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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12. 2023

상처로 숨 쉬는 법 ; 김진영

동해선에서 읽은 책 52

방금 영화관에서 나온 기분이다.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십 대 시절, 이십 대 시절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단관 영화관에서 방금 나온 기분이다. 오후 세시쯤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와보니 벌써 해가 졌다.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무심히 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난 저 영화관 속에서 그들이 보지 못한 뭔가를 봤다. 그렇게 나와서 눈을 적응시키고 사람들 속에 섞여 걷는다. 그런 기분이다.


대충 열흘이 걸렸다.

열흘 동안 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학생이었다. 아주 행복한 학생. 선생의 말은 내 생각과 같아서 동문을 만난 기분이었다. 마침 바쁜 일도 대부분 끝나 책에 몰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올 한 해 남은 일이라곤 울산과 관련된 역사 교육 영상 시나리오 정도다. 월요일엔 울산시청에서 미팅이 있지만 그건 납품 미팅이니 이러저러한 평을 들어주기만 하면 될 테고...


책을 읽다 보면 닮은 사람을 만난다.

김진영 선생은 52년생이다. 나보다 얼추 스무 살은 많다.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다. 이렇다 할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나와 너무 생각이 같았다. 여기저기에 내가 흩어 놓은 글들이 선생의 글을 표절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도르노나 벤야민, 호르크하이머를 읽은 건 한 이십여 년 전 일이다. 그때의 영향이 내 시선에, 내 글에, 내 삶에, 내 해석에 많은 영향을 줬음을 다시 느낀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김진영 선생은 아주 광범위한 맥락에서 내 선배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뵙지도 못하고, 2018년에 돌아가셨다.


이런 글, 서평이라면 서평, 잡글이라면 잡글을 쓰는 이유는... 

이 좋은 책을 혼자 읽기 아까워 이런 책을 찾고 있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기 위함이 첫 번째고, 이 책을 읽은 다른 이에게 난 이런 생각으로 읽었는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하는, 수취인 없는, 그러니 당연히 답장도 없을 편지를 보내려 함이 두 번째 이유다. 굳이 하나의 이유를 더 대자면 종종 책을 추천해 보라는 막연한 부탁을 받곤 하는데, 그 부탁에 이 글이 답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 책으로 연말을 보내야겠다는 계획이 틀어졌다.

좀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다. 결국 하나 더 읽어야 하는데, 선생님의 강의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마침 몇 달 전, 대학원 시절이 생각나 사놓은 <계몽의 변증법> 개정판을 읽을지, 미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읽을지, 아니면 그냥 말일까지 술이나 마실지.. 결정 못했다.


이하의 글은 본문과 그 본문에 내 생각을 덧댄 것이다.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좋다. 나중에 내가 글을 쓸 때 참고하기 위해 앞으로 이런 식으로 독서를 해야겠구나 절감하고 실행한 것이다. 메모라 파편이니 굳이 그 조각을 맞추려 애쓸 필요는 없다.


"현상은 항상 수수께끼입니다. 현상은 안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표층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것을 응시하면서 여러 가지 모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P.25.


응시에 대한 공감.... 응시라는 말에 밑줄을.

참고로 응은 한자로 엉길 응인데...

이는 사물과 함께 얼어붙을 정도로 그 사물에 시선이 오래 머물러 엉기는 것을 의미한다.


"저는 대중 인문학 속에 깊은 절망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진실 앞에서의 절망이죠. 우리는 진실을 보려고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부터 외면할 수 있는 기술,


 '마야의 베일'' 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는 거죠."P. 49.


위로가 되는 인문학 같은 건 없다는 게, 인문학은 오히려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게  평소 내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담은 책으론 <불온한 인문학>이 있다.


"예감이라는 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거 혹시 안 느끼세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이게 사는 거냐고 묻게 되는 것 말이에요. 이게 예감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이게 사는 거야? 묻게 되는 것. 이 질문은 피할 수가 없어요. 사유는 여기서, 이것을 붙잡고 시작된다는 거죠.", P.89.


2006년 아니면 2007년... 어떤 축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지탱해 주던 어떤 신념이 훅 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때 바로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바람에 진짜 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십 년쯤 지나서 겨우 그 순간에 느낀 그 기분, 김진영의 표현을 빌리면 그 예감에 답을 하기 위해 이런저런 책을 읽어 왔다. 어쩌면 이제 조금 그 예감에 답을 얻어가고 있는 거 아닐까? 질문은 계속되고, 불길한 예감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여전히 있지만...


"우리는 상품을 사면서 절대로 실용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아요. 상품에 꿈을 투여해요.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어쩌면 상품을 통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망이 투여되고 있는 거예요." P. 95.


광고는 불안과 꿈, 그 틈바구니로 들어간다. 그 틈은 스스로도 모른다. 그 간격도, 그 깊이도. 겨울만 되면 옷을 사고 싶은 내 욕망을 스스로도 아주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었듯이. 최근에서야 그것이 아주 오래된 불안, 공포 같은 것들이 만든 틈임을 알았다. 그 틈을 메울 수 있을까? 그래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답을 안 주고 몰아친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라고.. 다른 틈바구니는 없는지.. 완전한 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절대로 안도하지 말라고... 요즘 부쩍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은 불교철학하고 많이 닮았다는 걸 느낀다. 참 공부할 거 많다.


"우리는 요즘 기쁨이나 즐거움을 많이 얘기하는데, 이 항목에서 얘기하는 바는, 기쁨을 아는 것은 고유한 능력이라는 거예요. 자기만의 기쁨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 거죠.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것에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떤 걸 가져와 기쁜 거라고 주장해도 기뻐하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기쁨의 주체입니다."P.287.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세상의 돌아감에 덤덤하다. 어차피 날 기쁘게 하는 건 A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나도 있다. 최고로 좋아하고 즐겁고 기쁜 것. 그것이 있기에 어떤 것은 하찮게 보인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 자기 내부의 자연을 동시에 억압했어야 됐다는 것이죠.... 욕망, 정념, 정서. 이런 것들 역시 전부 통제했다는 것이죠." P.317


얼마 전 울산 충의사에서 미팅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할 때, 감독과 같은 차종인데 색과 타이어가 금방이라도 산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산악용 타이어와 도색으로 무장한 차를 봤다. 그런데 웃기게도 스페어타이어는 평범한 일반 도로용이었다. 감독과 한참 웃었다. 내 안의 야성을 그렇게 이미지로 대체한다. 소비로 대체한다. 광기는 술로, 쾌락은 상품화된 시장에서.... 우린 가장 처음 길들여진 짐승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고독도 있습니다. 버려짐의 고독이에요.... 실연을 당하면 왜 이렇게 아플까요. 근본적으로 보면 버려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버려짐은 다름 아닌 집 없음이에요. 갈 곳 없음이에요."P.354


사람보다 넓고 깊은 집은 없다. 사람보다 무너지기 쉬운 집도 없다. 짓고 허물고, 짓고 허물고...


"자기를 희생해서 자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도 내가 되고자 하는 나가 아니라, 사회가 되라고 한 나를 만들어내는 이것이 광기의 세계가 아닙니까?", P.434.


이게 도대체 뭐야? 하는 질문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김진영은 말했다. 이게 지금 나인가 하는 문제에서 내 독서는 시작됐다. 한 이십 년 전쯤... 난 지금도 세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롤랑 바르트는 독서를 두 가지로 나누죠. 억압의 독서와 욕망의 독서를 얘기합니다. 전부 억압의 독서를 강요하니까 당연히 읽기 싫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독서를 욕망의 독서라는 방식으로 수행한다면 읽지 말라고 해도 읽어요."P.460


이렇게 보면, 난 욕망의 독서를 해 왔다. 멀게는 중학교 때부터, 가깝게는 서른 언저리부터. 내가 읽고 싶은 걸 읽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남들 다 읽은 권장 도서가 빠져 있고, 베스트셀러도 당연히 빠져 있다. 철저히 내가 욕망하는 것을 알아 읽었다. 아가사 크리스티도, 코난 도일도, 에드거 앨런 포우도.... 지금 읽고 있는 이 책도. 이런 독서가 되기 위해선 내 욕망을 알아야 한다. 내 욕망을 알기 위해선 욕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걸 읽었을 때 내 욕망이 꿈틀거렸는가를 알아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읽기 전에는 원하는 것을 읽을 수 없다는 묘한 딜레마가 생긴다. 아무것이 열 권을 사서 이것저것 한 챕터 정도 읽어보고 그중 맘에 드는 건 읽고 맘에 안 드는 건 다른 사람 줘버리는 건 어떨까? 그렇게 내 욕망의 독서 지도 그리기는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친구나 애인, 모르는 사람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보이는 게 있어요. 연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다 알아요. 그런 건 사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P.629.


얼마 전 시선을 소재로 칼럼을 썼다. 딱 저런 논리를 폈다. 눈과 귀를 새롭게 하면 새롭게 보인다고...


"불면의 시간은 내가 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주함 속에 머무르느라 게을리했던 배반당한 나의 삶이 말을 거는 시간이다. '나를 살아줘'라는 요청이에요. 그 삶이 SOS를 보내는 것이죠. 병 속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살면 나는 나의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채 결국 끝나게 되니까요."P.637


뒤늦게 공부를 하는 동안 불면증을 겪었다. 그 공부를 때려치우고도 한참을. 카피라이터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글을 써보자 마음먹고 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편히 자고 있다. 특히 칼럼을 쓰면서부터는 묘하게 편해지고 있다.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를 글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작가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내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받는 원고료는 일종의 이중 지불 같다. 이미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으니 말이다. 과거 대학 강사 시절에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대전에서 부산에서 강의를 하고 나면 뭔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카피라이터의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분명 아는 걸 다 쏟아냈는데 뭔가 더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강사료를 받는 것이 묘하게 이중 지불 같은 느낌이었다. 궁극적으로, 아도르노나 김진영이 얘기하는 "내가 원하는 일"이란 이런 것일 테다. 일을 통해 나도 타자도, 우리도, 그들도 모두 구원받는 것.

...

팔리는 글이 아니라 읽히는 글을 쓰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누군가, 아주 드물게 내 글을 정독해 준다는 것이 고맙다. 나는 쓰면서, 읽는 이는 읽으면서 작게는 위안을, 크게는 전환과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면... 이렇게 말해놓으니까 무슨 사이비 교주 같기도 하고...


"취향이란 뭐예요? 바로 이런 겁니다. 다름에의 열정이에요. 결코 자기를 그 어떠한 가치에 의해서 비교하려는 게 아닙니다.", P.710.


짐멜이 유행에 대해 한 말의 메아리다. 유행은 같아지기 위한 노력이자, 살짝 앞서가기 위한 애씀이다. 반면 취향이란 바로 저것이다. 다름에의 열정. 어쩌면 감독과 내가, 어디 가서도 이런 일 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는 건, 그런 일 하는 사람처럼 입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을 신경 쓰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아니 궁극적으로는 영상이든 카피든 좀 다르게 해 보려고 애쓰는 정신이 몸짓으로 구현된 게 아닐까?


"결국은 아도르노에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다름 아닌 생에 대한 허위적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에요.", P.720.


"우리가 상처를 치유받기보다는 타자의 상처에 대해서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인 거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전부 스완 같은지 모른다는 자책의 심정으로 마지막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P.755.


내 바람이다. 내 글이 일을 한다면 이런 일을 했으면 한다.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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