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요 근래 “을질”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일을 준 고객이 오히려 우리의 눈치를 보는듯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일을 주고 돈을 지불하는 고객이 무슨 눈치를 보겠는가. 그저 자신들의 예산과 우리의 스케줄을 두고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우리의 의견을 담담히 제시할만한 위치에 다다랐음을 자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기업도, 재주도 수도권에 몰리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지방에는 믿을만한 기업이 없다. 그러나 지방은 지방대로 관내 기업을 살려보겠다고 어지간한 일은 관내 기업에 맡기려 한다. 광역시도는 물론이고 시군구와 같은 기초단체도 그런 기조가 있다. 심지어는 광역/기초 의회가 나서서 관련 조례를 만들기도 한다. 지역의 구의회 일로 사무처를 오가다 보면 종종 행정 감사 중계 영상을 보곤 하는데, 그때 의원들의 주요 질의 내용 중 하나도 관내 기업에게 이 일을 왜 안 맡겼냐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지방에는 믿을만한 기업이 없다. 제조업의 경우엔 본청에서 몇 차 하청까지 그 위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어떤 기업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고, 또 관련 기업들의 모임이나 조직도 잘 정비되어 있어서 전화 몇 통이면 그 기업의 실력과 평판을 알아내는 건 그 다지 어렵지 않다.
평판이 쌓이는 시간
문제는 우리와 같은 기업이다. 사원수도 거의 없다. 홈페이지엔 포트폴리오만 잔뜩 있고 대내외적 수상 경력도, 감독과 카피라이터/작가의 학력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리뿐만 아니라 지역의 동종 업계가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나 포트폴리오를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지만, 우스갯소리로 하나의 광고가 히트하면 그 광고를 만들었다는 사람이 백 명이 있고, 하나의 광고가 실패하면 만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광고나 영상의 생산 주체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결과가 좋았던 광고나 영상을 발주한 기업이나 부서에게 전화를 해 그걸 누가 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일종의 평판 확인이다.
과거 우리 선배들은 룸쌀롱 영업을 했다. 접대를 기반으로 일을 따온 뒤 그 결과물은 대충 해서 넘기는 식으로 일을 해 왔던 것이다. 형식적으로라도 경쟁 PT가 필요하면 내정된 회사에게 다른 회사 몇 개를 추천받아서 전화를 돌려 PT에 들어와 달라고 한다. 대부분, 준비할 시간이 촉박하다. 그때 이미 들러리 PT라는 것이 감이 오지만 일 한 건이 아쉬운 대행사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을 새워 준비를 해서 들어간다. 그러나 발표장에 들어가면 대번에 알게 된다. 우리도 최근에 그런 경우를 겪었었고.
거기 일 잘한다는 소문
평판 관리는 룸쌀롱 영업보다 오래 걸린다. 그만큼 인내심이 필요하다. 일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데드 라인에 임박해서, 심지어 그 날도 한참 지나친 뒤 여기저기서 동냥 해 온 자료화면을 대충 때려 넣어 만든 영상을 결과물이랍시고 휙 던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일의 과정을 고객과 공유해야 한다. 기획-시놉시스-시나리오-수정-시나리오 2-제작 스케줄 확정-촬영-편집-CG-녹음, 이 모든 과정에 대해 사전에 공개하고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고객에게 알려 고객을 안심시켜야 한다. 또, 이를 바탕으로 현재 작업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 고객이 체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데드라인을 맞추는 건 기본이다. 어지간한 요구는 들어줘야 한다. 사후 수정 사항이 발생하면 상식적인 비용 선에서 해줘야 한다.
공무원들은 빠르면 6개월, 길어도 1년에 한 번 정도 부서 이동을 한다. 비슷한 성격의 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낯선 분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당연히 전임자의 결과물을 기반으로 일을 추진한다. 아니면 전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한다. "거기 일 잘합니다." 이 한마디가 시청과 구청, 지역 전체에 퍼지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일단 퍼지면, 그 말이 계속 돌고 돈다는 것은 안다. 감독의 전성기는 그 시간 뒤에 열렸다.
하나의 일, 열 개의 파일
2008년, 가장 혹독한 일을 했었다. 그 일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알려면 파일의 개수를 세어보면 된다. 이 일의 파일은 열 개다. 시나리오 파일명에 날짜를 표시해 헛갈리지 않도록 했다. 그만큼 수정을 많이 했다는 의미다. 이 기업은 에너지 기업이다. 감독과 내가 이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부에 들어간 것이 이 해 1월이었는데 마지막 파일의 날짜는 9월 9일로 되어 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후반 작업이 끝난 뒤에도, 심지어 녹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수정 사항이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은 간단했다. 이 기업이 공원 하나를 만들어서 지역 사회에 기증했는데 그 내용과 의미에 관한 홍보 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를 몇 개 열어보니 내용이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여름 전까지는 공원 설명이 주였는데 그 후에는 사회공헌사업이 추가됐고, 오너의 철학도 추가됐다. 관련 부서마다 토를 달았는지 시나리오 본론의 내용도 점점 증가된다. 애초에 공원에 관한 내용으로 출발한 시나리오가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까지, 심지어 미래 비전으로까지 확장된다.
결정이 쉽지 않다.
최근에도 이런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지역의 기초 의회 홍보 영상 건이었는데 과거의 것보다 세련되고 참신하게 해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의장이 우리를 직접 불러 의견을 주고받고 싶어 해서 그런 시간도 가졌다. 이를 바탕으로 초안을 써서 줬다. 감감무소식. 그러다 가을에 정치적 알력 때문인지, 여하간 의장이 바뀌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재촬영이 필요해졌다. 의원 간에 시나리오 오프닝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 결국 감독과 내가 들어가서 세부 사항을 마무리하고 제작에 들어갔고, 현재 제작 중이다.
대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광역시든 기초단체든 일을 해보면 비슷한 현상을 겪는다. 담당자의 성격이 확실하면 책임은 그 선에서 끝난다. 부서의 성격이 좀 유연하거나 담당자의 재량이 많은 부서나 기업의 경우가 이런 경우다. 반면 담당자의 성격이 우유부단하거나 조직이 상명하복 스타일로 움직이는 경우엔 시나리오 단계부터 결제와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 선이 가장 윗선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됐든, 우리는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전성기를 맞은 감독
올 한 해, 두 건의 일을 남겨 놓고 있다. 만나면 “어제 잠 좀 잤어요?”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할 정도로 바쁜 몇 해를 보내고 있다. 요즘엔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들어가서 쉬게 하려고 태화강역까지 데려다준다는 감독의 배려를 물리치고 버스를 타고, 근처에 일이 끝났으면 걸어서 간 적도 많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하나의 일에도 완벽을 추구하며 버틴 세월 끝에 마주한 분주함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몫은 별로 없다. 영광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우연히 내가 합승했을 뿐. 감독이나 나나 호들갑 떠는 성격도, 사투리로 표현하면 "깔롱대는" 성격도 아니어서 담담하게 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가끔 술자리를 갖게 되면 과거를 돌아볼 뿐이다. 올 해엔 바쁜 탓에, 딱 두 번 있었다. 마지막 한 번은 아마도 12월, 어느 주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