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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22. 2024

니체와 철학 - 질 들뢰즈

동해선에서 읽은 책 83

니체라는 드라마

책이 얇다. 참고문헌까지 쥐어짜도 350페이지가 살짝 넘는다. 그런데 제법 오래 걸렸다. 한 달가량 걸리지 않았을까? 책이 쉽고 어렵고의 문제이기 전에, 하고자 하는 말의 무게가 무거웠다. 아니 그게 궁금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 들뢰즈는 니체의 입을 빌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게 궁금했다.


알다시피, 들뢰즈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칸트, 프루스트의 글을 빌어,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심지어 베이컨의 그림을 빌려서도. 이런 그의 글을 주석의 연속이라고 폄하하던 사람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뭐랄까,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않은 거라고나 할까. 분명 내가 읽은 들뢰즈의 이 소위 “주석서”들 안엔 그의 메시지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책을 느리게 읽었던 첫 번째 이유이자 궁극적인 이유는 그 메시지와 메시지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들뢰즈는 “니체”를 주인공으로 삼아 자신만의 드라마를 보여줬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어느 한 장 무심히 읽을 수 없었다. 비극으로 시작해 적극적인 힘과 반응적인 힘, 원한과 가책, 초인과 변증법의 논의까지. 드라마는 수많은 복선과 인물과 사건들의 중첩 속에서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찾고 싶었던 것 : "참 나"와 살아냈던 "힘"

앞서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교회를 다니는 그 시기 동안, 어쩌면 기억이 거슬러 올라가 유년기를 복원할 수 있는 그때부터 삼십 대 중반까지, 정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그 시절, 나는 무슨 힘으로 십 대와 이십 대, 삼십 대, 더 나아가 사십 대까지 살아냈는지 궁금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를 다니는 동안, 그 종교 뒤로 사라졌던, 은폐되고 억압됐을 그 시기의 진짜 내가 궁금했다는 것이 더 맞겠다. 나를 마주 보기 위해 책을 읽었고 읽다 보니 들뢰즈까지 다다랐다. 그러니까 들뢰즈를 읽겠다고 작정했던 것이 아니라 읽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작은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나를 찾는 것은 접었다. 들뢰즈를 읽어가면서, 그리고 라캉의 이론이 아니라 그의 정신분석의 목적에 대해 숙고하면서 결국엔 “참 나”, “참 자아” 같은 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불교적인 용어를 빌려 말하면, 그저 이 순간 찰나처럼 숨 쉬고 있는 나를, 육적인 부피를 가진 나를, 매 순간 변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한 가지 과제가 남았다. 그 시기의 나를 밀고 나갔던 힘은 뭐였을까? 원한과 가책, 반응적 힘에 대해 읽으면서 서서히 알아갔다. 니체가 왜 그렇게 기독교를 비판했는지, 더 나아가 사도 바울과 가톨릭과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심지어 그 종교와 신의 대립적 존재로써 인간과 인간의 이성의 정립, 더 나아가 헤겔의 변증법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를.


거짓 자유, 죄인으로의 호출 ; 반응적 힘/원한과 가책

<람보 4>로 기억된다. 동남아의 어느 나라의 잔혹한 군벌이 양민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잡아간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역시 양민들을 가득 잡아 이동하다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는 산 중턱에 트럭을 세우고 이들을 내리게 한다. 눈을 가린 양민들을 논 앞에 줄지어 세운 뒤, 잠시 후, 군벌의 군인들이 물이 찰랑찰랑 차있는 논에 대인 지뢰를 듬성듬성 던져 넣는다. 던진 이들도 어디 던졌는지,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모르는 상황. 이후 양민의 안대를 풀어주고 도망가라고 한다. 지뢰를 피해 이 논을 건너 살아남으면 풀어주겠다면서.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총으로 협박한다. 결국 양민들이 뛰기 시작한다. 군인들은 누가 살아남을지 내기를 한다. 여기저기서 피와 살이 흩어진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함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불러 세운다. 회개를 하고 자유를 얻으라고 한다. 그렇게 가상의 자유(함)를 얻어 살아가는데 고난과 시련의 지뢰가 터진다. 답은 둘 중 하나다. 그건 예비하신 시련과 고난이거나 자유(함)를 얻은 이의 회개가 부족해서다. 엄밀히 말하면 면죄부는 어떤 형태로든 반복 생산 되고 있다. 기독교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묶일 수밖에 없으며 미래를 향하는 여정은 이 순간과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평가된다. 가책의 존재들이 서구 유럽, 그리고 그 문화를 수입한 수많은 나라에서 (재)생산, 대량 생산된다.


니체가 보기에, 이 종교적 도그마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시도, 신을 죽이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 이성의 발견과 그 이성을 딛고 서는 독립과 자립의 시도 또한 신이라는 존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힘이다. 그야말로 반응적인 힘.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곤 하는 권력 의지라는 것은 결국 이 인간 존재에 대한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부정, 부정의 부정 반복 생산이자 투쟁에 불과한지 모른다.


개인의 역사, 민족의 역사 등이 개입된다. 특히 개인의 역사는 오늘의 실존의 발목을 잡는다. 얼마 전 방영 됐던 <김이나의 비인칭 시점>에서 다뤄졌던 강원랜드를 떠나지 못하는 도박중독자들처럼, 많게는 이십억 원이 넘는 재산을 받쳐가며 이십몇 년의 세월을, 그야말로 허송세월했지만 여전히 돈만 생기면 카지노와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그 사람들처럼, 그야말로 저당 잡힌 삶이다.


이건 일종의 앞서 말한 그 “논에서 지뢰 찾기”와 같은 것이다. 등 뒤에서 겨눈 총을 염두에 둔 채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 길은 그야말로 주체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닌 것이다. 그 길은 노예의 길이고, 포로의 길인 것이다. 설령 그 지뢰를 다 피해 논을 건너 숲으로 들어가 자유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횡단의 공포는 여전히 그의 삶을 따라다닐 것이다. 심지어 그가 저항과 복수를 위해 성공하여 군대를 꾸려 그 군벌과 맞선다 해도, 그래서 승리를 한다고 해도, 심지어 다른 정부, 다른 나라를 만들었다 해도 그 삶은 그의 것이 이미 아니다. 그의 삶 전체는 그 포로의 순간 이후부터는 그의 것, 그가 주인으로 산 삶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선한 영향력"이나 "긍정 마인드" 같은, 일종의 신흥 종교와 같은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스며 있는 이데올로기, 그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슬로건들도 반응적인 힘, 그 힘의 영향에 불과할지 모른다. 특히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그런 것의 전형 아닐까? 이해라는 말이 그러하듯, 영향력이라는 말 안에도 독단과 타자를 향한 폭력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뭔가에 반하고 대립하는, 악한 것과 부정적인 것의 설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런 상대 없이는 자생할 수 없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긍정하는 것은 또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 자체가 삶에 불러일으키는 대립의 고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맡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우월한 가치들의 무게 아래서 삶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며, 그것은 삶을 가벼운 것, 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당신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당신들은 그것을 창조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당신들의 이성, 당신들의 상상력, 당신들의 의지, 당신들의 사랑은 그 세계가 되어야 한다.>.... <자기를 자유롭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P319


진짜 긍정 - 나귀와 낙타의 짐/"아니요"라고 말하기

나귀와 낙타는 짐을 싣고 간다. 사막으로, 험한 길로 간다. 그들은 짐은 안 진자에게는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짐을 진자에게는 함께 짐을 벗고 자유를 찾자고 한다. 아니, 오히려 그 짐 지움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원한과 가책을 넘어 금욕적 삶의 유지, 더 나아가 삶 자체를 마치 고행이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런 삶이다.


여기 이 순간의 세상에, 종교에, 권위에, 이론에, 심지어 나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이에겐 순전한 긍정의 힘이 있다. 진짜, 어디에도 메이지 않으며 어디에도 대립하지 않으며 그 어떤 부정도 대립항으로 허락하지 않는 긍정 그 자체로서의 긍정.


생성/다수/우연/놀이와 춤의 가벼움 - 영원회귀를 반겨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중국 은나라 왕이 했다고 하니 몇 년 전 말인지. 그런데 이 말, 의외로 들뢰즈와 니체의 영원회귀와 생성, 우연에 딱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린 저 새롭다는 말, 매일 새롭게 또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말을 발전의 맥락으로 해석하고 수용한다. 좀 더 나아져야 한다는 맥락으로 말이다.


더 나아가 이 맥락의 수용엔 반성(反省)의 의미가 삽입된다. 그렇다면 그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동어반복에, 술어만 교체한 것이다. “난 00입니다.”하고 말할 때, 그 00은 나를 설명하는 술어이지 나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00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난 고정시킨 채 그 설명만 바꾸는 것이다. 이건 마치 난폭운전자가 어떤 차를 몰아도 그렇게 운전하는 것과 같다. 품위 있는 최고급 세단으로 차를 바꾼다고 해서 사람까지 바뀌진 않는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생성과 다수에는 주체의 해방이 담겨 있다. 긴 세월 속에 포개어져 있는, 매 순간, 그 순간마다 역시 포개어져 있는,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리면 주름 속에 잠재태로 있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다수와 생성에 담긴 의미다.


결국, 어린아이가 주사위 놀이를 하듯 순수하게 자신을 우연 속에 내던지며 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내가 과거의 베일 뒤에 숨겨 놨던 미래의 나와 만날 수 있다. 기독교의 예정설을 닮은 이 세상의 가치 판단 속에 묻혀 있던 나를 만날 수 있다. 그 반복, 그 무한한 생성과 창조의 순간을 기대하며 사는 것, 그것이 니체가, 그리고 니체의 목소리를 빌려 들뢰즈가 우리에게 당부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사족 1.

딸의 친구 중에 온유라는 사내 녀석이 있다. 제법 난이도 있는 책 - 예를 들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도 많이 읽었고, 특히 과학 계열의 책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얼마 안 있으면 생일이라 해서 책을 한 권 선물할까 싶던 차에, 내가 가진 책 중에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생각났다. 이 녀석이라면 즐겁게 읽지 않을까 싶어, 마침 그 녀석과 영상 통화를 하던 딸에게 책을 건네며 읽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읽었다고 했다. 난 대학원에 들어가서야 읽은 책을 초등학교 6학년이 “이미” 읽었단다.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고 두려움 없이 읽고 싶은 건 아무거나 붙잡고 있는 아이들이 언제부터 책을 읽지 않게 되는 걸까? 언제부터 여러모로 비슷하게 살아가게 되는 걸까?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성인 열 명 중 일곱 명은 종이책을 일 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는 걸까? 더 슬픈 뉴스는 “월평균 소득이 500만 원 이상인 고소득층의 독서율은 54.7%였으나, 월 소득 200만 원 이하인 경우 독서율이 9.8%”라는 뉴스....


사족 2

이 책은 수년 만에 줄을 쳐가며 곱씹으며 읽었다.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새로운 번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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