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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1. 2024

모더니티의 지층들 - 이진경 외

동해선에서 읽은 책 79

근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중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강사든, 교수든 명료하게 설명해주지 못했던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포스트모던 아닐까? 재미있는 건, 이 포스트모던을 설명하려면 모던을 설명하고 그 모던과 그 모던 이후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대체로 다들 포스트모던이라고 주장하거나 우기는 현상만 줄줄이 나열했었던 듯하다.


자, 그래서 언제나 근대는 일종의 모호한 영역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개념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 책이 눈에 보여서 개념의 정리도 할 겸 술술 읽어 나갔다.


이 책은 전체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집중해서 읽을만한 챕터로는 서론 격인 모더니티를 규정하는 몇 가지 화두들, 자본주의, 가정과 주거공간, 어린이, 이동과 교통, 경찰과 도시 등이다.


-근대는 거칠게 말하면 18세기를 변곡점으로 삼는데, 이 책에선 인클로저 운동까지 다루니 더 거칠게 말하면 토지의 사유화, 구획화, 그리하여 토지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그 토지에 의지해 살았던 농부들의 공동체로부터 추출 내지는 소외를 그 시원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뿌리 뽑힌 주체의 부유함에서부터...


지층

거칠게 말하면 모던은 이 사유재산을 발판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공동체로부터 밀려 나온 이들의 도시 유입과 이들의 대중화, 이들의 통제를 위한 사회적/정치적 시스템, 그 시스템의 형성과 유지를 가능케 한 국가와 행정 시스템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형성과 대립, 그 외 푸코가 그 계보를 추적한 임상의학, 감시, 광기 등과 같은 개념과 그것의 관리방법의 탄생까지......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생성되고 정착되어서 그 각각이 하나의 부품이 되어 형성한 일종의 시대적, 사회적, 국가적, 더 나아가 글로벌한 양상.... 그것이 모던, 즉 근대 아닐까?


이 과정이 길게 잡으면... 한국의 역사 구분에 의하면, 무려 고려말부터, 짧게 잡으면 조선 후기부터인데... 그렇다면 모던을 설명하는데 지층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은 그렇게 멀리서부터 온 것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밑에 수많은 관과 지하철의 터널이 있듯이, 더 밑으로 역사의 유물과 익명의 무덤이 있듯이, 더 밑으론 이 지형의 이러함을 설명하는 지각 운동의 추이를 설명하는 암석과 지층이 있듯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형태, 이 드러난 현상의 시원에는 이러한 긴 시간의 누적이 있는 것이다. 지층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변화의 가능성

이 책이 다른 역사책이나 사회학 책과 다른 점은 근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삶, 정치, 사회의 형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 우리는 뭘 할 수 있는지를 각 챕터 말미에 희망적으로 써 놨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희망이기에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거나 그 싹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07년임을 감안하면 그 희망이 현실이 되기엔 너무 시간이 짧았거나 그 희망은 그야말로 희망이었는지도.. 그리고 이 책에 참여한 저자들이 슬쩍 언급한... 순진한 바람이었는지도...


사족....


신문방송이나 사회학 등 사회과학 일반 대학원, 특히 석사 1기나 2기 수준에서, 세미나를 열기에 적절한 수준이다.


이 책에 참여한 저자들은 연구공동체 수유너머 소속이(었)다. 수유 너머는 현재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 소속이거나 출신이었던 저자로는 이진경, 고미숙, 고병권 등이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동해선과 지하철에서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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