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이따위 글이나 쓰고 있는데, 또 이따위 글이나 쓰며 보내면 또 어떤가 싶어서 한 삼십 분 정도 간단히 운동을 하고 이러고 있다. 앞에 글과 이어지는 글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사람은, 상투적인 말로 백인백색이다. 연애경험도 별로 없고 위험한 모험을 한 적도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을 견딘 후 쉰을 맞아보니 그렇다. 특히 세상에 모든 여자가 다 다르다는 건 삼십 대 쯤 안 것 같다.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맞추라는 것도, 맞추려는 것도 시간 낭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스타일대로만 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데이트든 섹스든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반복하려 한다. 자기 스타일에 맞는 사람을 찾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트러블이 생긴다.
부부로 살 것도 아닌 남녀가 데이트할 때부터 이것저것 맞추며 할 필요가 있나? 시간 낭비다. 심지어 부부로 살아도 맞지 않는 건 맞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입맛 같은 건 맞는 부분과 안 맞는 부분이 공존한다. 그래서 요즘엔 족발도 따족/불족 반반이 있는 것이고, 치킨도 반반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맞춰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연애할 때, 맞지 않는 사람에게 맞추려 하는 건 시간 낭비다.
도망가는 것도 낭비다.
그러나 맞지 않는다고 도망가는 것 또한 인생의 낭비다. 앞서 말했듯이 경험하지 않으면 내가 모르던 나를 만날 수 없으니까.
과거의 경험으로 새로운 사람과 현상을 해석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새날과 새사람, 새 사건을 맞이하는 사람을 요즘 친구들은 꼰대라고 부른다. 나이를 불문하고 꼰대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헤어진 연인을 기준으로 지금 마주한 연인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것이 바로 꼰대들이 하는 짓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그런 멘트를 새로운 사랑 앞에서 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론 못하겠지만...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 준 사람에게
이 정도 나이되면 날 사랑해줬던 여인들에게 깊은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사랑해줬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엄청난 모험을 했다는 건 분명하다. 아마 그녀들도 이게 진짜 나인가? 하고 놀랐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일상에서의 그녀와 내 품에 안겼을 때의 그녀가 너무 달라 놀란 적은 없다. 오히려 감격했다. 내가 하나의 스위치를 찾았구나 하는, 그녀가 이 나이 먹도록 몰랐던 어떤 스위치를 찾아줬구나 하는 뿌듯함이 있었다.
아마 그녀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밖에선 그렇게 까칠해 보이더니 벗겨놓으니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했을 것이다. 더불어 이 놈을 이렇게 만들 정도면, 나, 어쩌면 무지하게 섹시하고 화끈한 거 아닐까? 이 쪽에 소질이 있는 건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직 나만의 미친 X.
그러나 그녀도, 나도 알아야 할 건, 우리가 서로를 자유롭게 놔뒀기에 그 모든 낯선 나의 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녀 안의 “그녀”, 내 안의 “미친놈”은, 그렇게 그녀와 날, 과거의 경험으로 재단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고 내 스타일대로 만들지 않으려 했기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말 중요한 건, 그렇게 침대에서 미친놈과 미친년이 되는 걸 본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껴줬다는 점이다. 날 위해 과거의 자신을 기꺼이 부숴버리고 오직 나만의 미친 X가 되어버린 연인에게, 오히려 감사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올 새로운 나
이 육체적인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라캉의 전문가인 백상현 작가는 “주체는 미래에서 도래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상처와 경험, 욕망으로 똘똘 뭉친 과거와 오늘의 주체로는 미래에 도래하는 사랑을, 미지의 경험을 할 수 없다. 또 이를 통해 변화할, 새롭게 태어날 나를 만날 수도 없다.
뒤에 이어질 몇 년 전 이야기는 한 남자의 루틴, 또는 징크스에 관한 이야기다. 참고로 남자는 충남의 한 사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사춘기 시절부터 삼십 대 중반까지 교회를 다녔기에,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가능성과 지평을 제한하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그 남자의 아내의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애와 섹스, 결혼이라는 세계는 결코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세계고 그 낯선 세계로 가는 문은 두 사람의 용기로만 열리는 것이니까.
2022.12.31.
그 남편의 징크스
사실 징크스나 루틴은 그걸 지키면 잘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이번 얘기하고는 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이건 어제 들은 얘기다.
아내 사무실에 유부녀 셋만 있다. 그중 한 명은 작년 12월 결혼한 그야말로 따끈한 신혼. 한 명은 2,3년 된 그래도 신혼... 그런데 다들 아줌마가 되고 보니 이야기의 주제가 거침없는 듯...
어제는 그래도 신혼인 부부인 직원이 불임 시술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불임 부부의 시도를 가상히 여겨 두 달간 임신을 위한 휴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아내의 회사도 제법 큰 편이라 이런 제도가 있는 모양... 그래서 가을에 받기로 한 듯...
"가을에 휴가를 받으면 좀 열심히 노력해 보려고요."
이런 직원의 말에 아내가 툭 한마디 던졌다.
"뭘 어떻게 노력할 건데?"
이런 대사를 남자 상사가 던지면 민감한데 여자들끼리는 빵 터지는 대사였던 모양..
그 덕분에 남편의 루틴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이 직원의 남편은 그다지 섹스에 관심 없는 충청도 양반인데, 이분에게는 또 결정적 루틴이 있었으니 바로 집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 그것도 아마 안방 침대가 아니면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소위 아주 클래식한 정상위만으로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뭔 소리야? 그럼 둘이 여행도 안 갔다 왔단 말이야?”
“여행은 갔다 왔지.”
“그럼 여행지에서는... 그러니까 호텔에서는 그냥 잠만 잔 거야?”
“그렇겠지?”
그야말로 애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면, 여자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흥분이 잘 되는 장소로, 좀 로맨틱한 곳, 예를 들어 호텔, 모텔, 경치 좋은 휴양지의 펜션 정도는 섭외하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 아닐까? 집에서 노상 그것만 해대면 그야말로 번식 행위로만 느껴지지 않겠나? 그런데 남편은 집을 떠나면 전혀 몸이 말을 안 듣는다니...
더 난감한 징크스는?
어젯밤에 이 얘기를 들으며 어떤 게 더 난감한 루틴인지 생각해 봤다.
"보자. 같은 남자 입장에서 어떤 게 더 희한한 습관인가."
난 아내를 보며 고민했다. 장소를 바꾸면 안 된다는 거. 뭐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 떠나면 잠 못 자는 사람도 있으니, 같은 생리작용의 맥락에서 안 될 수도 있다 싶었다. 뭐 심지어 집 밖에서 대소변도 안 하는 병적인 사람도 있다고 하니. 또 일 년 중 집 밖에서 자는 날이 몇 날이나 되겠나 싶어서 그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히려 딴 여자와 바람을 못 필 장애로 작용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러니 오히려 한 체위만 고집하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겠다 싶다. 늘 같은 사람하고 하면 최소한 방법은 좀 다양해야 되지 않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집 안에서라도 이곳저곳에서 하는 게 좀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 그렇게 상황과 장소에 변화를 주면 당연히 그에 따라 체위도 변칙적일 테고.
이렇게 루틴과 징크스가 많아서야
그런데 이 흥분이라는 게 흥분이 예상돼서 몸이 반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너무 반복되면 소위 역치라고 해서 몸이 둔감해지게 된다. 그러니까 섹스의 기승전결이 매번 똑같다면 아내 입장에서는 매일 똑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기분 아닐까?
여기에 항상 잠 자기 전에만 그걸 고집하는 남편-이 사람은 그랬다-이라면 그야말로 상대 패를 다 보고 치는 고스톱같이 시시한 것. 가끔은 깜빡이 안 키고 들어가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훅 치고 들어가는 맛이 있어야 부부 간에라도 신선함이 유지될 텐데 이렇게 안팎으로 루틴이 많아서야.
이렇게 대놓고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이 그래도 신혼인 직원의 남편에 대한 불만은 서서히 만 땅을 채워가는 듯한데, 조만간 남편의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뭐 남에 집 사정이라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가끔은 아내 사무실에서 보는 얼굴이니 은근히 걱정된다. 이것도 아저씨의 오지랖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