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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25. 2023

약한 연결 - 아즈마 히로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54

우산을 쓰고 가는 딸

울산에 가는 날.  딸을 두 번째 횡단보도에서 보냈다. 어린이 우산이 아니라 어른 우산을 쓰고 빗 속을 뚫고 가는 딸을 지켜봤다. 딸은 두 번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다.


"인터넷에는 누군가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만 있다. '표상 불가능한 것'은 거기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P69.


말이 너무 많다.

해솔이는 너무 말이 많다. 감독은 그를 믿고 CG를 맡겼다. 품질과 시간을 지키지 않아 일이 밀렸다. 감독은 한 번 참았다. 그 엉성한 걸 들고 고객한테 보여준 건 나였다. 구차한 변명을 했다. 이런 변명은 카피라이터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우리가 만든 것이 부끄러워 본 적도 처음이고... 그 뒤로도 약속을 어겨 감독은 뚜껑이 열렸고...


해솔이는 아는 게 많다. 말도 많다. 뭘 했다는 흔적도 제법 된다. 그러나 제대로 한 건 없다. 자기가 한 것도 없다. 정체 모를 시정잡배들과 용병처럼 몰려다니며 일을 처리했다. 모두가 일을 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잘한 건 자기가 했고 , 못한 건 남 탓인 애들이었다.


오늘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했다. 밥을 먹고 온 뒤였다.

"너.. 달콤한 인생이란 영화 아냐? 거기서 이병헌이 "나한테 왜 그랬어요 묻지... 그때 김영철 아저씨 대답이 뭔지 알아? 넌 나한테 모욕감을 줬어야. 너, 감독이 우리 명함 파줬지. 그럼 서로에게 부끄러운 존재는 되지 말자. 네가 한 그 허접한 거 갖고 내가 구차한 변명을 하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하자."


"그러니까... 솔직히 감독이 이 CG를 너에게 얼마에 맡겼는지 난 몰라. 그런데 예를 들어 내가 언제까지 백만 원에 사람 죽여줄 이를 찾는데 누가 그 돈으로 언제까지 해주겠다면... 그때까지 제대로 죽여야 하는 거 아냐? 손가락이나 잘라 보내고... 다리나 잘라 보내고 그러면... 그건 죽인 게 아니잖아. 백만 원은 당연히 못 받지. 뭔 말인지 알아? 프로는 그 일을 그 돈으로 해줄 수 있겠다고 했으면 제대로 하는 게 프로야. 돈타령, 시간 타령 좀 하지 마... 너 사람 좋은 감독이니까 넘어간 줄 알아..."


"말의 해석은 현전 하는 '사물'에 미치지 못한다.", P.100.


보여주고 쥐어줘라.

언어는 메타다. 끊임없는 주장과 반박이 이어진다. 이때 사물을 보여주면 말장난은 끝난다.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한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다들 말뿐이다. 보여달라면 어물쩍 넘어간다. 해솔이 뿐만 아니라 그 또래 몇몇 친구들의 특징이다. 우리 업계만 그런가?


"기억의 변경에 저항하는 '사물'을 남기는 것이다.", P.105


너를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

-얼마 전에 조감독도 그랬지만 이것저것 다룰 줄 안다는 애들은 많다. 그러나 운전을 할 줄 안다고 레이서가 될 수 없고, 워드를 칠 줄 안다고 글을 쓸 수 없듯 도구를 이용해, 한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신념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부시다. 옳다고 하는 믿음을 갖고 무엇을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는 이유다. 


"국민과 국민은 말을 매개로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지만 개인과 개인은 '연민'은 통해 '약한 연결'을 맺을 수 있다.", P.112.


기다려 준다.

-감독은 기다려 준다. 나보다 정이 많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 다독이고 격려하고.. 때로는 욕을 해가며 어떻게든 같이 가려 한다. 냉정한 판단은 주로 내가 하고, 감독의 인정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내 몫이다. 연민과 혐오, 열정과 냉정, 격려와 책망... 요즘 이 두 개의 간극을 감독과 난 오가고 있다. 둘이 하면, 감독이 혼자 하면 효율적이던 일을 좀 늦더라도 나눠주고 밀어주면서 가려했는데 그게 맘처럼 안 됐던 상반기였다.


"이처럼 삶은 대부분 아슬아슬한 우연에서 성립한다..... 우연히 찾아온, 세상에 딱 하나뿐인 '이 딸'을 사랑하는 것. 이 '약함'이 강한 유대관계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는 비평가이기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PP.141-142.


인연

-인연엔 인과성이 없다. 무엇을 반복해야 이 사람 같은 귀한 사람을 또 얻는다는 규칙성이 없다. 내가 이러해서 저러한 사람을 곁에 뒀다는 합리적인 이유도 없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인생은 이 부조리함과 우연성과 불안함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이나 나나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하고는 어떻게든 좋게 가려한다. 물론 그게 마음대로 안 돼서 문제지만....


히로키, 삼인방

-아즈마 히로키는 치바 마사야, 사사키 아타루와 함께 요즘 내가 좋아하는 일본 철학자 삼인방 중 한 명이다. 아타루는 라캉, 마사야는 들뢰즈, 히로키는 데리다가 주 전공이다. 그러나 셋 다 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쓴다. 이들의 글을 안천이라는 번역가가 많이 번역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가장 대중적인 건 아타루 같지만 셋 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고 재미있게 글을 쓸 줄 안다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이 책은 내가 이미 읽은 <관광객의 철학>의 전조, 내가 읽지 않은 <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의 힌트들이 담겨 있다. 세부적으로는 사회를, 이 세계를, 인생을, 현실을 어떻게 하면 느슨하고 느긋하게 살 수 있는지... 이 모든 걸 만끽하고, 그러면서도 그 만끽에 치여 눌리지 않으며 살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히로키의 말처럼 인생은 한 번뿐이다. 계획 따윈 훅 날려버릴 엄청난 우연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그렇기에 더욱더 히로키가 말한 관광 하듯 사는 삶에 대해 숙고해봐야 하는지도....


사족...

-부산에서 오던 비는 울산에 도착하자 그쳤다. 종일 그쳤던 비는 저녁나절 다시 내렸다. 퇴근길, 태화강역으로 향하던, 내가 탄 307번 버스는 롯데 백화점 부근에서 사고가 날뻔했다. 그러나 모두들 무사히 집에 갔을 듯.... 갑자기 튀어나온 싸가지 없는 하얀색 벤츠 차량 운전자도 숨어들듯 들어간 롯데호텔에서 좋은 저녁 보냈길.... 이 저녁... 그러니까 2022년 6월 28일의 저녁은 모두에게 딱 한 번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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