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의 역량 측정기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02

by 최영훈


요즘 우리 팀엔 라디오 광고 일이 뜸하다.

보통 라디오 광고 의뢰는 광고 대행사로 들어오거나 지방의 경우엔 광고주가 매체사에 직접 의뢰하는 경우도 있기에 카피 또한 그들 선에서 처리되기 때문이다. 이쯤 해서 앞으로 자주 나올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하고 가자. 이 연재를 읽으시는 분들 대부분이 이 업계에 계시지 않을 테고,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낯선 단어를 검색해 알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위한 용어 정리

앞선 글에서 언급한 AE(Account Executive)는 말 그대로 계좌 담당자였다. 은행에서 특별한 고객의 계좌를 관리하면서 더 많은 예금을 유치하거나 대출해주는 사람 말이다. 이 용어가 광고 쪽으로 넘어오면서 다양한 업무를 함께하는 영업 인력을 통칭하는 말로 정착됐다. 교과서적으로 얘기하면 제법 정형화되고 조직이 잘 갖춰진 대행사의 AE는 보통 기획(Plan), 프로듀서(Producer), 발표자(Presenter)의 역할과 영업(Business) 업무를 맡는다. 여기서 프로듀서 개념이 좀 생소할 거다. 뭐, 별거 없다. 광고주(고객)를 잘 알고, 그 고객의 요구와 상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AE이니 당연히 조직 내에서 적절한 인력을 모아 광고 업무 전반을 주도하는 역할은 당연히 담당 AE가 맡아야 하기에 이런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할을 다 잘하는 AE는 흔치 않다. 기획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객과 관계가 좋은 사람이 있고 발표를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과거 부산 업계엔 PT 에 특출나서 고액의 연봉을 받던 AE도 있었다. 우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입만 갖고 출근한다고 했다. 그 사람을 낮에 사우나에서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 그리고 자주 나올 용어가 대행사, 기획사, 제작사, 매체사다.


대행사는 광고를 대행해 주는 회사다.

우리나라는 방송의 경우 개인이 직접 방송사와 광고 거래를 할 수 없다.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를 통해야만 한다. 당연히 개인이 이 공공 기관과 광고 협상을 할 수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하냐? 부동산 중개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야말로 중간에서 이 업무를 대행해 주는 회사를 통해야 한다. 대행사는 이걸 대행해주고 기업이나 개인이 지불하는 광고비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챙긴다. 그런데 이 수수료가 생각보다 많다. 대기업을 광고주로 모시고 있는 대행사의 경우, 그냥 광고만 걸어놓고 그걸 대행만 해줘도 매달 들어오는 돈이 엄청나다. 종종 제작과 크리에이티브가 서비스 상품, 끼워 파는 상품처럼 취급되는 이유다.


기획사는 대행 업무는 하지 않고 크리에이티브만 파는 회사다.

요즘엔 워낙 기발한 친구들이 많아서 이런 회사들이 활성화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 20여 년 전만 해도 흔치 않았다. 우리나라 광고 시장이 소위 In house Agency, 즉 대기업 계열사 광고 대행사 중심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크리에이터가 이 구조 밖에서 자신의 창의력과 창작품에 적절한 가격을 부여해 수입을 올리는 구조가 정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초년병 시절, 부산 같은 자칭 제2의 도시에서도 이런 기획사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제작사는 말 그대로 제작만 해주는 곳이다.

물론 대기업 계열 대행사의 경우엔 모든 걸 다 손에 들고 있기에 제작사조차 계열사로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행사는 외부 제작사와 일한다. 제작사가 갑자기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90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까지, 한국의 뮤직비디오 시장이 천재들의 각축장이었던 것처럼, 영상 광고 시장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다. 또, 80년대 말에서 90년대 후반까지 비디오 영화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저예산으로 에로 영화나 액션 영화를 제작하는 소위 프로덕션들이 많이 생겼고, 그런 곳에서 영상 일을 배운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제작사를 차린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내가 두 번째 일했던 회사의 대표도 에로 비디오 전문 프로덕션에서 영상 일을 배웠던 사람이다.


매체사는 말 그대로 매체를 말한다.

고전적으로 4대 매체로 TV, 라디오, 신문, 잡지가 있고 여기에 옥외, 교통, 2천 년 대 들어오면서는 인터넷과 모바일 매체가 성장했다.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앞서 언급한 대행사의 성격도 다양해졌고 기획사, 제작사의 성격도 다양해졌다. 뭐,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라디오 광고, 카피라이터의 개인기

자, 다시 라디오 광고 얘기로 돌아가자. 서두에 언급한 이유 때문에 올해 딱 한 개의 라디오 카피를 다뤘다. 울산의 노동단체가 의뢰한, 최저임금 인상과 그 효과를 시민에게 전달하기 위한 광고였다. 그쪽 담당자가 주요 내용을 미리 분량에 맞게 써 보냈기 때문에 난 다양한 형태로 그 내용에 변화를 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내가 썼다고 하기엔 좀 민망하고, 그저 좀 만졌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래서 그 카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다.


내 카피 중 가장 좋아하는 카피

2003년, 라디오 폴더엔 63개의 광고주 목록이 있다. 중복되는 이름을 제외해도 카피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한 개의 문서 파일 안에 여러 개의 시안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중복되는 목록을 대강 제외해서 50개의 광고주라고 하고, 그 광고주당 최소 세 개 이상의 시안을 써줬다고 단순하게 셈해보면 150개의 카피가 된다. 아마 그 뒤, 십몇 년간 쓴 라디오 카피보다 더 많지 않을까? 모르겠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자주 받았던 질문이었고, 최근 외부에서 강의할 때도 받았던 질문이 있다. 자신이 쓴 카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피가 뭐냐는 질문. 그럼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알바트로스> 광고를 뽑는다. 이 상품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실내 골프 연습장 시스템이다. 이 상품의 광고주를 담당한 AE는 나보다 몇 개월 후에 들어온 신입이었는데 일을 잘했다. 지금은 모 대기업의 CS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만큼 광고 업계에 있을 때부터 말을 잘했다. 고참 AE인 미진 씨만 날 “행님”이라고 불렀고 나머지 AE들은 그냥 최카피님이라고 불렀다. 그 AE는 당연히 날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아마 내가 결혼식에 참석한 유일한 여자 후배 아닐까?

자, 어찌 됐든, 그 후배 AE가 듣도 보도 못한 상품을 들고 왔다. 후배가 한참 설명했다. 골프 용어만 몇 개 알았지 골프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결국 사무실 근처에 있던 실외 골프 연습장에서 가 봤다. 거 왜, 커다란 그물이 쳐져 있는, 몇 층으로 된 곳 말이다. 그래도 별 감이 없었다.

며칠 동안 어떤 사람이 이런 곳, 실외 골프 연습장도 아닌 실내 골프 연습장에서 가상의 필드를 보고 골프 연습을 할지, 후배와 한참 회의도 하고 궁리도 했다. 그 끝에 첫 줄이 떠올랐다. “인생의 여유를 느낄 때 골프를 만났고, 필드가 그리울 때 알바트로스를 만났습니다.”, 그 뒤로는 뭐, 제품 설명, 호쾌한 드라이버 소리, 아마 성우는 당시 유명했던 김종성 씨 아니었을까? 아니면 역사스페셜 성우 중 한 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완성된 걸 광고주에게 들려줬더니 그 자리에서 오케이 하면서 하나 수정을 부탁했다고 후배가 전했다. 뒷부분에 나오는 드라이버 소리를 우드로 바꿔 달라고 했다. 후배가 서울의 녹음실에 전화했더니 당연히 어떤 것이 우드 소리이고 아이언 소리인지 명확하게 알 리 없을 터, 그래도 어찌어찌 새로 믹싱을 해서 들려줬더니, 광고주가 대만족을 했다. 실제로 이 광고 덕분에 사업 초기부터 잘 됐다고 들었다. 그 덕에 후배는 광고주에게 거하게 저녁 대접을 받았다. 내가 이 업을 하는 동안 광고주가 담당 AE가 너무 고마워서 밥을 사준 경우는 이 건이 처음이자 유일하다.

난 라디오 카피를 제일 좋아한다.

다른 매체는 감독이나 디자이너와의 분업과 협업의 결과이고, 때에 따라선 카피는 그저 슬쩍 거들기만 할 뿐인 것도 많지만 라디오 광고는 다르다. 오직 쓰는 이의 재능과 읽는 이의 재능, 이 두 재능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카피라이터의 역량,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 라디오 카피만 한 것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카피라이터가 라디오 카피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업의 시작을 어떤 회사에서 했느냐에 따라 신문이나 잡지 광고에 특화된 카피라이터가 있고, TV광고가 장기인 사람도 있다. 심지어 분양대행이 전문인 회사에서 일하는 카피라이터의 경우엔 당연히 분양 광고에 특화된다. 내 경우엔 그래도 지역에서 잘 나가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기에 여러 매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럭저럭 두루두루 어떤 한 매체에 치우침 없이 그 실력이 고른 편이다. 뭐, 어느 분야에 엄청나게 탁월하다고 말은 못 해도 어디 하나 빠지는 건 없다고 말할 순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