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까지 담고 싶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11

by 최영훈

한 해의 피날레

올해 마지막 프로젝트는 울산시립예술단 일이다. 시립예술단엔 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 시립무용단이 속해 있다. 이 세 단체가 시립예술단이라는 이름 아래 활동하는 산하 단체라는 것을, 더 나아가 지역의 문화 예술 발전과 저변 확대라는 공통된 목적을 갖고 활동하는 시립예술단이라는 것을 시민에게, 더 나아가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콘텐츠들을 기획, 제작하고 있다.


세 가지 공연 모두,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다. 부산문화예술회관 바로 밑에 살면서도 클래식 음악 공연은 물론이고 합창, 무용 공연도 거의 안 간다. 연말에 아내가 속한 학회나 단체에 제공되는 공연이 아니면 무대 공연을 거의 찾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땐 음악깨나 듣고 안다는 소리도 들었고 음대 다니는 친구들도 많았고 밴드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선택받는 직업이다. 담배를 안 피워도 담배 광고가 들어올 때가 있고 술을 안 마셔도 술 광고가 들어올 때가 있다. 골프를 안 치고 운전을 안 해도 관련 광고가 들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공연 광고를 찍어내기

2004년 여름에 이직을 한 회사에선 인포머셜과 공연 광고를 주로 담당했다. 대표의 대학 선배가 시민회관 관계자였는데 그를 통해 공연 광고 의뢰가 많이 들어왔다. 몇 개 안 남은 카피라도 그 목록을 대충 훑어봐도 다양하다. 뮤지컬 코미디 넌센스, 가족 뮤지컬 강아지똥, 가족뮤지컬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루마 드라마 콘서트 Farewell 2004, 어린이 재즈 뮤지컬 앨리스 앨리스, 연극 ART, 키예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등이 있다. 아마 이것보다 두 세 배 많이 했을 것이다.


공연 광고는 보통 라디오 스팟과 TV 스팟을 같이 한다. 그래서 공연의 성격과 감성은 물론이고 장소, 일시, 출연진과 같은 정보를 제법 긴 멘트 안에 욱여넣어야 한다. 보통 30초나 40초 스팟이니 대략 130에서 140글자 정도가 원만하다. 40 초라면, 물론 최대 2백 자 넘게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지만 중간중간 공연 하이라이트 장면도 나가야 하고 오프닝에 음악도 좀 흘러야 하고, 타이틀도 멋있게 나올 시간이 있어야 하니 좀 여유를 주는 것이 좋다.

보통 공연 스팟을 의뢰하면 기본 정보만 제공된다. 그야말로 브로슈어 한 개만 던져 줄 때도 있고, 그도 아니면 보도 자료만 보내줄 때도 있다. 그 공연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 자료만 보고 상상해서 써야 한다. 그나마 클래식 공연이나 알만한 공연 광고는 괜찮은데, 창작 공연은 난감하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일 년 가까이 준비한 공연을 드디어 무대에 올리는 데 이렇게 부실한 정보만으로 공연 스팟을 만든다는 건 예술가와 관객 모두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예술가들을 사전에 직접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공연이 거의 임박해서야 이런 의뢰가 들어오니 데드 라인에 맞춰 써 줄 수밖에 없었다.


열정까지 담고 싶다.

나랑 일한 지 15년이 넘은 감독은 울산문화예술회관의 공연 광고를 오랫동안 해 왔다. 특히 클래식 공연을 주로 해 왔는데 그쪽에서 출연진, 공연 정보, 음악, 멘트까지 보내준다. 견적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서로 오랫동안 믿음으로 일해 온 사이고, 일이 없어 어려울 때 꾸준히 일거리를 준 감사함이 있는 감독은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준다. 그 덕분에 울산에 공연차 온 서울의 한 예술단체가 호텔에서 공연 광고를 보고 누가 만들었는지 예술회관 담당자들에게 물어본 뒤, 자신들의 공연 광고를 의뢰한 적도 있다. 내 기억으로는 포스터 한 장을 오브제 삼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줬었다. 전화기 너머로 감사를 전하는 담당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립예술단 홍보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담당자들과 많은 미팅을 했다. 저번 주엔 카피와 콘티, 즉 시안을 만들어 가서 보며, 미팅을 했다. 나쁘지 않은 시안이었지만 임팩트가 약했다. 그 시안을 덮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 캠페인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 마음과 의도에 공감한 다른 담당자가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예술과 예술단, 단원들에 대해 두어 시간 대화를 했다.

그날 집에 가는 길, 동해선 안에서 카피의 초안을 메모했다. 일주일 정도 묵혀 놨다가 월요일에 꺼내 보고, 단숨에 써버렸다. 그 시안을 감독에게 보냈더니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별 말이 없었다. 수요일에 작업실에 나가서 영상 표현 전략에 대해 긴 토론을 했다. 그렇게 세부적으로 완성된 콘티를 놓고, 그날 늦은 오후 예술단 담당자와 다시 미팅을 했다. 담당자도 오케이 했다. 카피를... 아주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이제 감독의 시간이 시작됐다. 감독은 이 영상을 위해 새로운 장비를 사러 서울에 갔다 온다고 한다.

깊이에 대한 고민

요즘엔 깊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상투적으로 Depth라는 말로 퉁 쳐버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한다. 직접 현장에도 자주 가 본다. 어제도 예술회관 백 스테이지를 또, 잠시 둘러봤다. 기업이 됐든 예술단이 됐든 그 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들을 세상에 소개하고 싶다. 열정이 담긴 공연을, 그들이 몸 담은 예술단을 소개하는 영상을 피상적인 정보만 훑어보고 만들고 싶지 않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의 열정과 노력까지 담아내고 싶은 욕심이다. 나이가 들 수록, 쓰는 카피보다 버리는 카피가 더 많아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