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걱정보다 빨리 크는 딸
아내가 퇴근하자마자 해물탕이 먹고 싶다고 해서 가까운 해물탕 전문점을 갔습니다. 한 번도 안 먹어 본 아이가 먹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워낙 새로운 식재료에 겁이 없는 녀석이라 일단 데리고 갔죠.
예상했던 대로 은채는 씩씩하게 잘 먹었습니다.
어른 입맛에야 전혀 맵지 않지만 아이 입맛에는 매콤할 법도 한데 아이는 소라, 조개 관자, 낙지, 꽃게, 새우, 내장과 고니 등을 맛나게 먹었습니다. 고니의 생김새가 희한한지 처음에는 뚫어지게 보기만 했습니다. 제가 식감이 부드러울 거라고 하자 이내 한입 먹어보고 계속 먹었습니다.
종종 아이가 어른의 걱정보다 앞서 갈 때가 있습니다.
킥보드를 처음 사달라고 할 때가 네 살쯤이었는데 전 걱정이 많은 아빠라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손녀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은 외할아버지가 덜컥 사주셨죠.
처음엔 거실에서 타게 했습니다. 몸에 익숙해지기 전까진 밖에서 타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아이는 금방 익숙해졌고 이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다행히 근처에 문화회관이나 박물관이 있어서 공터는 많았습니다. 아이는 문화회관 광장에서 다양한 기술을 익혀 갔고 대극장 회랑의 기둥들을 장애물 삼아 곡선을 그리며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엔 비탈을 쏜살 같이 내려가고 싶어 했습니다.
남자 애들은 곧잘 그렇게 하곤 하니 자기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죠. 처음엔 아빠가 뒤에서 잡아주며 속도를 조절해줬습니다. 그러나 이내 성이 안차게 됐죠. 아이는 서서히 내 손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혼자 짧은 경사로를 내려가길 원했습니다. 몇 번의 성공도 있었지만 한두 번 넘어진 적도 있었죠. 아이도, 아빠도 놀랐지만 아이는 킥보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전 손수 국을 끓여줬습니다. 처음엔 미소 시루나 전통 된장국을 연하게 해줬는데 제가 먹어도 뭔가 심심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주신 국들이 생각나서 가까운 마트에 가서 제철 채소를 넣어 국을 끓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냉이, 시금치, 쑥, 아욱을 넣은 국을 은채는 잘 먹었습니다. 개별 채소들이 내는 향을 구분할 줄 알고 그 맛의 차이를 알아갔죠. 좀 커서는 베트남 쌀국수에 들어가는 숙주, 고수도 좋아하게 됐고 부산 사람들이 많이 먹는 방아잎도 먹을 줄 알게 됐죠.
우린 아이에게 뭔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어 합니다. 교육적이고 창의적인 것으로 말이죠. 그러나 유명한 요리사의 음식 아이디어의 출발은 대부분 다양한 식재료에서 출발한다고 하죠. 그래서 얼마나 많은 식재료를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요리사의 크리에이티비티, 즉 창의력이 결정 된다고 합니다. 부모의 두려움이나 편견으로 아이가 경험 할 수 있는 일상 속 미지의 경험을 뒤로 미루고만 있는 건 아닌지 이번에 해물탕을 먹으면서 또 느꼈습니다.
“우리 애는 아직 어려.”
“우리 애는 소심해서.”
“우리 애는 약해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의 경험으로 만들어 갈 세계와 창의력을 좁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행복에 관한 얘기를 하다 아내가 은채에게 물었습니다.
“은채는 지금까지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아이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러다 힘들게 입을 뗐습니다.
“요즘도 행복해서 언제가 행복한지 잘 모르겠어.”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죠.
“그렇지. 늘 행복한 사람은 특별히 행복한 기억이 없을 수 있지.”
맞습니다. 행복한 사람에겐 특별히 행복한 순간과 기억이 떠오를 수가 없겠죠. 아마 제일 행복한 기억을 꼽으라고 주문해도 아주 오래 걸릴 겁니다. 반대로 늘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에게도 불행한 기억이 따로 없겠죠. 늘 그렇게 느끼며 살 테니까요.
세계는 지각으로 구성됩니다.
아이의 세계도 마찬가지죠. 아이가 일상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이미 행복한 세계를 살아내며 행복한 기억을 저장해서 그 힘으로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부모는 그저 그 세계의 일상을 소중히 지켜주기만 하면 되고 아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함께 두려움 없이 발을 내디디기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부모와 아이 모두 행복한 세계를 확장해가며 행복한 미래의 동반자로 함께 커가는 것인지도 모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