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촬영하기엔 최악의 날씨였다. 11월 말일에 이렇게 한파가 몰아칠지 누가 알았겠나. 애초에 구의회 사무처의 홍보 담당 주무관은 지역의 유명한 해변에서 의원들이 거니는 모습을 찍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 아무리 따뜻한 11월이어도 해변은 쌀쌀맞다. 숲이나 빌딩 숲에 걸러지지 않은 바람이 기세 등등하게 해안에 닿는다. 이동 시간도 제법 됐다.
내가 얼른 다른 장소를 제안했다. 지역의 독립 운동가의 생가가 있는 곳이니 나름 정치적, 역사적 의미도 있었다. 의회를 개원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이런저런 내홍으로 단체 촬영 한번 못했다. 의회 사무처도, 감독도 속이 타긴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성사된 촬영이니만큼 장소의 의미까지 있으면 더 좋으니,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 모두 찬성했다.
그렇다. 그때는 갑자기 추위가 올 줄 몰랐다. 감독, 그리고 가끔 우리 일을 도우러 오는 조감독과 촬영 장소에 가니 그야말로 칼바람이 몰아쳤다. 독립 운동가의 동상을 마주하고 왼쪽은 탁 트여 있고 오른쪽은 동해의 찬바람을 막아주는 산줄기가 있다. 바람은 산을 넘어 바다로 내달려갈 기세로 우리를 덮쳤다. 감독은 주무관에게 전화했다. 모처럼 의원들의 마음을 모아 단체 촬영에 합의했는데 추운 날씨에 짜증이라도 나면 어쩔 텐가. 결국 의회 내부와 구청 앞에 있는 버티고 서 있는 문주석 앞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정치와 광고
정치는 우리 일과 가깝다. 선거는, 특히 지역의 선거는 조직과 인맥이 승패를 결정하고, 부산/울산/경남의 경우엔 특히 정당이 판세를 좌우하지만 그래도 던져야 할 메시지는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메시지를 만들어야 한다. 폴더를 열어보면 2005년과 2010년에 후보 홍보물 관련 일을 했다. 기초 의원 몇 명과 광역 의원 후보의 홍보 책자가 몇 개 있고, 광역자치단체장 홍보 영상 시나리오가 있다.
파일을 열어보니 기초 의원 후보 책자는 다들 8페이지다. 16페이지도 흔한 요즘 기준으로 보면 단출하다. 한 시의원 후보의 경우엔 슬로건부터 정책 작업까지 다 해줬다. 표지부터 맨 뒷면까지 빠짐없이 구성을 해준 것이다. 기초 자치 단체 시장 후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후보의 정치적 성향과 커리어, 여기에 출신학교와 학력 등을 감안하고 관심사안과 공약의 방향이 담긴 정보를 참고하여 구성한다.
이런 작업들은 당연히 나에게 직접 오지 않는다. 이런 걸 전문으로 하는 출판업자나 인쇄업자, 디자인 업체가 있다. 내 경우엔 부산 인쇄 단지 안에 자리한 대형 인쇄 업체와 일을 했다. 그 업체는 윗 층엔 기획실과 디자인실을 두고, 인쇄소는 1층에 자리 잡아 출고가 쉽도록 했다. 그 건물에 입주한 업체들 대부분이 그런 구조였다. 그 실장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여하간 난 그 실장하고만 일을 했다.
한 번은 김해의 시의원 후보를 직접 만나러 간 적도 있다. 그때 이미 2선인가 3선을 했던, 건설업으로 돈을 번 소위 지역 사업가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대체로 지역의 정치인들은 크게 세 종류다. 몇 대째 지역에서 유지 소리를 듣는 집 안 출신, 지역 토박이로 사업에 성공하여 돈과 인맥이 풍부한 사람, 또 하나는 지역 출신이나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 운동권에 투신했거나 중앙 정치인의 참모를 하다 내려온 사람이다.
물론 다른 유형도 있다. 창원이나 울산의 경우엔 노조 위원장이나 노동 운동을 하던 사람도 있고, 지역에 연고는 없지만 지역의 대학에서 오래 있으면서 정치에 뜻이 생겨 출마한 사람이 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이중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맨 마지막, 교수다. 그들은 애초에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다시, 김해 시의원 후보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날 우린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는 작고 마른 사람이었다. 머리는 짧게 쳤다. 얼핏 보면 정치인이라기 보단 조폭의 행동대장이나 노련한 주임 원사 같은 느낌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 그리고 사업가들은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놔두면 밤새도록 할 수도 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난 묵묵히 듣고 있었고 실장은 맞장구를 쳐줬다. 그는 4선에 도전하면서 후배들에게 미안해했다. 이제 후배한테 지역구를 물려줘야 하는데 지구당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고 했다. 정치 이론의 고전이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이기는 건 쉽지 않다. 지역에선 더 그렇다. 어찌 됐든 그 사람의 슬로건과 공약은 내 작품이다.
이론보다 분석
앞서 말했듯이 감독은 울산 장생포 토박이다. 몇 다리 건너면 시장 후보와도 연이 닿을 정도였다. 몇 해 전, 실제로 시장 후보 캠프에 들어간 감독의 선배가 우릴 찾아왔다. 영상을 만들건 데 메시지 전략을 짜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일의 금액도, 결제 기일도 없다. 당선이 되어야 그 모든 것이 생기는 것이고, 그 선배조차 그 후보와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지 그 스스로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면 자기만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론적으론, 그렇다.
여하간, 선배의 부탁이니 감독은 내게 부탁했고, 난 여러 여론 조사 자료와 보도 자료, 선거 예측 기사를 분석해서 소위 후보들의 장단점을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선거 전략과 메시지, 그에 맞는 영상 시놉시스를 써서 건넸다. 그러다 며칠 후, 그 선배가 서울의 정치 광고 전문 회사의 컨설팅 자료라면서, 그러나 인쇄물로 준 데다 들고나갈 수 없어서 자신이 사진을 찍어 왔다면서 파워 포인트 이미지를 몇 개 보여줬다. 별 거 없었다. 정치 광고 이론이라는 것이 뭐 엄청 대단한 변화가 있어 왔던 것도 아니고 조사와 분석 방법만 좀 세련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세세히 들여다봤지만 서울의 어지간한 광고홍보학과 3, 4학년 정도면 쓸 수 있는 수준의 보고서였다.
승리를 부르는 메시지
사실 지역의 선거 메시지를 보고 있으면 좀 어려운 거 아닌가 하는 쪽이 대체로 지는 것 같다. 부산도, 울산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시장이나 구청장 정도 되면, 결국엔 중앙 정치의 흐름으로 판가름 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지는 쪽은 좀 복잡한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부산도, 울산, 경남도 마찬가지인데, 지역마다 대졸자의 비율도, 유권자의 연령 구성도 다르다. 젊은 사람이 많다고 진보 정치인이 유리하지도 않고 그 반대라고 보수 정치인이 유리한 것도 아닌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대졸자의 비율, 지역의 산업 구성, 신도시의 유무, 이에 따른 메시지의 선택이 당락을 결정한다.
결국 정치 광고는 단순하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 유권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소위 포퓰리즘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 것이다. 메니페스토 운동을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 그 말뜻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정치 뉴스는 복잡하지만, 정치의 승패는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부분에서 결정 나고, 그 단순하고 사소한 부분은 더 직관적이고 말초적인 메시지로 표현된다. 그것이 내가 했던 일이다.
어공이 아닌 늘공
이번 지방 선거 결과를 보고, 우리 일이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었다. 단체장이 바뀌면 종종 그 단체장과 인연이 있는 회사가 시청이나 구청의 일을 독점하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엔 계약 부서에서 적절히 태클을 걸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린 어차피 어공, 즉 어쩌다 공무원이 아니라 늘공, 즉 늘 공무원인 사람과 일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