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없어도 쓸 건 써야 한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03

by 최영훈

라디오 광고 얘기가 나온 김에 더 해보자.

앞선 광고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품의 광고였다. 필드는커녕 골프채도 안 잡아 본 카피라이터가 골프로 먹고사는 광고주를 만족시킨 사례라고나 할까? 물론 이를 위해 생전 안 보던 골프 중계도 봤고 골프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도 해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간접 경험일 뿐이다. 이 간접 경험을 넘어서기 위해선 그걸 하는 사람,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 그걸 경험했던 사람과의 대화가 제일 중요하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광고계의 격언은 빈말이 아니다.


요즘엔 생전 처음 보는 상품이나 서비스라도 그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엔 더하다는 얘기다. SNS도 다양하고 사용 후기도 풍성하다. 게다가 관련 업계, 학계, 심지어 관련 정부 기관이나 부처에서 발행한 보고서도 많다. 통계청에서 매해 발표하는 통계자료도 모르는 세계로 진입하는 열쇠 역할을 할 수 있다.


몇억 원어치 라디오 광고

파일을 보니 <알바트로스>가 그 해 11월이다. 지금 얘기하려는 <미창석유>의 고급 엔진오일 <에네오스>를 고참 AE 미진 씨가 들고 온 건 12월이었다. 파일을 보니 그 해 말일에 써 준 모양이다. 요즘도 부산 경남 지역의 고속도로에서 <미창석유>의 <에네오스> 옥외 광고를 볼 수 있다. 필자도 지나는 길에 옥외 광고뿐만 아니라 그 로고를 새긴 탱크 트럭을 종종 보곤 한다.


당시, <미창석유>는 일본의 유명 정유 회사와 합작하여 고급 세단을 위한 엔진 오일을 론칭했다. AE의 주문은 간단했다. “성우는 배한성 씨로, 이미 정해졌다. 그러니 고급 엔진오일의 품격을 담아 달라. 라디오 광고 매체료만 거의 몇 억 이다. 그러니 잘 써 주시라.”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라디오 매체료다. 라디오 매체료는 지역마다, 프로그램마다, 방송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여하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 이렇게 저렴한 라디오 광고를 몇 억 원치 한다는 건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아내가 운전하는 차로 이동 중에 내가 쓴 라디오 광고를 듣는 경험을 이미 해봤기에, AE로부터 매체료를 듣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상상해봐라. 책은 누군가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당신이 쓴 라디오 카피가 시내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와중에도 나온다고 상상해 봐라. 그건, 생각보다 카피라이터를 심난하게 한다.


운전 안 하는 카피라이터의 수난

문제는, 난 운전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다. 운전에 관심도 없고 자동차의 성능에도 관심 없다. 웃긴 건 F1 경기나 랠리 경주는 즐겨보고 해외 자동차 브랜드와 디자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데 운전,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운전하는 동료들에게 물었다. 제일 먼저 같이 일하던 박감독에게 물었다. 당시 박감독은 드래그 레이스 마니아였다. 그러니까, 튜닝한 차량으로 야심한 시간, 한적한 도로에서 레이스 하는 것이 취미였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대답은 뻔했다. 엔진 오일을 좋은 걸로 바꾸면 자동차 성능이 좋아진다는 것. 회사 내, 운전할 줄 아는 사람한테 다 물어봤지만 대답은 다들 비슷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퇴근했다.


그날 저녁, 여자 친구, 지금의 아내가, 내가 살던 부경대 앞의 조그만 원룸에 놀러 왔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 아내는 TV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내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운전을 좋아했고 잘했다. 그것도 운전하기 어렵다는 부산에서 늦게 다니던 대학 4년 내내 운전을 하고 다녔다. 내가 아는 한 아내보다 운전을 잘하는 여자는 그게 업인 사람뿐이다. 기억이 맞는다면 당시 아내의 차는 라노스였다.


여자 친구의 어시스트

카피를 한 줄도 못 쓴 채 모니터만 노려봤다. 시간이 흘렀다. 답답한 마음에 아내에게 물었다. “미란아, 엔진 오일 있잖아. 그거 무지하게 비싸고 좋은 걸로 바꾸면, 차가 좀 달라지는 거야? 뭐가 달라지는 거야?”, 아내는 이미 밥 먹을 때부터 내 얼굴에 카피에 대한 고민이 묻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는 카피를 쓰지 못하면 그 고민을 일상까지 갖고 오던 시절이었다. 내 질문을 들은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음. 아무래도 차가 좀 조용해지지.”하고 한 마디 했다. 무릎을 탁 쳤다(은유적으로 그랬다는 거지 실제로 치진 않았을 것이다). 단숨에 A 안을 썼다. 맘에 드는 A 안을 썼다고 그것만 달랑 들려 AE를 대형 광고주에게 보낼 순 없으니 접대용 시안 몇 개를 더 썼다. 그러나 내심 A 안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예상대로 A 안이 됐다. 해를 넘겨, AE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AE가 중역 회의에 불려 갔다. 럭비공 모양의 긴 탁자에 임원들이 둘러앉아 있고 그 앞에 시안들이 놓여 있었다. 대표는 임원들이 시안을 읽을 시간을 준 뒤 거수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와 북한의 인민회의 스타일과 같다. 압도적인 지지로 A안이 됐다고 한다. 그 시안의 전문은 이렇다.


바쁜 저에게,

자동차에서 듣는 음악은

언제나 편안한 휴식을 주죠.

그래서 전 윤활유를 에네오스로 바꿨습니다.

차 안에서 느끼는 잔잔한 음악의 감동을 위해,

부드러운 엔진, 조용한 자동차.

자동차용 고급 윤활유, 에네오스.

미창 석유.


뭐, 지금 봐도 딱히 크리에이티브한 표현은 없다. 그러나 최고의 성우였던 배한성 씨의 바쁜 직업적 상황과 제품의 특장점과 상품성이 잘 어우러진 카피라 할 수 있다. 여하간 이 카피를 기점으로 그 회사에서 버틴 한 해가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