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7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가끔 홈쇼핑 채널을 스캔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시장의 흐름도 알고, 쇼핑 호스트의 유려한 멘트에 감탄도 하면서 말이다. 1월 1일, 홈쇼핑에선 새로운 마음, 새로운 다짐으로 새로운 모양새로 살아보시라고 응원(?)하며 관련 상품(?)을 팔았다.
오전에 본 건 건강식품, 오후엔 화장품, 늦은 오후엔 러닝머신 렌털, 저녁엔 여행 상품, 뉴스 할 때쯤엔 안마 의자와 안마기, 다시 여행 상품, 건강식품... 심지어 어제저녁 같은 시간대엔 소위 4대 메이저 홈쇼핑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홈쇼핑 채널에서 여행 상품을 팔았다. 북유럽, 베트남, 미국 서부 등등. 뭐, 놀랍지도 않다. 믿기 어렵겠지만 케이블 TV를 통해 최초로 통신 판매 된 상품은 단체 여행이었으니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활동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선입견 때문에 독서를 좋아한다고 그러면 두꺼운 안경을 낀 병약한 중년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과 취미 얘기 끝에 독서가 취미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노파심에 미리 말해두는데 난 한 때 철인 3종 경기를 꿈꿨던 마라토너이자 사이클 동호인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저 가벼운 맨 몸 근육 운동과 수영으로 체력을 유지할 뿐이지만.
아내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여행은 회식과 같다. 얼마나 많이 마시는가로 꼰대들의 회식의 질이 판가름 났건 것처럼, 한국인의 여행 또한 얼마나 바삐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는가로 결정된다. 소위 MZ 세대는 좀 달라진 것 같지만 SNS 덕분에 그 윗세대보다 더 해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여행지에서의 야한 순간도 올리는 이도 있으니...
과거, 여행의 목적이 뜨거운 밤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배가 끊기고 막차가 끊기는 걸 핑계로 그렇게 함께 진도의 마지막 챕터를 함께 뛰어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다들 자차로 움직이니 그런 핑곗거리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목적 안에 분명 그것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다시 말하지만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지난 20여 년 간 꾸준히 여행을 다녔지만 내가 좋아서 먼저 가자고 한 여행은 없다. 여행지에서의 후끈한 기억도 없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더 여행을 싫어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연애 시절을 포함해서 작년까지 그런 사건이 없다. 한 때, 그런 기대를 품고 따라 간 적도 있지만, 몇 년 뒤엔 그런 기대조차 접었다.
아이가 여행에 동행한 뒤로는 더 그렇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낭만적인 삿포로의 그 세련된 부티크 호텔에서도, 산토리니와 미코노스의 그 멋진 바다를 앞에 둔 호텔에서도, 트램이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던 홍콩의 고풍스러운 호텔에서도, 제주도의... 그만하자.
해가 뜨자마자 조식을 먹고 튀어나가 해가 지고 저녁까지 먹고 밤 뉴스할 때쯤에나 숙소에 들어오는 하드 코어, 홈쇼핑 단체 여행 스타일의 여행 일정을 소화하면 그 어떤 고급 호텔도 숙소에 불과하다. 게다가 열 시면 잠자리에 드는 일상의 아내는 여행지에서도 쉬지 않고 다닌 덕분에 더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게임의 퀘스트 완수하듯이, 끝판왕을 만나기 위해 켠 김에 모든 스테이지를 깨려는 게이머처럼 여행을 하면 섹스를 할 체력도 여력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내가 그 밤의 호텔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맥주를 처마시는 일 밖에 없었다. 돌아보니 매 여행이 똑같은 패턴이었다. 아이를 동반한 뒤로는 더 일찍 자는 데다가 그럴 공간도 여유도 없으니 그야말로 짐꾼이자 술꾼으로 동반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의 통계를 보면, 한국 성인은 국내 여행을 십 여 차례 갔고, 평균 13일 정도를 여행에 썼다. 해외 여행객의 경우 평균 네다섯 번 해외로 나갔고 열흘 가량 해외에 머물렀다. 참고로 일 년에 열 번가량 섹스를 하는 부부,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 미만 섹스하는 부부를 섹스리스라고 한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우리나라 부부의 36퍼센트가 이 섹스리스 부부이니 아니라고 뻥친 부부, 사실혼 관계의 부부까지 포함하면 대충 열 쌍 중 여섯 쌍은 섹스를 휴업 중이지 않을까? 일 년 중 배우자와 섹스하는 횟수보다 자기 집의 침대를 벗어나 밖을 떠도는 날이 더 많은 성인들이 사는 나라가 정상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을 하다가, 또는 SNS를 하다가 애인과 여행 간 사진, 그것도 풀빌라 같은 곳에서 둘이 수영복만 입고 있는 사진을 올리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어째 제대로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무슨 산티아고의 순례길이니 국토 순례니 해맞이니 템플 스테이보다 더 제대로 된 여행이라는 느낌이다. 어찌 됐든 세계 꼴찌인 섹스리스 순위를 어떻게든 위로 올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 커플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물론, 여행에서의 경험과 자극을 통해 새로운 나를 만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응... 그런 사람들 덕분에 정초부터 그렇게 열심히 홈쇼핑에서 여행 상품을 파는 것이다. 그런 원대한 착각을 가진 소비자 덕분에. 사람은 해가 바뀌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결심으로 달라진다. 니체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나를 낳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멋진 여행지에서의 자극과 견문으로 새로워진다면, 그런 인간은 유아에 불과하다.
그럴 돈이 있으면 괜찮은 파트너와 썩 괜찮은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게 낫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야말로 새롭게 되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정성 들여 세팅하고 멋진 밤을 보내라. 낯선 사람과 뒤섞여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모나리자를 보겠다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까치발 따위나 하지 말고.
이렇게 독설을 퍼부었지만... 또 여행을 가야 한다. 정초부터. 애가 방학을 했으니. 이번에 거구의 처남까지 끌고. 뭐... 술이나 마시겠지. 아니, 아니지 어떻게 만든 수영 체력과 몸매인데. 이번엔 최대한 덜 마시고 와야지.
2023. 0102
아내의 면세품 쇼핑 때문에 1박 2일로 후쿠오카에 갔다 왔다.
이 평범한 도시에 잔뜩 몰려온 동남아, 중국, 한국 등지의 관광객들을 보면서, 어쩌면 섹스와 여행은 서로 닮은꼴로 서로의 결핍을 보완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첫 경험은 어찌 됐든 기억된다.
-첫 여행이든, 첫 섹스든 그것이 좋든 나쁘든 기억이 된다. 그래서 나쁜 경우는 말 안 하거나 포장하고... 좋은 경우는 더 과대포장하여 말한다. 그리고 때론 그 첫 경험과 기억이 그것에 대한 호감을 결정한다. 즉 첫 여행이 좋았던 사람은 여행을 계속 가고 더 즐기듯이 섹스도 마찬가지...
2. 다들 좋은 것만 얘기한다.
-여행 얘기를 하면서, 또 블로그나 SNS에 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다들 좋은 것만 얘기한다. 어느 누구도 인스타그램에 비행기 탑승 수속을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진 따위를 올리지는 않는다. 일본이나 홍콩의 낯선 지하철을 타면서 헤매는 모습을 올리지도 않는다. 일본에서 종종 보는 의외로 좁은 호텔의 욕실 사진도 올리지 않는다.
섹스도 마찬가지. 파트너의 뱃살, 정리되지 않은 털, 빨리 끝나버린 사정, 오르가슴 없는 절정, 팔뚝 살. 이런 것들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는다.
3. 다들 좋아하고 하고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번 비행기에는 난생처음 해외여행 가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냥 보면 안다. 다들 국내외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또 다들 여행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안 좋아하는 사람,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걸 표현하지 않고 또 딱히 블로그나 SNS에 올리지 않아서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심지어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여행에 관해서라면 안 좋아하는 사람 축이다. 즉 싫어하진 않지만 반기지도 않는...
섹스도 마찬가지. 다들 하고 사는 것 같지만 알다시피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여행 상품만큼 포르노의 종류도 많은 것일지도....
4. 안 하던 짓도 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호텔 조식 같은 거... 아침을 거하게 먹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호텔 조식은 먹게 된다. 심지어 미소 시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일본식 아침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안 하던 짓이 어디 호텔 조식뿐이랴... 단체 관광이면 밤마다 옆 방 사람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안 하던 쇼핑도 하게 된다. 유적이니 절이니 성이니 박물관이니 평소엔 전혀 안 가고 관심 없던 사람도 가게 된다.
루브르에 사람 몰리는 거 봐라... 그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 자기 지역의 미술관엔 한 번도 안 가봤을 것이다. 내가 부산시립미술관을 지하철 역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부산시민, 최소한 남구 구민들이 주말마다 박물관을 찾는다면 내가 갈 때처럼 늘 한가할 수가 없다.
섹스도 마찬가지... 낯선 곳, 낯선 사람과 하게 되면 안 하던 체위, 안 하던 장소, 안 하던 행위도 하게 된다. 일종의 일상의 금기가 잠시 해제되는 것.... 그러나 우리 동네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내 애인이나 아내에게도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경험의 영역이 남아 있을지도.
5. 과하게 움직이게 된다.
-한 두 블록 정도는 당연히 걷는 거라고 생각한다. 걸어서 십 분 거리면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하철 한 코스 정도는 당연히 걸어서 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내 말처럼 여행이나 나와야 만보를 간신히 채운다. 여자들은 친구끼리 오면 자기 짐은 자기가 들어야 하니 운동량이 더 많아진다.
섹스도 마찬가지. 현대인의 비만의 주범이 섹스리스가 아닌 가 싶을 정도.. 물론 비만이 섹스리스의 주범이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섹스리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어서 비만이 더 된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 섹스라도 하면 심폐기능 향상, 각종 근육 활성화, 피부 노화 방지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여자들이 남자 애인이나 남편이랑 가면 남자들이 주로 짐을 든다는 것...
그래서 여행에서 더 운동효과를 보려면 여자들이 캐리어를 끌고 쇼핑 비닐을 들고 대포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지도..섹스도 마찬가지. 남자는 뭔가 열심히 하는데 여자가 목석 같이 가만히 있다면 섹스가 운동이 될 리 만무. 남자를 가만히 두고 여자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운동효과가 더 좋지 않을까?
6. 다 가봤다고 말할 수 없다.
-세계 일주를 했다고 말한 사람조차 지구의 모든 곳을 가볼 순 없다. 언제나 미지의 공간은 남아 있으니까. 하물며 기항지를 중심으로 여행하는 평범한 여행자들에겐 더 낯선 도시가 많은 건 당연하거. 그러니 어디 가서 여행 갈 데가 없다고 자랑하는 건 무의미하다. 심지어 같은 도시를 서너 번 가도 언제나 새로운 곳은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후쿠오카 같이 심심한 도시에서도 난 "어!"하고 놀란 적이 있다. 90년대 단종 됐다고 생각한 소니의 노란색 워크맨 스포츠 시리즈를 종류별로 파는 레트로 편집샵을 발견했다. 빅 카메라가 같은 거대한 쇼핑센터가 아니라 진짜 길가의 작은 옷가게 같은 곳이었다.
섹스도 마찬가지.... 늘 하던 파트너에게도 미지의 영역이 있고 숨겨진 능력이 있다. 그걸 다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건 섹스 여행자의 공부 부족일지도. 우리가 여행지에 대해서 공부하듯이 섹스 파트너에 대해 공부하면 매일 오르가슴 느끼는 건 일이 아닐지도. 또 웬만큼 해봤다고 하는 사람도, 웬만한 별별 년놈하고 다 자봤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존재는 늘 있기 마련. 솔직히 스웨덴 축구 대표팀의 수비수 같은 남자나 르브론 제임스 같은 남자하고 자보긴 어렵지 않나?
7. 새로운 걸 꿈꾸지만 사람 사는 거 별거 없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밤에 한잔하다. 맑으면 빨래 널고 비 오면 걷는다. 비 오면 우산 쓰고, 심하다 싶으면 스타벅스로 피신하다. 이번 주중... 후쿠오카를 비롯해서 북규슈에 폭우가 내렸을 때 사람들은 텐진 지하상가에 바글댔다. 여행자나 현지인이나 다들 같은 마음. 스타벅스에 바글바글....
섹스도 마찬가지. 낯선 곳에서 낯선 남자나 여자랑 하면 정말 새로운 차원의 섹스를 할 것 같지만 비슷하다. 태엽 감는 새에서 주인공이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실제로도 가슴이 넷 있는 여자는 없다. 최소한 현실 세계에선 말이다. 엉덩이는 두쪽 나 있고 페니스는 앞에 달려 있으며 흥분하면 발기된다. 사람 사는 동네의 섹스 메커니즘은 거기서 거기. 그러니 일상에서 섹스를 잘하는 사람이 여행지에서도 잘하기 마련이고, 일상에서 섹스 숙맥은 여행지에서도 숙맥이기 마련. 물론 간혹 가다 극적인 사랑과 섹스를 하기도 하지만 그게 화제가 되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건 그만큼 드물다는 것.
그러니 새로운 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 내가 후쿠오카의 어느 이름 모를 골목에서 이미 단종된 소니의 노란색 워크맨 스포츠 시리즈를 발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난 아직도 소니의 워크맨을 두 개나 갖고 있다. 물론 카세트테이프도 잔뜩 있고...
돈키호테에서 8도, 9도가 되는 맥주를 사서 마셔봤다. 어차피 취하면 다 똑같다. 오히려 항공사 라운지에서 마신 평범한 라거 맥주가 더 맛있었다. "아.. 아사히가 이렇게 맛있었나?" 아내에게 말할 정도...
아마도 공항에서의 공짜 낮술이었기 때문일지도. 존재는 그대로이지만 내가 변하면, 상황이 변하면...
여행이든, 섹스든... 언제든 특별해질 수 있다.
2018.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