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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19. 2024

"만약에"가 필요 없는 삶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53

포항에 갔다 왔다. 우리 팀은 주기적으로 독도의용수비대의 생존 대원들의 인터뷰를 하는데, 생존 대원 중 한 분인 박영희 선생님이 포항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고로 박영희 선생님은 독도의용수비대의 대장인 홍순칠 선생님의 미망인이시다.     


포항 가는 길

울산 작업실에 가니 감독과 조감독이 있었다. 열한 시쯤 출발해서 포항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출발 시간이 좀 남아 다음 달에 있는 캠페인 촬영의 세부 콘티 논의를 했다. 감독은 재주 좋게도 부산 강서구에 있는 한 대형 스튜디오를 찾아냈다. 촬영은 그곳에서 진행된다.      


조감독은 감독과 알고 지낸 지 20년 정도 된다. 내가 감독과 알고 지낸 시간보다 길다. 나하고 안면을 튼 지도 오육 년 되지 않았을까? 남자 세 명이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울산도심에서 고속도로를 올려 포항으로 향했다. 울산에서 포항 사이에는 경주가 있다. 울산에서 경주까지 30분, 경주에서 포항까지 3,40분 정도 걸린다. 주소지가 입력된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포항 중심가가 아닌 조금은 한적한 곳으로 안내했다.   

   

용도를 모를, 육교도 아니고 탑도 아닌 조형물이 중심에 서 있었다. 도심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닫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치 시즌이 끝난 9월 말의 해수욕장 같은 분위기였다. 나중에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이곳은 포항의 구도심으로, 그 조형물은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어느 시장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니 구도심은 부활을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이날 우리가 본 바로는, 그 애씀의 효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주소지는 오래된 현대아파트 단지와 낮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동네였다. 선생님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보니 차단봉도 없었다. 당연히 단지에 들어오는 차량을 인식하는 기계도 없었고 유럽의 성문 따위를 흉내 낸 어설픈 파사드도 없었다. 밖과 안의 경계가 희미했다.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단지에 들어갔다.    

  

제법 높았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십 분 후에 올라오라고 했다. 감독의 짚 차에서 내려 층수를 셌다. 십오 층이다. 동과 동 사이가 넓다. 야외 주차장의 차간 간격도 넓다. 조경수들도 굵다. 딱 봐도 지난 세기의 작품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 봤더니 1989년에 입주가 시작됐다고 한다.      


인터뷰

촬영 장비 때문에 좁은 엘리베이터에 두 번 나눠 탔다. 조감독이 먼저 올라갔다. 선생님 댁에 들어가니 시원했다. “내가 평소에 에어컨을 안 틀어놔요. 그래서 더울까 봐. 시원하게 해 놓으려고 십 분 뒤에 올라오라고 했어요. 이게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는 거 맞아요?”, 2년 만에 뵙는 선생님은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단어하나 허투루 선택하지도, 발음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말하셨다.      


인터뷰는 두 시간이 넘게 진행 됐다. 중간에 감독이 떠다 드린 물을 약간 마신 거 외에는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하셨다. 진행을 맡은 나 또한 엄청나게 집중했다. 지난 인터뷰 때와는 다른 내용을 듣기 위해 질문의 변화를 줬고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한 선생님을 위해 평소 내 목소리보다 서너 배는 크게 말했다. 집에 온 나를 본 아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했다. 생각보다 더 집중했던 모양이다.     


인터뷰가 마무리되고 촬영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선생님의 휴대폰이 크게 울렸다.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관장님의 전화였다. 서기종 선생님의 부고를 알렸다. 이제 생존하고 있는 대원은 선생님과 울릉도에 계신 정원도 선생님뿐이다. 


정리가 끝나고, 선생님이 바나나를 먹고 가라고 내 오셨다. 감독과 난 바나나를 먹으면서 아파트와 조용한 동네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십니까?”하고 감독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싱긋 웃으며 대답하셨다. “사실은 내가 포항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연고가 없어요. 그런데 포항하고 울릉도가 가깝잖아요. 그래서 포항에 사는 거예요. 몸이라도 좀 가깝게 있으려고. 이 나이에 새로 친구를 사귈 수 있나요. 그래도 다들 인사는 하고 지내요. 초콜릿도 사가지고 놀이터 가서 나눠도 주고 그래요.”


돌아가고 싶은 순간

돌아오는 길, 감독은 부산 범일동에서 다음 촬영에 출연할 연극배우와 미팅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조감독이 동행을 자처했고 가는 길에 날 내려 주기로 했다. 이동하는 중에 두 번 휴게소에 들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감독은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었다. “아, 난 돌아가고 싶은 때는 없어요. 다시, 처음부터 살라면 또 모르겠는데 젊었을 때로 돌아가는 건 큰 의미 없는 거 같아요. 우리가 살면서 진짜 최선의, 최고의 선택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그때는 모르죠. 다시 젊었을 때로 돌아가서 어떤 선택을 해도 지금의 삶보다 나아질까요? 난 솔직히 모르겠어요.”     


잠시 후, 두 번째, 휴게소에서 나온 후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또 살면서 최고나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선택엔, 왜 거는 게 많잖아요. 베팅할 게 많죠. 그래서, 뭐랄까, 적당한 선에서 선택을 하죠. 예전에 제가 강사 할 때,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연애할 때 과에서, 학교에서, 여하간 니들이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잘 생기고, 제일 예쁜 애랑 하라고, 뭐 착해서, 똑똑해서, 이해심이 많아서 따위 같은 이유로 연애하지 말라고. 어차피 살면서 그런 사람과 연애해 볼 기회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하니까 젊을 때 해보라고 했죠.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 맞는 말 같네요.”     


세월의 무게

독도의용수비대의 형성은 올해로 딱 70년이 된다. 한국 전쟁 이후, 독도의용수비대는 꽤 오랫동안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60년대 들어서, 처음 훈장을 받았으나 그나마도 제한적이었고, 이후 김영삼 정부 들어서 청와대에 전원 공식 초청받아 훈장을 포상받고 국가유공자 자격을 얻었다. 대장이었던 홍순칠 선생님은 1986년, 5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니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한으로 남아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따르던 대원들의 명예를 높여달라는 유언을 박영희 여사님에게 남기셨다. 여사님은 그 후, 무려 40여 년 간, 대장님과 대원들의 업적과 명예를 위해 전력을 다하셨다.      


돌아오는 길, 잠시 생각했다. 57세면 지금의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 당시라면 막 정년퇴직을 했을 나이다. 지금이라면 한창 일할 나이고, 밖에서 우리와 만났으면 형 동생 할 나이다. 학교를 다녔다면 동시대 학번이다. 세상을 떠난 이후 40여 년 간 홀로 자식을 키우시면서 활동하신 여사님을 생각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70년 역사를 생각했다. 57세, 40여 년, 70년... 박영희 선생님이 만난 대통령만 대여섯 명이다. 흔히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삶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사님이야말로 그런 분 중 하나시다.      


"만약"이라는 단어의 가벼움

여사님은 결혼 전 학교 교사셨다. 대장님을 안 만났으면 대구에서  모두의 스승으로 곱게 나이가 드셨을 것이다. 출발 전날, 그게 궁금했다. 만약에 대장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실제로 질문을 했다. 답은 간단명료했다. 선생님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만나 이렇게 산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불꽃같은 삶이라는 단어를 많이들 쓰는데, 그런 삶은 이런 삶이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삶,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남은 삶을 던지는 삶. 이런 삶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한 없이 가볍다. 다시 산다면, 하는 질문 따위는 무가치하다. 한껏 살아낸 사람에게 평행 우주 같은 상상은 부질없다.      


30년이 넘은 아파트에 가는 길, 우리가 봤던 그 도심은 한 때 번창했었다. 포항시청이 그곳에 있었다. 시청이 이전하고 인근에 백화점이 생기면서, 21세기 들어 완만한 하락세를 겪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세월 앞에 장사 없고 변화의 물결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종종 예외도 있다. 산 같고 바위 같은 그런 삶이.     


이 글을 쓰다가, 잠시 커피를 타러 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선생님이다. 잘 들어갔는지를 먼저 물으셨고 촬영한 걸 나중에 줄 수 있는지를 이어 물으셨다. 어쩐지 어제의 촬영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이런 부탁을 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덧붙인 말에 내가 할 대답이 없었다. “아휴 아직 정정하십니다.”와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촬영본의 편집본과 기획하고 있는 영상의 완성본을 함께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어제, 선생님이 즐거우셨다고 했다. 어제 뵙게 돼서 영광이라고 답했다. 건강하십시오, 하고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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