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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l 20. 2024

행복의 조건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56

다시 찾은 목포

이번 주 금요일, 목포에 또 갔다. 중공업, 특히 플랜트라는 이름을 가진 기업은 사업 영역이 다양하다. 크게 육상과 해양 플랜트로 나뉘고, 선박 관련 분야와 에너지 개발 분야까지 하는 기업도 있다. 목포에 있는 고객사는 이 모든 영역에 엔지니어링이라고 통칭되는 관련 서비스까지 하는 기업이다. 그러다 보니 각 사업 팀의 특성과 요구사항이 시나리오에 반영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각 팀의 수장을 한 데 모아 각 팀의 특성과 요구사항을 들을 필요가 있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홍보 영상의 목표와 제작 과정 등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또 가는 김에 대불공단 내에 산재해 있는 각 공장과 야드를 견학하고 촬영 환경을 파악하기로 했다.      


여덟 시 사십 분, 고속도로와 가까운 인제대학교 역에서 감독을 만났다. 경전철로 낙동강 위를 건너는 동안,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이 울산에서 부산으로 올 때는 소나기를 맞으며 왔다고 했다. 고속도로에 올랐다. 진주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호남의 경계를 넘으며 고속도로가 왕복 4차선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자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천인지, 장흥인지를 지나면서부터는 와이퍼를 작동시켜야 했다. 목포를 코앞에 둔 영암에 들어섰을 땐 비가 멎었는데, 목포에서 지나가는 비를 만났다. 갔다 오는 동안, 이렇게 짙은 먹구름과 옅은 구름, 소면 같은 가는 비와 소나기를 번갈아 만났다. 감독과 난 날씨 참 지랄 같다고 투덜거렸다. 8월, 촬영에 들어가면 날씨가 도와줘야 할 텐데, 하는 걱정과 함께.     


미팅은 크게 두 번 있었다. 한시 반, 상무와 부장급인 네 개의 사업 팀장과 마주하고 1차 회의를 했다. 다른 두 팀장은 다른 회의 때문에 늦는다고 했다. 미팅은 준비해 간 간략한 PPT로 홍보 영상 제작의 대략적인 목표와 시나리오의 구성, 시놉시스 등을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건 내가 맡았다. 그 뒤, 각 사업 팀 별로  사업의 내용과 특성, 현 상황, 비전 등을 담은 문서 - 일주일 전에 폼을 만들어 담당자를 통해 배포했다. -를 바탕으로 작가 입장에서의 코멘트를 했다. 이 또한 내 몫이었다. 그 뒤로도, 실무적인 대화가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졌다. 이후, 직원 세 명과 함께, 사내 통행용 승합차를 타고 공장 투어를 했다.      


두 번째 미팅은 다른 일정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인클로저 팀의 상무와 했다. 인클로저는 쉽게 말하면 일종의 대형 배터리를 쟁여 놓은 박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해상/해양/풍력 발전소 등에서 생산한 전기를 저장하기 위해서, 또는 산업 현장이나 선박에서 발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팀의 상무는 홍보 영상의 용도에 대해 기업의 대표와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길게 피력했고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향후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그런 목적을 가진 영상이 필요해질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장기적인 PR의 맥락에선 기업의 메시지 관리와 미디어 관리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했다. 이 미팅은 세 시간 정도 이어졌다. 상무는 달변가였고 또 전문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 것은 다섯 시가 넘어서였다. 중간에 휴게소에 한번 들른 후 논스톱으로 가기로 했다. 감독은 시간이 늦었으니 날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세 시간의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기가 막힌 이야기

갈 때는 주로 일 이야기를 하지만 일의 긴장이 사라진 돌아오는 길에는 사적이고 깊은 속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마 올해 들어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인 것이 분명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고조된 머리가 식지 않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차 속에서 나눴다. 행복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윤리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와중, 우린 행복한 부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각자가 아는 기가 막힌 커플의 이야기를 했다. 먼저 감독이 했다.     


“우리 마누라 꼬치 친구(불알친구의 다른 표현으로, 감독은 고추를 꼬치라고 발음한다.)가 세 명 있거든요. 그중 한 명이 연애를 씨~게 했어요. 남자가 마, 아주 홀딱 반해갖고, 365일, 매일, 장미 한 송이를 받쳤던 거라. 거기에 혹해서 이제 결혼을 했죠. 남자가 대형 크레인을 했거든요. 돈을 진짜 잘 벌었어요. 애도 둘 낳고 잘 살았죠. 그런데, 남자가, 마, 도박에 빠져 버린 거라. 돈을 그냥, 후루룩 까먹었지. 집도 날려 먹게 생긴 거야. 애들은 크는데, 집도 없고 공부도 못 시킬 판이니, 시댁이 나서서 빨리 이혼해 주라고, 집이라도 건져야 되지 않겠냐며, 그렇게 재촉했다니까. 그래서 이혼했어요. 그 친구는 이제, 애들 가르쳐야 하니까 낮에는 보육 교사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난 이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줬다.      

“제가 예전에 다니던 시골 교회에 업둥이 여자 애가 한 명 있었어요. 이제 그 애가 업둥이인건 교회의 어르신들은 알지만 애들은 몰랐죠. 그때 그 교회에 제 또래에 남자 애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여자 애 오빠도 있었어요. 남자 애들끼리 친하고 엄마들이 같은 교회 다니니까 당연히 서로 오가고 그랬죠. 그런데 친하면 친할수록 그 집 남매를 보면 참 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하간, 그 여자애 하고 오빠들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우리가 귀여워했죠. 걔는 초등학교 때부터, 크면 저한테 시집올 거라고 하고... 그래서 제가 다 크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그러고 놀렸죠.


그 후에 제가 부산에 오고 어떻게 사는지 잊고 살다가, 그 교회 형 중에 부산에 출장 온 형님 하고, 몇 년 전에 밥을 먹게 됐어요.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하다 그 여자애 얘기가 나왔죠. 그 형이 말하길, 그 형이 만든 가스펠 밴드에서 같이 활동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여자애가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를 전공으로 대학을 갔거든요. 실용음악이었나? 어찌 됐든 그랬는데, 충남의 한 시골 청년이 우연히 그 가스펠 밴드의 집회에 왔다가 그 여자애한테 완전히 홀딱 반한 거예요.


그런데 음악하는 애니까 좀 깔롱지는 남자가 좋지 않았겠어요? 그야말로 콧방귀도 안 뀐 거예요. 근데 남자가 포기 안 하고 그냥 우직하게 따라다닌 거죠. 결국, 여자애가 그 한결같은 마음에 반해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가 천안에서 농사를 엄청 크게 짓는 집의 외동아들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냥 농사꾼이 아니라, 이런 말 있죠? 이 동네를 지나가려면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못 지나간다, 뭐 이런 말. 그 집이 천안에서 거의 그런 소리를 듣는 집안이었던 거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남자가 건축인가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사업가여서 돈도 잘 번다는 거죠. 나중에 그 여자애랑 페이스북 친구가 돼서 보니, 충청도에 집 한 채, 제주도에 또 한 채, 어디에 별장, 뭐 이렇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달은 제주도에 지내고 그런 식이죠. 기가 막히지 않아요? 친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큰 여자애인데, 그리고 촌스럽다고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는 남자였는데, 자기 인생이 그 남자를 만나 이렇게 달라질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괜찮은 인생

그 뒤로도 우린 자기가 아는 기가 막힌 인생의 굴곡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90년대 후반 통신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는데, 그전 재산을 충청도 어디 개발 호재 첩보를 듣고 투자했다가 그 지역 주민 반대로 개발이 무산되어 자신의 돈은 물론이고 자신을 믿고 함께 투자한 지인들의 돈까지 다 날려서 그야말로 전 재산과 사람까지 잃은 뒤, 막노동을 전전하다, 지금은 호주에 산다는 선배 이야기.... 가출을 한 뒤 다방과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을 보내다가 착한 남자를 만나 인생이 백팔십도 바뀐 내가 아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 등등을...     


그 뒤, 내가 그랬다. 너무 화끈하고 화려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뒤 급자기 그 사랑이 식거나, 시련을 겪은 뒤 이혼하는 것보다는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그렇게 무덤덤하게 사랑을 이어가다 결혼하고도 그렇게 별 탈 없이 무탈하게 큰 기복 없이 그 사랑을 이어가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고. 그러니까 큰 행복 뒤에, 큰 불행이, 그리고 다시 큰 행복이 오는, 그런 높은 파도가, 밀물과 썰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삶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정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천천히 나아지고 발전하는 삶이, 사랑이, 그런 부부 관계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감독님이나 나나, 뭐 엄청 크게 좋은 일, 환호를 지를만한 큰 행운이 온 적은 없잖아요. 그런데 또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큰 불행이 온 적도 없고... 그러니까, 어쩌면 인생이란 게, 좋은 일이 없어서 불평할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이 없어서 감사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들어요. 저는 뭐, 딸이나 집사람한테 크게 바라는 게 없거든요.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갔으면 돌아올 때가 되면 안전하게 돌아오는 거, 집을 나서서 출근을 했으면 때가 되어 무사히 돌아오는 거, 그게 다예요. 그 뒤에 오늘 회사나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었던 일 얘기하면서 저녁 먹고... 그게 다예요. 엄청나게 큰 행운도, 좋은 일도, 빅뉴스도 없지만 불행도, 나쁜 일도, 아픔도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전 행복하더라고요.”     


일 년 내내, 언제나 막히는 동서고가도로의 서부산 구간에 들어섰다. 해가 길어져서 도시의 야경은 그제야 구색을 갖춰갔다. 그 구간을 지나, 동서고가도로로 서면 위를 지나가고 있을 때,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출발하셨나요?”

“네. 거의 다 왔어요.”

“아, 그래요. 좀 보고 싶네요.”

“아, 정말요?”

“아, 네.”

“저녁은 먹었어?”

“응. 밀면, 대연 밀면은 일찍 문을 닫아서. 가야 밀면에 시켜 먹었어.”

“맛있었어?”

“뭐, 그저 그랬어. 근데 양이 너무 많았어.”

“그랬구나. 알았어. 아빠는 거의 다 왔어. 쉬고 있어.”

“네.”     


집 앞에서 내려, 감독을 보낸 후, 근처 슈퍼에 가서 맥주를 사서 집에 들어갔다. 냉동만두와 유일하게 좋아하는 프랑크 소시지인 목우촌의 프랑크 소시지 몇 개를 함께 데워 저녁 겸, 안주 겸 먹었다. 아내는 TV가 볼 게 없다고 생뚱맞게 넷플릭스에서 베컴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난 그 옆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오랜만에 보는 90년대 중후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들의 얼굴을 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 유명한 베컴의 시메오네 발 걸기 사건을 보며 다시 한탄을 했고, 시메오네의 요즘 얼굴과 과거의 얼굴을 비교하며 시메오네는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올해 들어 가장 말을 많이 한 하루가 마무리 됐다.      


깔롱...은 경상도 사투리로, "까불다.","멋을 부리다.","재롱을 부리다."등에 두루 쓰인다.

주로 "깔로지다.", "깔롱지긴다(죽인다.)", "깔롱거리다.","깔롱대다."등의 형태로 쓰인다.

울산 토박이인 감독은 이 말과 함께 "까불락거린다."라는 표현도 자주 쓴다.

때문에 나도 종종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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