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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1. 2024

의미의 지도 - 조던 피터슨

동해선에서 읽은 책 78

(무지) 두꺼운 책을 읽는 법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500페이지 정도 되면 두꺼운 책, 800페이지에서 천 페이지 사이는 아주 두꺼운 책이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버전이나 지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는 두꺼운 책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존 맥피의 <이전 세계의 연대기>, 그리고 이 책, 조던 피터슨의 <의미의 지도>는 아주 두꺼운 책으로 분류된다.


문제는 아주 두꺼운 책을 읽는 방법. 두꺼운 책은 가볍게 손이 간다. 그 무게 또한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다. 무겁지만 참을 만하다. 그러나 무지 두꺼운 책은 가방에 넣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러니 지하철이나 동해선에서 꺼내 읽을 수도 없다. 원래 침대에선 책을 읽지 않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책을 잠자기 전에 읽을 수는 없다. 읽다가 내려놓기에도 애매하고... 게다가 그 부피와 함께 내용-두꺼운 책들은 대체로 내용도 심각하다. - 때문에 더 쉽게 손이 안 간다. 좋다고 사놓고는 자칫 잘못하다간 책 안 읽는 교수들의 인터뷰 배경 화면에 꽂혀 있는 용도로만 사용될 수 있다. 일종의 전시용.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잘 보이는 곳에 놓고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한두 장, 한두 챕터씩 읽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읽으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도 궁금해서 <의미의 지도>를 언제 샀는지 찾아봤다. 알라딘 마이 페이지에는 그런 정보까지 친절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보니 2022년 5월에 샀다. 내 기억으로는 이 책을 작년 여름부터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산건 훨씬 전이었던 것이다. 일 년 동안 벽돌처럼 어디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여하간 작년에 내가 읽기로 선택한 아주 두꺼운 책은 두 권이었는데 하나가 이것이고 다른 하나는 존 맥피의 <이전 세계의 연대기>다. 참고로 후자는 아직도 읽는 중이다. 이렇게 시간을 길게 잡고 두꺼운 책을 집어드는 건 다른 책도 읽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두꺼운 책을 독파하겠다고 작심하고 오로지 그 책만 잡고 있는 동안 읽고 싶은 다른 책을 못 읽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거다.


물론 이렇게 읽으면 중간에 내용을 놓치기도 하고 다른 책의 내용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우리가 무슨 논문을 쓸 것도 아니고... 게다가 중간에 잠시 내용을 놓치면 뒤로 돌아가 몇 장 더 읽으면 금방 내용을 파악한다. 또 역사나 <이전 세계의 연대기>처럼 지리학에 관한 내용이라면 앞뒤 내용의 파악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여기까지 이 책의 오프닝... 너무 길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현상

조던 피터슨은 임상심리학자이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을 상담과 처방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으로 대박이 낫고 뒤이어 <질서너머>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가 젊은 친구들, 특히 남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건 페미니스트와 환경 운동가를 자칭하는 여대생,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라는 책으로도 옮겨진 PC들과의 대화가 담긴 영상에서 보여준 단호함 때문이었다. 분명한 입장, 이론의 전개, 견고한 통계와 근거의 제시...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그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어느 순간 다르게 살기로 작정하고 식습관과 옷차림, 심지어 말투까지 바꿨다는 사실, 그러나 이후 아내의 암 때문에 결혼 생활은 물론이고 자신의 심신까지 잠시 무너졌었으나 다시 회복해 냈다는 사실... 그런 그 사람, 그 자체, 그 배경, 그 뿌리가 궁금했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그가 가장 먼저 쓴 책이자 많은 전문가들이 현재 그의 철학과 사상, 사고의 근원이라 평가하는 책을 읽는 수밖에.


어른 되기

이 방대한 내용을 담은 책을 몇 줄로 요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딱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있다면 저 단어다. 덧붙이면 “성숙한 사람이 되기”가 있을 수 있겠다. 저자가 고대의 신화, 각 민족이 품고 있는 설화, 성경, 각 종교의 경전, 그리고 니체, 러시아 문학, 프로이트, 칼 융의 저서와 이론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저것이다. 덧붙이면 삶의 이유,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줄 알면서도 내게 남은 삶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 그 방법, 그 방법을 통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능한 세상에 대해서도.


모든 신화와 설화, 경전의 구조는 대체로 동일하다. 한 국가, 민족, 인간이 성장을 하고 성인이 되고 안정적으로 국가와 민족이 되고 유지되다가 변화의 순간을 맞는다. 미지의 세계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공동체(국가, 민족, 부족)는 보수적이 되어 전체주의가 될 수도 있고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반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전하여 차원이 다른 성장, 수준으로 진보할 수 있다. 시련에 빠진 왕국에 순례를 떠났던 왕자가 돌아와 그 시련을 준 용과 싸워 이겨 왕국의 평화를 되찾는 얘기엔 이런 진보의 은유가 담겨 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에는 인생을 함축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저자도 이 이야기의 전문을 인용한다. 내용은 이렇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맹수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다 보니 벼랑 끝에 서게 된다. 맹수가 계속 쫓아오자 그는 뛰어내린다.  다행히 벼랑 중간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절벽 밑으론 떨어지진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위에선 맹수가 내려다보고 있고, 아래를 보니 뱀이 그의 추락을 기다리고 있다. 그 와중에 자기가 걸린 나뭇가지에서 꿀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꿀을 찍어 먹어보며 잠시 달콤한 맛을 음미한다. 그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서 나무 아래쪽을 보니 흰 쥐와 까만 쥐가 쉬지도 않고 나무뿌리를 갉는다. 당연히 나무뿌리는 점점 약해져 가는데, 머지않아 나무가 쓰러질 것 같다.


이게 인생이라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쾌락에 몸을 맡겨야 할까? 저자가 퇴폐주의라고 칭한, 모든 무의미를 응시한 채 냉소적으로 살아야 할까? 이도 아니면 자신의 구원을 바라며 초월적인 존재를 향해 기도를 하며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런 것이 인생이라는 걸 모른 채 무지의 존재로 살아야 할까?


이 선택은 <매트릭스>의 인큐베이터에 갇힌, 에너지원으로 전락한 사람의 선택과 비슷하다. 당신이 네오라고 생각해 보자. 가상현실 속에서 무지한 채 살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당신을 깨운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 그 사실을 잊은 채 다시 무지하게 살 수도, 아니면 영웅으로 살 수도 있다. 당연히 영웅의 삶은 괴롭다. 톨스토이 적으로 얘기하면 영웅으로 살아도 언젠간 죽는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다는 결론은 필할 수 없다. 다시 묻는다. 당신이 네오라면 모른척하고 살다가 죽을 텐가? 아니면 영웅으로 살다가 죽을 텐가?


저자가 얘기했듯이 가장 안 좋은 거짓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자기 자신이 영웅으로 살 수 있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 삶이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무지, 또는 무지를 가장한 외면이다. 저자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길게 인용하며 지적한 것도,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한 것도 이 무지를 가장한 외면, 모른 척하며 사는 삶이 잉태하고 있는 원초적 악이다. 그리고 이 악은 자신보다 거대한 권위에 의지하며 살면서 자신의 선택, 자유의지를 그 권위에 일임한다. 이를 통해 선택의 고뇌, 용과의 싸움을 회피한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런 삶이었다. 20세기에 전체주의가 도래한 것도, 21세기에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크리스 헤지스가 <지상의 위험한 천국>에서 폭로한 미국의 기독파시즘도 도피한 이들이 뭉쳐 만들어낸 거짓의 현상이다.


"사실이란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그 자체로 악하지는 않다. 그것은(끔찍한) 현실일 뿐 악은 아니다. 선하거나 악한 것은 바로 사실을 대하는 태도이다. 악과 관련된 사실은 있어도 악한 사실이란 없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부인하는 태도가 바로 악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진정한 인간만이 간절히 구원을 바란다.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부정한다.", 조던 피터슨, <의미의 지도>, P664, 671.


어른 되기의 반복

그렇다면, 우리에겐, 그리고 나에겐 아직 남은 질문이 있다. 그래,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저자는 무려 800페이지를 돌아, 돌아왔다. 스스로 선한 것을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앞서 악은 악한 사실이 아니라 끔찍한 사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는 저자의 말을 기억하자. 또 그 선의 기준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나 단체에 일임하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말자. 자신의 어리석음,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르고 지금까지 살았다는, 아니 그 의미를 모른다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인생의 의미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주장하는 단체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의탁하지 말자. 말세엔 여기저기서 선지자라고 우길 것이라는 성경의 경고도 함께 기억하자.


다시, 저자의 말을 옮기면, “자의식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약함을 증오하지 않고 의미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성큼 나갈 때, 한 인간의 성숙은 시작된다. 저자가 말했듯, 영웅은 자발적으로 용과의 전투에 참가한다. 더 큰 선, 더 큰 삶의 의미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 그 삶은 용과의 투쟁이다. 나라는 왕국의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간 투쟁. <더 그레이>의 마지막 장면과 같은.


사족...


이 글은 길어질 것 같아 한글 프로그램으로 쓴 뒤 복사해 붙였다.


<이전 세계의 연대기>는 아직 다 못 읽었다.


새로 읽어나갈 무지 두꺼운 책의 후보로는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이진경의 <노마디즘> 등이 있으나... 일단은 전자를 <이전 세계의 연대기> 옆에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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