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하던 감염병에 휩쓸렸던 딸은 이틀을 혹독하게 앓으며 2킬로그램의 살이 빠졌다. 아이가 회복한 후 그동안 내리던 비가 그친 뒤 거실 복판까지 들이친 봄볕이 냉기를 밀어냈건만 우크라이나를 덮은 포연(砲煙)은 달을 넘기고도 걷힐 기미가 없다. 이 전쟁을 뉴스로 보면서 느낀 감정은 40도까지 치솟은 딸의 열을 어떤 해열제로도 쫓아낼 수 없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줄 때의 마음과 닮았다.
그 와중에도, 그러니까 하루에도 몇 백 명씩 병에 걸려 죽고 수십만이 동시에 병에 걸려 약국의 감기약이 동나 어린이 시럽 약을 사기 위해 여러 곳의 약국을 전전해야 했던 이 시기에도 일은 들어왔다. 고백하건대, 내 삶은 코로나 시대의 공포와 스트레스에서 빗겨 나 있었다. 우리 팀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아내의 회사도 방역이 강화된 걸 제외하곤 괜찮았다. 이 시기 내가 겪은 스트레스라고는 안 그래도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 마스크를 끼고 말을 하려다 보니 미팅 때마다 목이 아팠다는 것 정도, 그리고 학교를 못 가는 딸에게 삼시 세 끼와 간식까지 차려주면서 늘 다른 메뉴를 내줘야 한다는 고충뿐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자잘한 스트레스가 있었다. 코로나19 초기, 미국에 사는 어머니와 처제에게 한 달에 한번 마스크를 보내면서 간호사로서 감염병과의 사투 최전선에서 투쟁하는 처제와 마스크도 잘 안 쓰고 다니는 텍사스에서 일상을 살아가실 연로한 어머니가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점포의 세가 밀려 대출에 매달려 본 적도 없고 부산의 관광업이나 이벤트업 종사자들처럼 하루아침에 일감과 직장을 잃어본 적도, 그런 걱정을 해 본 적도 없다. 코로나19의 공포는 저 TV 속 뉴스 안에 갇힌 채 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내 안타까움은 공허했다.
먼 나라에선 전쟁으로 하루에도 몇 천 명씩 죽고 도시 몇 개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 이런 마음으로 꾸역꾸역 카피를 썼다. 카피를 쓰는 동안, 장례식장에서 소주 한 잔을 옆에 놓고 뜨거운 육개장에 쌀밥을 말아먹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이 감정 뒤에 ‘우리가 과연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몰려왔다.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코로나19의 이전과 전쟁 발발 이전의 세계는 복원될 수 있을까? 이 세계가 두 고난의 후유증을 만성 질환처럼 안고 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회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오히려 더 나은 세계가 될 수 있다면 그 조건은 뭘까? 이 영화와 소설을 다시 보며 답을 찾아봤다.
하나의 소설, 세 개의 영화
2007년도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1954년 발표된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1964년과 1971년에 이어 세 번째로 영화화 됐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 소설의 배경이 1976년이라는 점이다. 1982년에 만들어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2019년을 시대 배경으로 삼은 것처럼 1954년의 작가에게 1976년은 아주 먼 미래였던 것이다. 원작 소설은 1964년도의 영화와는 비슷하고 2007년의 영화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2007년의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1971년도 영화인 <오메가맨>을 원작으로 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인물의 설정과 흡혈귀와의 투쟁 구조가 그렇다.
물론 세 영화 모두 이야기의 줄기는 닮았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은 흡혈귀가 됐고 오직 한 사람, 로버트 네빌만 남는다. 그는 집을 요새로 만들어 낮에는 잠들어 있는 흡혈귀를 찾아다니며 죽이면서 식량과 연료 등을 구하고, 밤에는 흡혈귀의 야유와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다. 안 그래도 암울한 이야기의 엔딩은 더 암울하다. 지구 최후의 사람이었던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죽고 흡혈귀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소설과 영화의 메타포
좀비 영화, 특히 미국의 좀비 영화는 주로 반지성주의와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미국인과 미국 사회에 냉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 담긴 은유는 약간 다르다. 오히려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가치관으로 판단되거나 규제될 수 없고 그 도래 또한 막을 수 없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1976년도 영화 <오메가맨>에서 로버트 네빌이 선택의 여지없이 유일하게 볼 수 있던 영화가 1970년에 나온 <우드스탁: 사랑과 평화의 3일>이라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담은 기록 영화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장면이 있는 <오메가맨>은 소설과는 다르게 새 시대와 새 세대가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하위문화를 그야말로 컬트적인 현상으로 치부해 버린다.
원작 소설이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면 <오메가맨>은 그 보수적인 미국 백인 사회를 미국의 가치를 지키고 이어나갈 유일한 존재, 구세주로 표현한다. 1971년의 영화는 소설에 담긴 의미를 뒤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메가맨>에서 흑인 여성이 로버트 네빌을 유혹하는 것도, 이 영화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이 1990년대에 무려 십여 년간 전미총기협회(NRA)의 회장을 역임했던 것도 나름 의미를 부여해 곱씹을만하다.
마지막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오메가맨>의 주인공은 신흥 종교의 교주 같은 흡혈귀 집단의 리더가 던진 창을 맞고 분수대 조각에 쓰러진다. 그 조각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거두어 가던 로버트 네빌은 그를 찾아온 최후의 인간 무리에게 치료제를 건네면서 숨을 거둔다. 마치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롱기누스의 창을 맞고 죽은 예수처럼.
이 생경한 엔딩과 함께, 2007년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볼 때 이해가 안 갔던 점이 또 있었다. 주인공이 끝까지 집을 지키려 했던 점이다. 흡혈귀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여타 다른 좀비 영화와 달리 말이다. 심지어 흡혈귀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 연구도 병원이나 대학 연구실이 아닌 집에서 했다. 집에 대한 이 집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집의 의미
난 그게 궁금했다. 영화에선 주인공이 좀비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아주 근사한 연구실을 집에 차려 놓았기 때문에 집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럼에도 난 납득되지 않았다. 모든 좀비 영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주인공의 목적은 생존이었고, 생존을 위해 안전한 지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풀리지 않던 의문의 실마리는 다시 읽은 소설 속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선, 집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 집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게요. 습관처럼 말이야. 그냥..... 그냥 습관처럼.... 그 집에 익숙해 있었소."라고. 소설 속 네빌의 저 말에 날 설득 당했다. 집이 없는 인간, 가정이 없는 인간, 뿌리 없는 인간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습관은 어쩌면 인간다움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생존이 인간다움의 조건이 아니라.
집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영화에선 이성과 경험으로 형성되는 과학의 세계를 상징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성과 경험이라는 집을 지키며 과학의 힘으로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애쓴다. 소설 속 주인공이 평범한 노동자였던데 반해 세 편의 영화 모두 주인공은 군의관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에 비해, 세 편의 영화에선 치료제에 근접하거나 개발에 성공한다. 이성이 없는 광기의 무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개발자를 죽였기에 그들은 치료받을 기회를 놓친다. 그래서 영화에선 좀비들을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 죄인처럼 묘사한다.
속편의 이유
<오메가맨>의 바람과는 달리 좀비는 치료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 영화를 전후로 해서 좀비 영화는 하나의 장르로 정착됐고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공포 영화들은 무수한 속편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공포 영화들이 꾸준히 속편을 찍어내는 이유가 뭘까? 전문가들은 제작비가 적고 살인마의 “아우라”를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감염병 사태와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재래식 전쟁 뉴스를 보면서 속편 생산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언적으로 말하면, 공포가 남아 있는 한 속편은 이어진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원작 소설이 나온 1954년 이후에는 물론이고 <오메가맨>이 나온 1971년 이후에도 미국 사회의 다양성은 지속적으로 심화됐고, 그로 인해 낯선 존재와 미래 세대에 대한 공포 또한 다양해지고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서로를 낯설게 봄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는 공포 영화, 특히 좀비 영화를 재생산시키고 소비시키는 토양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하건 데,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한 속편은 만들어진다. 낯선 것이 여전히 낯선 것으로 남아 있으면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공포의 상황이 끝나도 공포를 불러온 낯섦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여진은 지속된다. 공포의 경험은 악몽처럼 남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심지어 다른 공포를 예감케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님을, 전편에서 죽었던 살인마가 거짓말처럼 살아나 속편에 등장하듯, 아니 심지어 더 강해져 등장하듯, 우리를 공포에 빠트렸던 것이 언젠간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게 한다.
문을 닫는 이유
로버트 네빌이 그랬던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불안이 집의 문을 닫아걸게 한다. 그러나 그의 집이 완고한 기성세대의 사고방식만을 상징한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소설 속의 표현을 빌리면 "새로운 세계란 늘 원시적”이다. 원시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사회와 시대가 갖고 있는 사고의 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것은 문명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스스로 자임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발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짊어지고 오는 낯선 존재가 곧 젊은 세대는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집”안에서 내다보는 모든 타자는 모두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타자는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기준으로 하여 타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교정해야 될, 치료해야 될 대상으로 보면, 나 또한 타자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래 세대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우린 낯선 것을 정확히 봐야만 할지 모른다. 그것을 통해 근거 없는 공포를 제거해야 될지 모른다.
"그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조용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구에 버려진 지성의 잔재들, 정신세계의 무익한 오바이트, 쓰레기, 잡탕...... 이 수많은 책들 중에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던 것이다.", 96
답을 찾는 시간
소설 속 네빌은 무지하고 무식하다. 생존하기 위해 애쓰다 3년째가 되어서야 원인을 밝혀내려 한다. 대학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절감한다. 여기 있는 수많은 책들도, 인류가 쌓아놓은 지식도 멸망을 막지 못했음을... 결국 혐오감을 느낀다.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지식인이 있는가. 정치인은? 이 네트워크 된 글로벌 시대에 우린 멀리서 난 전쟁을 볼 수는 있어도 막지도, 멈추지도 못한다. 네빌이 도서관에서 느낀 무력감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도 인류는 희망이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도, 로버트 네빌처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집 밖으로 나서는 대신 낯선 것을 소외시키고 격리시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낯선 존재로 규정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이 봄, 지독한 갈등과 대립의 시간을 겪었던 원인일지 모른다. <월드워 Z>처럼 전 인류가 감염병과 싸우는 와중에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세대와 세대가 싸우고 남성과 여성이 싸우는 시간을 지나왔다. 아니 아직도 지나고 있다.
좀비와 그것을 다룬 콘텐츠의 은유는 양면적이다.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혁신이 세상을 바꾸리라 기대했지만 우리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래도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건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세대뿐이라는 희비교차의 은유가 담겨 있다. 우리 또한 서로를 이렇게 양가적인 감정으로 보고 있다.
MZ세대라는, 우리와 전혀 다른 인류, 지금의 세대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를 우린 어떻게 대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미래를 막고, 미래에 도래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오늘의 이어짐과 포옹, 통합을 막는지 모른다.
답을 얻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우리의 과학이 도래할 미지의 뭔가에 대비되어 있을까? 이 질병 하나로 수백만이 죽었다. 이 병과 싸우기 위해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갔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아직 이겼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인류가 공동의 적과 싸우는 동안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이룬 과학과 문명과 체계는 미래의 불안을 없애지 못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일으키는 뭔가는, 어쩌면 우리가 이뤄낸 뭔가가 원인이 되어 도래하는지도 모른다.
공포가 우리를 다시 찾아왔을 때
그때, 우리가 공포에 빠져 허둥대지 않으려면 우리가 이 싸움에서 얻은 교훈과 피부에 축축하게 남은 공포의 불쾌함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공포의 그늘이 다시 우리의 일상에 드리우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난 정확히 모른다. 평화를 위한 일일수도, 환경을 위한 일일수도, 위생에 취약한 나라를 돕는 일일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공포의 그것이 도래할 때까지 넋 놓고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그것>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공포가 우리를 찾아오기 전, 우리는 준비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 근원을 찾아 없애야 할 것이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이 싸움의 일선에 있던 의사, 공무원, 정치인, 그리고 이 질병에 걸렸던 내 가족과 이웃들은 그 근원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
꽃은 피었는데 세계와 우리 사회에 봄은 멀다. 타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낯선 타자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막연히 피어오른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방법, 그러니까 늘 속편이 나오게 하는 공포 영화의 클리셰를 종결짓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다리던 진짜 봄이 오기 위해선, “나”라는 집, 내 이성과 경험과 판단의 집 밖의 세계와 조우하여 공존을 모색하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를 위해 우리에겐 아주 사소한 결단들과 자잘한 노력들이 필요할지 모른다. 열을 한 번에 내리지 못했던 해열제 대신 미지근한 물에 젖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반복적으로 닦아줬던 것과 같은, 그런 반복된 따뜻한 노력들이 필요할지 모른다. (원안은 2022년 4월 15일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