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안 하던 경험을 했다. 우선, 이런저런 심사에 많이 불려 갔다. 또 봄에 두 번, 가을에 한 번, 강연을 했다. 20년 가까이 카피라이터 명함 뒤에 숨어 카피를 썼고, 내 이름으로 글을 쓴지는 불과 몇 년 안 됐는데 글쓰기 강연을 의뢰받았을 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에서 강의한 지 꽤 오래돼서 강연이든, 강의든 하고 싶기도 했다. 머리에 넣은 것은 꺼내아하고 경험한 것은 나눠야 한다. 그래야만 더 읽고 공부하고 채우고 다시 비우길 반복할 수 있고, 지겹지 않게 공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울산에서의 두 번의 강연
그러나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어떤 노하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행사를 기획하신 분이 페이스북으로 인연을 맺은 분이어서 거기에 쓰고 올린 내 글을 읽은 뒤 나를 선택하셨으리라 믿고 수락을 했다. 봄에 했던 두 번의 강연 중 첫 번째 것은 시의회 온라인 서포터스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말 그대로 시의회에 관한 것을 취재하여 자신의 SNS에 부지런히 올리는 것으로 시의회의 활동을 홍보하고 응원하는 것이 목적인 시민들이 모인 무리다. 심지어 그 지원자가 많아 가려 뽑았다고 하니 글쓰기의 열정이 남다를 것이라 여겨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게다가 강연 시간도 너무 짧았고.
담당자와 주고받은 연락을 통해 그 대상들의 면면이 다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그 다양함이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성별은 당연하고 나이와 직업도 다양해 보였다. 그중엔 교수도 있었고 대기업 임원을 하다 은퇴한 분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서야 안 일이다. 강연 시간이 워낙 짧아 준비해 간 PPT 화면을 띄워 놓고 질문을 받기로 했다. 각자가 나 같은 강연자를 통해 알려했던 뭔가가 있었을 테고, 그 뭔가를 알려주는 것이 이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몇 개의 질문은 준비해 갔던 내용으로 답할 수 있었고 어떤 질문은 경험의 창고에서 한참 찾아 건네줘야 했다. 뒤의 일정이 재촉하고 있어 더 많은 문답을 할 수 없어 안타까웠을 뿐이다.
그 몇 주 뒤엔 카피라이팅에 관심 있는 울산 시민 몇 분을 모시고 카피라이팅에 관한 강의를 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비까지 오는 금요일 저녁이어서 몇 분이나 오실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몇 분이 자리를 채워주셔서 이런저런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도 강연보다 문답 시간이 더 길었다. 강연이야 일방적으로 앞에 선 사람이 떠드는 것이어서 듣는 이가 원하는 지식이나 경험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연자에게 원하는 걸 쏙 뽑아가는 거라 여기기에 어떤 질문이든 최대한 성실히 대답했다.
부산에서의 강연
가을엔 부산에서 문화도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연을 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이웃 지역이어서 강연 의뢰를 받아들인 것도 있지만 이 역시 기획한 사람과 한번 얼굴을 트고 인사를 한 경험이 있고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서로의 글을 읽고 근황을 알고 있기에 내가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불러줬으리라 여겨 받아들인 것도 있다. 신문기자이자 온라인 저널의 편집장인 분과 내가 강연자로 초청받아 각각 30분의 시간을 할애받았다. 그러나 17년 차 언론인과 19년 차 카피라이터를 불러 맡긴 강연 시간치고는 너무 짧지 않은가 싶었다. 제법 많은 강연료를 주고 이것밖에 뽑아 먹지 않아도 괜찮은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가기 전에 작정을 했다. 강연이 짧아 질문을 많이 받고 답을 길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회자는 매정하게도 세 개의 질문만 받겠다고 했다. 첫 번째 질문은 이십 대 여성이었는데, 글이 안 써질 때 어떻게 환기하느냐고 물었다. 쉽게 말해 스트레스 해소와 재충전하는 법을 물은 것이다.
"술을 마십니다."하고 농담처럼 말을 한 후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곤 합니다. 때문에 다 읽어도 기억이 안 나 곤 하지만.”하고 부연 아닌 부연을 했다. 답을 이어갔다. “제가 아는 한 카피라이터들은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있습니다. 전 초짜 때는 마라톤을 했고 그 뒤엔 수영과 스포츠 클라이밍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쓰기의 스트레스는 읽기나 다른 걸 쓰는 걸 풉니다.”하고 답했다. 그분에게 도움이 됐을까?
두 번째 질문도 역시 이십 대 여성분이었는데, 첫 문장을 어떻게 여는 법에 대해 물었다. 다른 강연자와 나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17년 차 기자이자 편집장이었던 강연자도 종종 차장 칼럼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답했다. "첫 문장... 중요하죠. 그게 써지면 사실 다 쓴 겁니다. 카피나 칼럼이나 마찬가지죠. 예를 들어 <H마트에서 울다>를 소재로 쓴 칼럼의 첫 문장은 아이를 데리러 갈 때 생각났습니다. ‘빈자리는 비어있지 않다,’였죠. 그 뒤는 휘리릭 써졌습니다. 물론 첫 문장이 맘에 안 들어도 쓰긴 써집니다. 그러나 어쩐지 에너지가 안 느껴지고 억지로 밀고 나간 느낌이 듭니다.", 이 대답 또한 도움이 됐는지 알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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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질문은 삼십 대 여성분이 던졌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보고 책, 글을 읽으셨을 텐데 가장 인상 깊은 것으로 하나씩 추천해달라고 했다. 둘 다 또 한숨을 쉬었다. 이 역시 내가 먼저 답했다. “이 질문은 얼마 전 딸이, 자기가 생에 처음으로 마실 맥주로 좋은걸 추천해보라는 질문만큼 어렵습니다.”, 그다음 잠시 뜸을 들였다. “흠... 일단 요즘엔 한국 작가로는 백상현, 고병권 선생님 책을 읽습니다. 또 저와 동년배 일본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 아즈마 히로키도 읽고요. 이들은 저와 공부의 궤적도 비슷하고 대중문화의 소비 패턴도 비슷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이 중 한 권을 추천하라면 가장 최근에 읽은 고병권 선생님의 <다시 자본을 읽자>를 추천합니다. 공부의 양도 엄청난데 글도 아름답습니다. 추천합니다.”,
영화를 꺼내야 했다. 불쑥 <맨 온 파이어>가 생각났다. “좋은 영화의 기준은 여러 가지고 각자 다르겠지만, 제가 갖고 있는 기준 하나는, 왜 채널을 돌리다 영화가 나오면 처음부터든, 중간부터 보든 어쩐지 채널을 고정하고 끝까지 보는 영화가 있지 않나요? 전 그런 영화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은 <맨 온 파이어>가 떠오르네요. 좋아하는 영화인데 아직 글로 써 본 적은 없습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영화입니다."하고 답을 마무리했다. 이 역시, 어쩐지, 크게 도움이 안 된 느낌이다.
카피라이팅 강사 수배
대학에서의 강의를 한 건 2004년 가을 학기부터다. 그 과정이 일반적이진 않다. 대체로 대학에서의 강의는 학연으로 이어진다. 지도교수의 강의를 물려받거나 대학에 먼저 자리 잡은 선배 교수의 부름을 받아 강의를 시작한다. 또 대체로 누군가의 강의와 강의안을 모방하여 강의를 준비한다. 아니면 강의를 준 교수가 넌지시 말한 책을 교재를 삼는 것도 일반적이다. 물론 그 책은 그 교수 혼자, 또는 교수의 일당이 쓴 책이다.
나 같은 경우는 부산에 학연이 없다. 뭐, 그렇다고 인연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어찌 됐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대학교 광고홍보학과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럼, 그 학교 교수님들 중 나와 부산에서든, 밖에서든, 그때든 예전이든 인연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게 강의를 의뢰한, 그것도 전화로 의뢰한 분은 당시 학과장이셨던 박원기 교수님이다. 이분하고 난 접점이 없다. 학업도, 커리어도 서울에서 하셨고 부산은 처음이셨다. 그분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날 찾아내어 연락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TV와 라디오 광고는 한국방송광고공사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당연히 부산에도 이 공사의 부산 지사가 있다. 그 대행 업무를 하는 대행사의 AE들은 많게는 하루에 한 번, 적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 이곳에 들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소개를 받고 안면을 트기도 한다. 부산에 이렇다 할 인맥이 없던 박원기 교수님은 이곳에 카피라이팅 강의를 할만한, 현업에 있는 카피라이터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셨고 그 부탁은 부산 곳곳의 AE들에게 전달됐다.
운명처럼 맡게 된 대학 강의
당시 난 일하던 대행사에서 다른 제작사로 이직한 상태였다. 제작사에는 AE가 없으니 당연히 그 정보를 알 수 없었다. 그 정보는 앞서 말한 후배 AE로부터 들었다. 후배 AE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 "강사를 구한다고 하는데 선배님 생각이 났다. 선배님 말고는 사실 부산에 할 사람도 없다."면서 부추겼다. 사실 이 후배의 정보 제공은 2003년, 그러니까 내가 1년 차, 대행사 시절에도 있었다. 당시, 사장만 오케이 하면 강의를 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장은 여러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았고, 그것이 제작사의 스카우트에 마음이 흔들려 이직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첫 미팅 자리에서 강의 제안이 들어오면 하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으니 말이다. 뭐, 연봉이야 거기서 거기였고.
여하간 내가 하겠다고 했고, 교수님이 전화하셔서 일이 진행됐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사실 나 말고는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주 특수한 전공이나 학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학 강의는 석사 이상만 할 수 있다. 현업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뒤늦게라도 대학원, 그것도 공부의 질과 양이 벅찬 일반대학원을 피해 특수대학원이라도 다녀 석사 학위라도 따 놓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업에 있는 카피라이터들은 대학원에 다닐 시간이 없다. 또, 이것도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나처럼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카피라이터를 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래서 부산 시내의 대행사며 제작사, 기획사를 탈탈 털어도 석사 학위를 갖고 있는 카피라이터는 잘해야 두세 명이고, 그중 대행사의 AE와 접점이 있는 사람은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러 사정이 겹쳐 고신대학교와도, 또 박원기 교수님과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내가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마음대로 만든 강의안
자, 하겠다고 하긴 했는데... 강의안은 어쩐다? 그냥 내 마음대로 짰다. 카피라이터라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된, 그러니까 현업에 들어오려는 후배 카피라이터라면 이 정도 이론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론 강의를 몇 주 배치했다. 그리고 매체별로 두 주씩 크리에이티브 특성 강의와 실습 및 코멘트를 배치했다. 그렇게 16주 강의안을 만들어 학교 수강신청 홈페이지에 올렸다.
첫 강의 할 때가 생각난다. 그때, 난 영도에 처음 들어가 봤다. 영도는 대연동 집에서 버스를 타고 남포동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들어갈 수 있는, 그야말로 섬이다. 버스가 다리를 건너 오르막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배들이 쉬고 있는 묘박지가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면 거의 산 중턱 같은 느낌이 드는 곳에 고신대학교가 있다. 사무동 옥상에서 보면 바다와 동백꽃이 핀 몇몇 집들이 보인다.
당시 광고홍보학과 강의실은 디자인학과의 강의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새 건물이 지어지지 않아 이사하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각형의 성냥갑처럼 생긴 건물의 4층인가, 5층 구석에 강의실이 있었다. 떨렸던 것 같진 않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40명 정도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신들린 듯 세 시간의 강의를 했다. 그 이후로, 난 아무리 수강 학생이 많은 강의라도 긴장한 적이 없다.
설레는 첫 시간
한 학기 강의 중 가장 행복하고 짜릿한 순간은 첫 주다. 우선, 강의실 앞에 긴 줄이 반긴다.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이다. 일단 들어오라고 한다. 첫 주의 강의가 끝나면 그 학생들은 다시 내 앞에 줄을 선다. 이번에 꼭 듣고 싶다. 작년에도 실패했다. 졸업 전에는 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 하소연은 길고 사연도 많다. 결국 학과 사무실에 가서 잠시 수강신청을 열어달라고 한다. 그러면 그 학생들은 수강신청에 성공한다. 솔직히 학생 수가 많다고 해서 특별히 강의가 힘들거나 하지 않는다. 학기말에 시험 채점을 하고 점수를 주는 일이 고역일 뿐.
첫 주의 강의실로 다시 돌아가자. 적게는 3,40명, 많게는 이삼백 명의 학생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의 앞문을 열고 들어가면 서서히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극장식이나 계단식 강의실의 경우, 강의실 뒤에서부터 강단을 향해 서서히 걸어가면 학생들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강의대 뒤에 선 뒤, 가장 가까운, 비어 있는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고 바지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러면 학생들도 날 본다. 현업에서 일하는 카피라이터, 그 사람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완판남의 전설
2007년, 박사 과정에 진학한 이후, 대전의 모교에서도 강의를 맡게 된 후 완판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원하는 수업을 듣기 위해 수강신청이 열리는 순간, 학생들이 얼마나 광클하는지, 난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OMR카드 같은 걸로 해서 조교한테 건네줬던가, 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로 수강신청을 하게 되면서 인기 있는 전공 강의의 경우, 남학생들은 PC방에서 컴퓨터 몇 대를 잡아 매크로를 돌려야 될 정도로 수강신청의 경쟁이 극심했다. 뭐, 상식적으론 인기 많은 강의라면 분반을 늘리면 되지만, 그것도 이래저래 돈이 드니 학교 입장에선 입구 컷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기에 학생들만 고생하는 것이다.
여하간, 수강신청이 열리자마자 불과 몇 초 사이에 수강신청이 마감됐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선 날 그렇게 불렀고, 그럭저럭 강의가 들을 만했는지 선배가 후배에게 꼭 들어야 할 강의로 소개해준 덕분에 그 명성이 제법 오래갔다.
그 열정이 지금도 있을까?
돌아보면 좋은 시절이었다. 삼십 대 초반의, 연차 어린 카피라이터가 왜 강의를 하고 싶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 없다. 강사료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 돈이 그렇게 많지 않고, 명예나 자랑을 위해서라고 하기엔 내 주변에 사람이 없었고 당시엔 SNS도 없었고 안 했을 때였다. 그리고 막 강의를 시작했을 때는 교수가 되겠다는 야망이나 꿈도 없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이 강의실로 날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의를 한 후 다른 꿈과 좋은 사람을 만났고 깊은 절망과 아픔도 겪었으며, 끝 모를 우울증과 누구에게도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쾌감도 맛보았다.
그렇게 강사법으로 인해 대학에서 하나 둘 강사들이 밀려날 때, 나도 밀려 나왔다. 대학 강의실에 가본 지 한 6,7년 된 것 같다. 그런 기회가 또 올까? 또 오면 덥석 받아들일까? 그건 모르겠다. 한참 혈기왕성할 때, 삼십 대 초반에 선물처럼 찾아온 경험이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 기회를 반가워할지, 그때만큼 세 시간을 꼼짝도 안 하고 서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열정과 체력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모든 경험을 좋은 추억으로 남겨놓는 것이 더 좋을지도.
박원기 교수님은 사진 속 책, 광고 매체론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저 책의 공저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