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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05. 2024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가타오카 이치타케

동해선에서 읽은 책 82

사태의 본질

가끔 중요한 걸 놓칠 때가 있다. 장인이 만든 칼이 있다고 치자. 그러니까 검객이 쓰는 그런 칼 말이다. 그런 칼을 보면 당연히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다. 그 칼에 글씨가 새겨져 있고 무늬까지 새겨져 있으면 마치 그림을 보듯 감상하게 된다. 칼집과 손잡이에 시선이 가면 심미적인 것이 칼의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칼은 찌르고 베어야 한다. 피를 부를 수 없는 검은 검이 아니다.      


지난 세기말, 대학원에서 처음 라캉을 접했을 때, 라캉의 이론을 철학이자 대중문화 비평의 틀로 받아들였다. 주체가 어떻고 대타자가 어떻고 팔루스니 거세니 같은 말들은 철학적 개념이었다. 그 개념들을 도구 삼아 광고를 분석하고 대중문화와 사회의 현상을 분석했다.      


이후, 십여 년 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나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라캉을 중심으로 인문학 책을 읽어 나갈 때, 이 때도 역시 라캉의 이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그 개념을 이해하는데 전력했다. 심지어 프로이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새삼,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였다. 그렇다면 그는 그걸로 뭘 하고자 했던 걸까? 정신분석의 목적은 도대체 뭘까? 이 책, 이 얇은 책은 그 답을 하고 있다.      


나타나는 주체

자아를 찾아주고 심리를 치료해 준다는 곳은 많다. 정신분석은 이런 데 관심 없다.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면 정신분석은 “또 하나의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그 주체의 출현은 순간적이기에 바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다. 결국 “주체는 언제나 좀 더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나 “그것이 아닌 것”, “그때까지의 생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앞서 다른 글에서 썼듯이, 열세 살 이후부터 삼심 대 중반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 그만 나가자고 결심한 뒤 바로 안 나가게 된 뒤부터 난 나 스스로에게 하나의 과제를 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어떤 근거율 없는 나 자신을 찾고 구축하는 것이었다. 학연, 지연, 인맥, 심지어 가족과도 크게 인연이 없이 성장한 내가 나 자신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종교뿐이었는데, 그것 없이 나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몇 년 후 딸을 낳고 키우면서, 또 쓸데없이 더 학교에 다니면서 잠시 이 과제를 묻어두고 살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이 과제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쩌면 들뢰즈와 라캉이 조우했던 시기, 레비나스와 라캉이 스쳐갔던 시기에 “어쩌면 고정된 주체란 건 환상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걸 찾아야 할까? 이후 들뢰즈와 라캉을 더 읽으면서 그 강박으로부터 약간은 가벼워졌다. 그래... 그냥 살자, 하고. 이 책은 이런 내 생각에 대한 작은 해답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말로 작은 결론을 내리자면, 결국 “주체는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해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특이성,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발견하는 것은 특이성이다. 인정해야 할 것도 이것이다. 우린 개별적이다. 그러나 우린 일반성의 세계에서 살기 위해 특이성을 상실하게 된다. 아니 스스로 유폐시킨다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결국에는 일반성의 세계를 균열시켜서 특이성을 출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을 받으러 온 사람의 그 증상이 사라지진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목적이 아니다. 정신과처럼 약을 처방하거나 심리 치료를 하거나 행동 처방을 내려서 당장의 삶을 바꾸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저자가 거듭 말하듯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자신의 다름을, 그 특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이 목표로 하는 것은 “환자의 사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사는 방식을 가지고 살아왔으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사는 방식을 선택하면 좋을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의 전반적인 사는 방식을 재고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도록 환자의 여행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 라캉의 제자들,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그 어려운 라캉의 이론을 공부하며 스스로가 환자가 되어 정신분석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대타자, 사물, 주체, 상상(계), 상징(계), 환상, 실재(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법 등은 이 “여행”을 가기 위해 싼 짐에 불과하다. 나나 이 이론으로 정신분석을 제외한 별의별 것을 다한 학자들은 이 “짐”에 뭐가 들었는지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 “짐” 안에 든 것들이 무엇이고 어떤 용도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고 그 이해한 걸 열띠게 설명해 왔을 뿐이다. 여행의 목적이 뭔지 잊고 말이다. 아니 애초에 짐을 왜 쌌는지 까맣게 잊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중에 더 자세히 쓰겠지만 <니체와 철학>을 읽으며 내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동안 어떤 동력으로 살아왔는지, 그러니까 십 대와 이십 대, 삼심 대의 몇 년을, 아니 심지어 사십 대 중반까지도 어떤 힘으로 살아왔는지 알아채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걸 요즘 보내주고 있다. 보내주려 애쓰고 있다. 딸은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그렇게 살지 않도록 나 스스로가 먼저 변하려고 애쓰고 있다.      


언젠가 얘기했듯이, 수영장의 우리 반은 운동의 강도와 질에서 우리 수영장 전체 클래스 중에서 손꼽히는 반이다. 1번의 실력이 워낙 출중하고 뒤따르는 2번 아저씨의 우직함, 3번의 날렵한 아줌마의 노련함이 선두 그룹을 형성하며 전체를 리드한다. 여기에 나와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 그 외에 몇몇 젊은(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뒤를 받친다. 문제는 이 젊은 남자 회원들의 체력... 워낙에 킥을 많이 차면서 속도를 내다보니 빨리 지쳐서 후미 그룹으로 점점 처지게 된다. 오늘도 그렇게 꼬리가 길어졌다.      


2번 아저씨와 오늘 잠깐 얘기했듯이, 아직은 물을 잡을 줄 몰라서 그렇다. 물만 제대로 잡을 줄 알면 앞에 물을 뒤로 밀어내는 힘으로 갈 수 있다. 발은 그저 거들뿐이다. 오늘을 예로 들면, 오늘 두 번째 메인 세트는 50미터 자유형 다섯 개를 중간에 잠시 틈을 두고 두 번 하는 것이었는데, 내 경우엔 첫 번째와 두 번째 바퀴는 발을 안 차고 스트로크로만 쫓아갔다. 세 번째와 네 바퀴는 왼 발 원 킥이나 투 킥으로, 다섯 번째 바퀴는 다시 킥 없이 갔다. 그렇게 해야 모든 랩과 세트를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영 얘기가 길어졌는데, 결국 인생도, 수영도 변화를 주고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성장한다. 아니 그 변화 자체가 인생의 본질이고 그 변화로 인해 변신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이 순간 적절하게, 만끽하며, 그래도 나름 전력과 최선을 다하면서, 그러나 너무 애는 쓰지 말고... 뭐 그렇게 살아내고 살고 살아나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요즘은 말이다.      


사족


친절하게 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라캉 아닌가? 잘 모르는 사람에겐 약간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결코 난해하진 않다. 친절하면서도 진지하다. 예도 적절하고 문장도 간결하다. 물론 번역가의 몫도 크겠지만...     


이 사람, 1994년생이다. 처음엔 오타인 줄 알았다. 94학번을 잘 못 쓴 줄 알았다. 그러나 진짜 94년생, 이 책을 썼을 땐, 그러니까 2017년엔 아직 이십 대였다. 아니 지금도 그렇겠는데? 그런데 이 친구, 무지하게 진지하다. 라캉 파의 정신분석가들은 스스로가 내담자가 되어 자신의 정신분석을 누군가에게 받아야 하는데, 지금 그 과정에 있다. 참고로 이 과정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여하간 대단하다고 밖에는.     


이 친구가 라캉을 알게 된 계기가 나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문예 비평 등에서 먼저 그 이름을 접한 뒤, 나중에 정신분석에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이 길로 들어섰다. 아 물론 나는 여전히 그 길 밖에 있다. 난 이 정도까지 진지하지도 않고 이만한 인내심도 없다. 그가 특이한 만큼 나도 특이하니까.     


마지막으로 일본판 제목이 재미있다. 아니 더 직접적이라고나 할까? 어째 일본 특유의 슬랩스틱 개그가 곁들여진 할인마트 광고가 생각난다. 제목은 <질풍노도 정신분석입문 - 자크 라캉의 사는 방식에 대한 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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