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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02. 2023

윤리 21 - 가라타니 고진

동해선에서 읽은 책 42

지난 일요일, 딸이 다니는 한의원에 갔다 왔다. 집에서 지하철로는 50분가량 가야 하는 길, 왕복하는 동안, 또 딸이 한의원에서 키 크는 물리치료와 살 빠지는 쑥뜸을 하는 동안 딱히 할 게 없는 나로서는 책을 하나 골라야 했다. 그래서 고른 책이 이 책이고 오늘 울산을 오가며 마저 다 읽었다. 참고로 딸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을 갖고 갔다. 또, 참고로...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0. 우아하면서도 논리적인

-요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또래의 일본 학자들인 사사키 아타루와 치바 마사야가 자주 언급한 비평가가 가라타니 고진이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엔 너무 자주 나와서 사놓았었고 이제 읽었다. 마치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왜 그들이 고진을 좋아하고 읽었고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들의 문장과 책처럼 고진의 글과 책은 탄탄한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개념과 철학을 말하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고 하나의 이론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도, 누군가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주저함이 없었다. 그 주저함의 부재의 배경엔 깊은 통찰과 철학에 대한 섬세한 독해가 있었고 정연한 논리가 있었다.


1. 한 인간의 책임과 자유

-이 책은 일본 사회에서 한 범죄자에 대한 책임을 그 가족에게 묻는 황색 저널리즘과 일본 사회의 도덕에 대한 저자의 불편함에서 시작한다. 한 인간의 범죄의 원인은 인과적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해서, 그렇다면 인간이 저지르는 악에 대한 한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서 묻을 수 있는지로 넘어간다.


이후 도덕에 대해서 논하며, 우리가 잘 아는 공리주의적 도덕과 공동체적 도덕에 대해 논한다. 그 도덕의 한계를 칸트의 이론을 빌려 각파 하고 진정한 인간의 윤리의 기원에 대해 파고 들어간다.


2. 타자에 대한 윤리

-한마디로, 고진은, 칸트의 이론을 빌려 이리 말한다. 진정한 윤리는 자유로울 윤리인데, 그 자유는 일종의 의무다. 그 의무란 한 인간으로서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할 자유다. 그러니까 모두가 모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동물적이 아닌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타자의 윤리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인과율,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주의적 도덕에서 벗어난 윤리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을 고진은 칸트의 말을 빌려 코스모폴리틱 한 윤리라고 말했다.


3. 환경운동의 윤리

-이 타자의 윤리는 죽은 이들, 미래에 도래할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 오늘의 일본인들이 과거의 역사를 사죄해야 하는 이유도, 오늘을 사는 우리가 환경을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일전에 난 환경운동가인 최근영 씨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그녀가 하는 오늘의 플로깅이 오늘 우리가 보는 고향의 풍경을 지켜 다음 세대도 같은 풍경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썼었다. 이 논리가 바로 고진의 논리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사진에 담긴,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새겨진 울산의 독립운동가들이 당시에 한 투쟁과 운동, 그리고 저 동상의 주인공인 조선시대 외교관인 이예 선생이 한 모든 외교, 내가 아이를 위해 기꺼이 두 시간을 내어 지하철을 타고 한의원에 동행한 것, 그리고 오늘 감독과 나와 담당 주무관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신 울산문화예술회관 카페에서 도돌이컵을 사용하는 것.. 이 모두가 오늘보다 내일 더 큰 의미를 가져올, 미래의 타자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래 세대는 우리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여부를 떠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지금 여기 없는 타자를 위해 윤리를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간과 역사를 뛰어넘어 한 인간이 존재와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 조우한다.


4. 잘 만든 건축물, 또는 정교한 기계

-이런 것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얇은 책 안에 수많은 이론과 철학자들이 오가지만, 마치 카드 섹션을 하듯이, 프레타포르테에서 순서를 지켜 모델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처럼, 등장해야 할 곳에 필요한 말을 했다. 불필요한 말도, 문장도, 곁가지도 없었다. 마치 잘 짜인 추리소설을 보는 기분이랄까?


오늘 울산에 갔다 오는 길에, 거의 다 읽어 갈 때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한 권 더 있지 않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보니 한 권 더 있다. 이 책과 달리 제법 두껍지만 미뤄둘 순 없을 듯... 202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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