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A반으로 옮긴 지 이제 두 달쯤 됐다. 수영의 속도와 운동의 양, 모두 적응하고 있다. 전날 과음만 안 했다면 따라가는데 무리는 없다. 한 라운드는 보통 서너 세트로 구성되는데, 예를 들어 배영 50미터 네 세트가 한 라운드로 구성되는 식이다.
저번 달만 해도 이 중 한 세트는 쉬었다. 그런데 수영이 끝나면 분명 체력이 남았다. 작은 풀에서 자세를 자체 교정할 여유가 있을 만큼. 그렇다면 힘들었던 순간이 진짜 힘든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발을 하는 수요일엔 한 세트도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체력이 된다는 것. 그다음부턴 영법을 바꿔서라도 모든 세트, 모든 라운드를 소화하려고 한다.
괜찮은 3번
해가 바뀌면서 여러 계획들은 세우겠다만, 나 같은 경우엔 특별한 계획이 없다. 작년보다 더 많이 책을 읽고 - 욕심 같아선 세 자리 숫자를 채워보고 싶다. - 술을 좀 줄이고 열한 시, 마스터 A반의 괜찮은 3번이 되기로 마음먹은 정도다.
파레토의 법칙은 어디서든 통용된다. 상위 20퍼센트가 시장의 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 반에서 성적이 좋은 애들, A 이상을 받는 애들은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다. 사실 요즘엔 이 법칙이 더 극악해져서 OTT의 경우 넷플릭스의 점유율은 4,50퍼센트 정도지만 오리지널 콘텐츠 시청시간 점유율은 70퍼센트가 넘는다. 나머지 업체의 점유율을 다 합쳐야 겨우 넷플릭스와 견줄 수 있다.
수영장이나 헬스장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간대든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두 사람 있다. 내가 하는 시간대의 마스터 A반의 1번, 2번이 그런 존재다. 현재로서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영법도 좋고 체력도 좋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그들에게 많이 뒤처지지 않는 3번 주자가 되는 것이다.
많이 나와야 예닐곱 명, 이때 3번은 뒤의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된다. 나보다 조금 늦은 그들은 1,2번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나 덕분에 약간의 숨을 돌리고 다음 세트에 참여할 수 있다. 결국 3번이 성실하게 수영장에 나오면 1,2번의 속도와 체력에 질려서 수영장에 나오길 꺼려하던 그 뒤의 번호들도 성실하게 나와 운동할 수 있다. 결국엔 모두의 체력도 실력도 올라가게 된다.
정초부터 다들 쉽지 않다.
업계 후배들의 소식을 여러 경로로 듣고 보고 있다. 다들 고군분투 중이다. 더 나은 영상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장비를 사들이고 교체하기도 한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새해를 맞았지만 일이 저절로 들어오지 않는다. 젊은 친구들은 관련 사이트나 SNS 홍보를 통해 일을 맡기도 하고 최선을 다한 결과에 만족한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생계를 위해서 일을 따러 다니고 어떤 일이든 들어오는 일은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도 쉽지 않다. 불황 속에서 작년에 계약했던 일이 정초부터 취소되기도 한다. 납품은 했는데 대금을 못 받기도 한다. 같이 일하는 업체나 협력 회사나 팀이 자기 맘 같지 않다. 자기만큼 성실하지도 않고 자기만큼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다. 혼자 애써서 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참고 가보겠다만, 어디 광고와 영상 일이 그런가. 정초부터 속앓이다.
삼류 카피라이터라는 말
연애시절,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끝내고 우연히 TV 모니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광고들이 주욱 나오고 있었다. 한 광고가 유독 거슬렸다. 혈기왕성했던 30대 초반의 카피라이터가 그냥 넘어갈 리 있겠나. 무심히 한마디 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여자 친구, 지금의 아내가 한마디 했다. “오빠, 저런 건 다 서울에서 만드는 거 아냐? 자긴 그냥 지방의 3류 카피라이터잖아. 그런 사람이 왜 잘 나가는 회사에서 만든 광고를 갖고 뭐라는 거야?”, 뒷이야기는 생략한다. 이때의 사건은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둘 다 철이 없었다고 결론을 짓고 마무리 짓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제법 오래갔다. 보시다시피 지금도 앙금이 남아 있다. 뒤끝 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오십이 너머 저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1류가 있으면 2류가 있고 3류가 있다. EPL에 빅 4가 있으면 중위권 팀이 있고 강등권 팀도 있다. 그러나 그 팀들 모두 나름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인생도, 일도 다 그런 거 아닐까?
눈에 보이는 1류
그렇다고 각 잡고 3류를 지향하라는 말이 아니다. 3등이나 4등을 노리라는 말도 아니다. 수영장은 투명하다. 1번의 속도와 나와의 거리, 2번의 속도와 나와의 거리가 가늠된다. 기초반이나 중급반 사람들은 물속이 제 집처럼 편해 보이는 마스터 반 사람들을 보며 자괴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제는 접영의 리듬을 익히겠다고 기초반 몇몇 사람들이 풀 밖으로 나와 벽을 잡고 접영 동작을 반복했다. 분명 민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민망하고 힘든 초급반과 중급반의 시간을 버텨내는 건 마스터반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하고 별반 다를 게 없다. 엄청난 근육질도 아니고 펠프스처럼 키가 큰 것도, 손발이 남보다 훨씬 큰 것도 아니다. 당연히 박태환처럼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나보다 먼저 수영을 시작한 후, 성실하게 수영장을 다녀서 저 경지에 다다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도 언젠간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인다.
일단 보이는 상대부터 정해야
나 또한 마찬가지다. 조금만 스트로크 빈도와 파워를 높이면, 킥의 횟수를 늘리면 2번과는 바짝 붙어서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몇 개월 체력을 더 늘리면 1번의 발끝도 스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우선 괜찮은 3번이 되는 것이 급선무다.
1번이 보이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혹시 따라잡을 상대가 보이는가? 그렇다면 애쓰면 된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데 막연히 업계 최고가 되겠다는 둥, 지역에서 알아주는 전문가가 되겠다는 둥 막연히 목표를 세운 뒤 이것저것 손대고 공부하고 준비하는 건 시간 낭비다. 다른 일이나 분야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 분야를 포함해서 몇몇 분야는 가시적인 상대, 레퍼런스, 샘플이 있어야 한다.
실현 가능한 목표
설령 눈에 보이는 상대가 있다 하더라도 단숨에 따라잡을 순 없다. 화려한 1번이 되기 위해서는 성실한 3번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2번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있어도 성실하지 않으면 힘들다.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수영장을 오는 2번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나도 그만큼 와야 한다. 그만큼 체력을 쏟아야 한다. 세상엔 거저 되는 게 없다.
어째 이야기를 하다 보니 꼰대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업계 후배들의 소문을 듣다 보면 너무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하려다 번아웃이 오거나, 너무 버거운 상대를 타깃 삼아 일을 크게 벌이다 나자빠지는 경우도 봤다.
우선은 지역에서, 우선은 지금의 위치에서, 우선은 따라잡을만한 사람부터, 흉내 낼 수 있는 상대부터 선택해서 애써보자. 뭐, 3류면 어떻고, 3번이면 어떤가. 인생 하루 이틀 살다 말건가? 이 일, 한 두 해 하고 때려 칠 건가? 수영을 이번 달만 하고 말건가? 좁혀지고 있다. 우선은 괜찮은 3번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