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아직 카메라를 살지 말지 결정을 못했다. 지난번 대여해서 사용했던 카메라와 같은 기종이 매물로 빈번하게 나오는 모양이다. 그걸 고민하느라 지난밤에 한숨도 못 잤다고 털어놓았다.
감독이 고급 DSLR과 그 카메라로 찍은 영상의 차이를 보여줬다. 색도 색이지만 소위 화면의 Depth가 달랐다. 원근감이 풍부했고 사람과 사물이 가진 본연의 매력을 잘 살렸다. DSLR로 찍은 영상이 사진의 나열처럼 보인다면 그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영화나 다큐멘터리처럼 보였다. 비전문가인 내 눈에도 확연히 달라 보이는 이런 차이는 후보정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차이다.
저장된 자료, 자료, 자료
오전에는 회의를 했다. 몇 년 전, 마케팅 컨설팅 및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부 지원비를 받아 홍보 영상을 제작했던 중견 조선해양 엔지니어링 회사의 중장기 PR 전략 기획에 관한 회의였다. 혹시나 해서 갖고 있던 몇몇 자료를 감독에게 보여줬다.
그중엔 감독이 촬영한, 몇 년 전 유럽의 선박회사가 한국의 대형 조선소에 발주해 완성한 시추선의 시운전 사진과 그 사진을 자료 삼아 작성 된 업계의 국제 전문지의 기사가 있었다. 그 하단엔 그 시추선을 사용하는 정유 회사의 대형 프로젝트 홍보 영상도 있었고. 우린 이 자료들과, 내가 과거 참여했던 기업핵심가치 보고서 초안과 목차, 앞서의 업계 전문지의 영상 기술, 표현방법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감독이나 나나 자료를 버리질 못한다. 감독은 지난 십몇 년 간의 촬영분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하드마다 라벨링 되어 보관하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의 작업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관련 일이 들어오면 과거의 자료와 현재의 자료를 교차 검토 분석하는 것이 용이한 편이다. 어지간한 일은 과거 우리가 했던 일과 유사하다. 과거의 토대와 현재의 상황, 미래의 바람을 혼합하여 전략을 세우고 기획을 하고 크리에이티브로 나아간다.
감독을 찾는 전화
파일을 찾아보니 2019년이다. 시의 홍보부서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감독과 함께 들어갔다. 홍보부서의 지위가 높은 사람이 감독과 우리 회사를 추천했다고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혹시나 해서 감독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모르는데.”
“아니. 잘 생각해 봐요. 뭐 고등학교나 지역에서 몇 다리 건너 아는 사람 아니에요?”
“아니. 진짜 몰라. 어떻게 알고 날 추천했는지 나도 궁금해 죽겠어.”
그 궁금증은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2월쯤 미팅을 하고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감독이 실마리를 갖고 왔다. 지역의 한 방송국 국장인가 차장이 추천을 했다는 것이다. 역시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모르지. 오다가다 만났을 수도 있는데... 몰라.”
그렇게 모르는 방송국 사람의 추천을 받은, 모르는 고위직의 추천으로 시청의 일을 하게 됐다. 그 이후로 그 일을 잘해서 추천이 추천을, 추천이 추천을 불렀다.
학연/지연의 쉬운 길
난 연고가 없다. 부산에도 울산에도 없다. 감독은 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감독은 울산 토박이고 그중에서도 연대감이 유독 깊은 장생포 사람이다. 사실 울산과 부산 모두, 부두나 해안 지역 출신 사람들, 그리고 특정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의 유대감은 유독 깊은 것 같다. 그러니까 학연/지연의 심도랄까, 그런 데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감독은 분명 진즉에 그런 연고를 이용할 수 있었다. 2010년대부터 고등학교 선배나 장생포 선배들 중에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구청장이나 지역 시의원이 되기도 했다. 친척 형님 중에는 울산의 대기업에 수십 년씩 다니면서 노조활동도 하고 그 위원장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맘만 먹으면 인맥과 학연/지연을 활용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건 선배 때나 하던 짓,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양아치 짓이라 말하며 묵묵히 실력으로 승부하려 했다.
누군가의 관심, 준비된 사람
얼마 전 유재석이 한 방송에서 그랬다. 누군가의 관심, 누군가 한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그러나 모질지 못한 유재석이 미처 못 한 말이 있다. 누군가 당신을 추천했을 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시청에 높은 사람의 추천을 받은 회사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지역 업계에서 카메라 좀 만진다는 회사는 아마 다 불러들였을 것이다. 우리와의 미팅 때처럼, 이것저것 물어봤을 것이다. 그 이후 담당 주무관과 담당 계장, 그리고 그 부서 전 직원과 과장, 심지어는 그 높으신 분까지 둘러앉아 어떤 회사와 일을 할지 회의를 했을 것이다. 그 과정 끝에 우리가 선택 됐을 것이다.
쓸모가 발견되는 순간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언젠간 도움이 되겠지, 언젠간 세상이 알아주겠지 하며 버틴 시간들이 있었다. 감독은 이런 생각으로 공부하고 찍고 정성을 다해 편집하고 저장했을 것이다. 난 좀 다른 생각을 하며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렇게 글을 쓰나, 어디에 도움이 되겠다고 이런 책을 읽고 있나, 나중에 어디에 쓸지는 모르지만 버리기 아까우니 저장해 두자, 뭐 이런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의 버틴 시간, 그 시간 속에 저장되어 있던 우리의 포텐셜은 누군가 필요한 순간 쓸모를 찾았다. 모든 쓸모는 그렇게 쓰려할 때서야 그 쓸모를 알 수 있다. 그전까지는 어디에 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그 순간, 독보적인 것이 된다.
어제 감독은 색보정을 한 영상을 보여줬다. 그 카메라로 찍은 영상의 보정 영상이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작가님, 이 프로그램, 이게 공짜야. 웃기지 않아요? 그런데 이게 사용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잘 안 써.”
“그러니까. 공짜 프로그램인데 사용하기 힘들어서 못 쓴다는 거예요?”
“그렇지. 이게 이 값을 다 잡아서...”,
그 뒤로 감독은 프레임 단위로 오브제의 색을 설정해서 균일하게 하고... 여하간 긴 설명을 했다. 난 들어도 기억은 못하지만 어찌 됐든 무지하게 끈기가 필요한,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집요한 작업이었다. 감독이 그 설명 끝에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박 XX 감독이 달라는 영상이 이거야.”
“에? 왜? 자긴 못해서?”
“그렇죠. 내가 주나. 그냥 촬영 원본만 주는 거지.”
“그래야지. 그건 도둑놈 심보지. 날로 먹겠다는 거지.”
부산에서 우리만큼 오래 일한 감독의 수준이 저렇다. 공부는 하기 싫고 촬영도 귀찮고 편집도 힘든데, 돈은 벌고 싶으니 이런저런 방법으로 일을 따와 제작 및 전반적인 작업은 외주를 주며 먹고 산다. 그래도 부산에선 이름만 대면 다 알만 한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니...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후배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촬영과 편집만으로 한계를 느껴 다른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 정초부터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 고군분투를 알아보고 누군가 전화를 하고 일을 맡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한테도 몇 년 전부터 그런 일이 있다. 스팸 문자나 오고 보험 가입 전화나 오는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지역 번호 앞세운 번호나 휴대폰 번호가 찍힐 때가 있다. 받아보면 심사나 강연 의뢰일 때가 있다. 몇 년 전부터다. 스팸 메일이나 오던 메일 계정에 원고를 의뢰하는 메일도 아주 가~끔 오기도 한다. 어제도 그런 메일 한통을 받았다.
당신의 전화벨이 울릴 때...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울릴 때... 준비가 되어 있나? 준비가 되어 있다면 반가울 테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불안할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혹시 또 모르니, 묵묵히 하루를.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