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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24. 2024

들뢰즈, 유동의 철학-우노 구니이치

동해선에서 읽은 책 80

“한 사람의 사상가를 이해하는 일,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는 일, 이것은 도대체 어떠한 과정인 것인가. 들뢰즈 자신은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용하는 일’ 쪽이 중요하다고 종종 말하고 있다...... 오히려 어떤 단편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손에 잡고 사용해 보는 일, 두드리거나 뒤집거나 냄새를 맡거나 해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맥락으로 이동시키고, 사용 방법을 발견하는 일, 그러한 이미지를 들뢰즈는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으로서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P18


주석

앞서 다른 글에 썼듯이, 대체로 누구의 철학을 알기 위해 누구에 “관한” 책이나 누구의 “철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는다. 요즘 애들 말로 하면 일종의 플러팅 단계쯤 되려나. 그렇게 몇 번의 데이트와 시범 경기 같은 절차가 끝났다 싶으면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간다.


들뢰즈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이런 단계를 거쳤다. 들뢰즈에 대해 논문을 쓸 일도 없고 어디 가서 가르칠 일도 없는 사람이기에 이 단계는 무한정 늘어나기 일쑤. 그래도, 뭔가 순차적으로 읽어나가야 되지 않나 싶어서 소위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의 저서를 구해지는 데로 읽어왔고, 나가고 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감각의 논리>를 그럭저럭 읽어냈고 <니체와 철학>을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읽으면서도... ‘에헤이 이거 순서가 잘 못 됐군. <칸트의 비판 철학>부터 먼저 읽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절반 가까이 읽어버려서 그냥 읽어 나갔다. 읽다 보니, 역시나 좀 툭툭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딱 그 부분, 그러니까 들뢰즈의 니체 독해를 설명해 주는 부분이 들어간 책을 찾아, 주석 삼아 함께 읽어나갔다. 마침 또 그런 책이 집에 있었고. 그렇게 서동욱의 책과 함께 집어든 책이 우노 구니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 그런데 어째 이름도, 제목도 낯이 익다 싶었더니, 이 책, 지바 마사야가 <현대철학입문>에서 강추했던 책이었다.


사유와 철학의 전기(傳記)

그 부분, 그러니까 니체와 관련된 챕터를 슬쩍 본 뒤, 궁금해서 앞 장부터 읽어 나가다 보니 이 저자, 들뢰즈와 사연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직계 제자. 저자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파리 8 대학(뱅센 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듣고 그의 지도하에 아르토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이후 둘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가 죽은, 그 해 봄에도 그를 만났다.


저자의 이런 이력이 이 책에 잘 녹아 있다. 들뢰즈의 저서를, 출간 순서를 따라 짚어가며 들뢰즈의 철학적 의도를 설명함과 동시에 그 궤적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들뢰즈는 그 궤적을 따라올 이들을 어디로 데려가고 싶었던 건지, 차분히 설명한다. 이 점이 바로 들뢰즈에 “관한” 다른 책, 또는 들뢰즈 “이론에 관한” 다른 책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이 책은 들뢰즈에 관한 이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사유의 전기이며, 더 나아가 들뢰즈 사용법과 같은 책인 것이다.


비어 있는 공백

비전공자로써, 그리고 그냥 시간이 나서 독서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들뢰즈를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난 어느 순간 묘한 해방감, 느슨함 같은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지바 마사야가 자신의 책 제목을 왜 <너무 움직이지 마라>라고 지었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난 종교적 근거율 없이 존재하는 나를 사유하기 위해 인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삼십 대 중반까지, 그야말로 수요 저녁 예배, 금요 철야 기도회, 주일 낮/저녁 예배, 부흥회, 심지어 어떤 해에는 새벽기도까지 거르지 않고... 게다가 저 이십여 년 간 성가대를 해 왔던 내가 어느 날 불쑥 ‘이제 그만 교회에 나가자.’하고 결심한 뒤에 발견한,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한 뒤부터 말이다.


이후, 집에 있던 책 중에서 대학원 시절, 과제와 발제를 위해 딱 한 챕터- 에드거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 만 읽고 말았던 라캉의 책이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 꽤 오래, 라캉에 관한, 라캉의 이론에 관한, 라캉의 책을 읽어 왔고 그와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소개하는 다른 학자들의 책을 읽어 왔다. 그렇게 라캉과 프로이트, 융을 읽어가며 어딘가에서 훼손되고 상실된 나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 주제는 레비나스의 타자로 넘어갔고, 당연하게도 들뢰즈로까지 이어졌다.


고정된, 그런 건 없다.

라캉을 읽어가면서, 난 고정된 자신을 확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잉태된 순간, 그 찰나의 정확한 순간을 가려내려는 시도만큼 무모한 것이었다. 나 자신을 정확히 알면 조금 괜찮은 인간, 어른이 되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모종의 불가능함 앞에서 약간의 좌절을 맛봤던 것이다.


그 후, 들뢰즈를 읽으면서, 그리고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 니체를 읽으면서 본연의 나를 찾는다는 것, 고정된, 확고부동한 나를 찾는다는 것이 별 의미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나아가, 두 사람 다 그런 거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푸코처럼.


푸코가 과거의 탐구, 계보학을 통해 오늘의 자명한 것의 신화, 그 자명함의 토대와 근간을 이루고 있는 뭔가를 뒤흔들어 버리듯, 니체도 들뢰즈도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의 철학을, 그의 표현을 빌리면 더듬더듬 읽어나가며 지도를 만들어나가는 이들에게 바라는 건,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저 있을 뿐

삶은 무한한 가능성이자,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한 것이 삶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가 이 삶을 살아내면서 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수동적이고 반동적이며 반응적이다. 정말 애석하게도 그렇다. 마치 혼자 테니스 연습을 하기 위해 벽을 향해 스트로크를 한 뒤 튀어 오는 공을 다시 치길 반복하는 것처럼.


들뢰즈가 보기에-거칠고 간략하게 말하면-철학도 마찬가지다. 종교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과 인간의 가치를 정립하고, 야만과 야생, 자연과 다른 인간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이성과 문명, 사유 등을 정립했으며 오늘의 나와 내 욕망, 내 정신의 불안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가족의 역사(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가 존재해야 했다.


더 나아가 수많은 철학자들 또한 누군가의 개념에 반하기 위해 개념을, 그 개념과 개념의 투쟁을 정리하는 더 큰 개념을 추구했다. 니체가, 그리고 들뢰즈가 보기엔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거다. “아니, 정말, 진짜는 뭐야?”,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린 대체로 이렇게 살고 있다. 나다운 걸 찾는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나다움조차 타자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 “다움”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럼, 뭐, 찾지 말라는 거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결론적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그 “다움”의 성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마치 다움의 아나키적 상태라고나 할까? 그런가?


내가 읽은 바로는, 들뢰즈는 자기 자신을 놔두라고 한다. 우린 상상해봐야 한다. 투쟁의 대상이 없는 투쟁, 마주할 상대 없는 마주 섦, 사유의 디딤판 없이 사유하기, 하나의 개념을 얻은 뒤 곧바로 그것을 의심하고 허문 뒤 다시 그 개념을 재정립하거나 아예 그 개념을 버리는 것 등을....


그럼 불안하지 않느냐고? 안 그러면 안 불안한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이전에, 그리고 말년에 어떤 철학자들을 공부하고 해석했는지 생각해 보자. 초반은 흄과 베르그송이었고 마지막은 라이프니츠였다. 경험주의와 생성과 주름.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그 사이에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있고 사유의 레일이 깔려 있다. 그 레일은, 그 궤적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탈주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도망치라는 얘기다. 탈출하고 탈옥하고 벗어나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보통 나를 규정하는 “구조”와 그 구조에 따라 내 위치가 결정되는 “배치”로부터의 탈주만 생각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탈주는 스스로부터의 탈주 아닐까? 그것이 들뢰즈가 니체의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탈출은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아이의 마음으로, 근거율 없는 주체, 과거로부터 소급적용 되는 주체의 오늘을 의심하자고.


성장으로부터 배우는 것들

누군가(기억이 안 난다.) 말했듯이, 육아의 근본 목표는 아이의 독립된 주체로의 섦이다. 이것은 육체적/정신적 성장과 함께 아이가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고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아이를 새로운 변화에 뛰어들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린 이 “성장”이 완료됐다고 인식하는 시점부터 변화도 멈춘다. 반복되는 일상이 되고 자극 없는 삶이 이어진다. 노쇠화는, 육체가 아닌 정신의 노쇠는 이 지점부터다. 결국 이 노쇠를 막는 것은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 발견의 반복을 통해 우린 성장하고, 그 반복과 성장은, 앞서 말했듯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생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결국, 탈주자의 심정으로, 그런 마음으로 나를, 인생을, 사유를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질서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래서 집착하고, 그 집착의 도를 넘어서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나를 완벽하게 규정하려는 그 의도를 버리고 마치 “분열증”에 걸린 사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보고, 느끼지 못하는 뭔가를 느끼고, 어제의 나와는 결별하고 오늘의 나를 의심하며 도래할 가능성, 주름처럼 내재되어 있는 가능한 나에 대한 기대와 전율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어쩌면, 묘한 해방감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사족 1.

앞서 말했듯 저자의 배경으로 인해 이 책은 들뢰즈에 “관한” 다른 책과도, 들뢰즈 “이론에 관한” 다른 책과도 차별화된다. 다른 책들이 마치 골 장면 모음집 같다면 이 책은 경기의 흐름을, 그나마 약간이라도, 읽어낼 수 있는 하이라이트와 같다. 물론 전체 경기를 다 보는 것과는 다르다.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와 흐름의 끊임없는 물결침을 알기 위해선 전체 경기를 봐야 한다. 재방송으로라도 말이다. 들뢰즈의 철학이 하나의 축구 경기라면 난 골모음과 하이라이트를 봤고, 경기 전체로는 이제 전반 15분 정도를 본 느낌이다. 아직 많이 남았다.


사족 2.이 책 뒷 표지에 들뢰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다. 잘 생겼다. 뭔가 뭉클했다. 참고로 들뢰즈는 1995년 11월 4일에 죽었는데, 이 해는 내가 늦게나마 대학에 들어간 해였다. 거의 삼십 년 전 이야기구나 벌써. 11월에 죽은 사람으로... 유재하, 김현식과 함께 기억하고 싶다.
사족 3 . 참고로, 개정판이 나왔다. 일본에서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그걸 아예 새로운 번역자가 새로 번역하고 편집했다고 한다. 최근 들뢰즈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저자의 응답도 실려 있다고....


사족 2.

이 책 뒷 표지에 들뢰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다. 잘 생겼다. 뭔가 뭉클했다. 참고로 들뢰즈는 1995년 11월 4일에 죽었는데, 이 해는 내가 늦게나마 대학에 들어간 해였다. 거의 삼십 년 전 이야기구나 벌써. 11월에 죽은 사람으로... 유재하, 김현식과 함께 기억하고 싶다.


사족 3 . 

참고로, 개정판이 나왔다. 일본에서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그걸 아예 새로운 번역자가 새로 번역하고 편집했다고 한다. 최근 들뢰즈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저자의 응답도 실려 있다고....

사족 2.

이 책 뒷 표지에 들뢰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다. 잘 생겼다. 뭔가 뭉클했다. 참고로 들뢰즈는 1995년 11월 4일에 죽었는데, 이 해는 내가 늦게나마 대학에 들어간 해였다. 거의 삼십 년 전 이야기구나 벌써. 11월에 죽은 사람으로... 유재하, 김현식과 함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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