실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는 한가함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허락할 수 없었다. 어차피 담배를 안 배워서 못 피웠기에 종일 커피를 달고 살았다.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 퇴근 후 대연동 집에서 광안리 회센터 뒤에 있는 빨간 등대까지, 왕복 십킬로미터 정도를 뛰었고, 혼자서 맥주 한 잔 하는 버릇도 이때 생겼다.


일과 관련된 글을 쓰는 데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프리랜서 시절에 수백 페이지 분량의 백서 초안을 혼자 쓰는 경험을 몇 번 한 이후론 분량에도 겁먹지 않는다. 속된 말로 돈만 주면 몇 백 페이지도 정해진 기간 안에 써줬다. 글의 질이 좋았는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순 없다. 다만 AE가 만족하고 광고주가 오케이 했으며, 광고주의 사업과 기업이 번창하는데 도움이 되는 카피를 쓰기 위해 애썼고 그런 카피를 썼다고 자부하고는 있다. 카피라이터가 가장 지켜야 될 선은 데드라인이다. 기발한 카피, 무릎을 치게 하는 번뜩임은 그다음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지키는 신조라면 신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