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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기 - 슬라보에 지젝

동해선에서 읽은 책 95

by 최영훈

독립과 등장의 흥분

책을 읽다 보면 흥분이 느껴질 때가 있다. 수십 페이지정도 읽어가다 보면 ‘야, 좀 달리는데.’하는 느낌이, 또는 ‘좀 업 되어 있는데.’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마치 블록버스터 첩보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잘 짜인 각본 속에 촘촘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와 쉴 새 없이 장소를 바꾸는 로케이션으로 이뤄진, 마치 007 영화처럼 말이다.


덧붙이자면, 이제 막 학위를 받은 사람이 자신이 공부한 걸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딘 끝에 그 모든 걸 그러모아 쏟아낸 느낌이었다. ‘야, 아주 신났네. 신났어.’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순간, ‘지젝이 나랑 나이가 비슷한가?’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해 보니 나보다 스무 살가량 많았다. ‘아니 그럼 이런 신바람과 패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하는 생각 끝에 책의 판본을 봤다.


책의 영문판은 1991년에 나왔다. 번역본은 1995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때, 지젝의 나이, 갓 마흔을 넘겼을 때였다. 프랑스에 공부를 한 뒤 조국에 들어와서 막 터를 잡았을 때 아닐까? 설마 하고 검색해 보니, 이 나라, 슬로베니아, 독립 선언이 1991년, UN의 승인이 난 것이 1992년이다. 자, 잠시 상상해 보자. 그 어렵다는 라캉의 이론을 아주 그냥 뼈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치열하고 가열 차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막 독립을 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동료들과 모여 애들도 가르치고 책도 쓴다. 이 신생국의 독특한 학자들의 글에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한다. 좀 있으니 이름도 붙여준다. 이름하야 슬로베니아 학파. 내가 좋아하는 레타나 살레츨도 그 일당이다. 당연히 신날 수밖에. 나라도 신났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조국의 이름이 붙은 학파의 수장이라니...


변방의 자신감

지젝의 이 책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건 단순히 라캉의 이론을 신생국의 학자가 소개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떡 주무르듯이 주무른 텍스트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다 미국과 영국의 대중문화였다는 점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스티븐 킹, 루스 랜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우, 알프레드 히치콕, 레이먼드 챈들러, 존 르 카레, 그리고 다들 분석의 숟가락을 얹고 싶어 하는 카프카까지. 물론 카프카는 다른 동네 사람이긴 하다만....


여하간, 이 점이 지젝과 이 책의 놀라운 점이다. 그의 책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이 책은 그가 얼마나 대중문화, 그것도 마니아적인 분야인 추리, 스릴러, 미스터리, 공포 분야에 열광하여 젊은 날을 보냈는지 체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얼마나 꼼꼼히 독해했으며 그 텍스트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지치지 않고 따라갔는지도 알 수 있다.


읽으면서 더 놀라웠던 점은 그가 영화와 소설과 같은 텍스트를 라캉의 이론으로 해석할 때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소한 난 그렇게 느꼈다. 게다가 그가 한 주제의 전개를 하나의 텍스트로 시작한 뒤, 수많은 다른 텍스트를 쉴 새 없이 불러와, 눈덩이처럼 불려 나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의 문장엔 망설임이 없다. “A는 B라고 볼 수 있다.”나, “A는 B라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와 같은 문장이 전혀 없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와 같은 문장이 대부분이다. 이런 문장들 속에서 그의 패기가,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느껴졌다.


뒤이어 말한, 눈덩이처럼 불려 나가는 텍스트의 연쇄적 호출은 소위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쉴 새 없는 중첩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의 타이핑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그의 강연 영상에서도 느낀 적이 있다. 꽤 오래전인데, 어느 방송에서 그의 강연의 전체 영상을 상영해 준 적이 있다. 그는 헤어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산발을 하고, 허름한 셔츠차림에 텅 빈 단상에 홀로 앉아 마이크를 들고 강연을 이어갔다. 그는 영어로 강의했는데, 그 말은 마치 타이핑을 치는 것 같았다. 어떤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 타라락 쳐지는 타이핑처럼 그는 생각의 덩어리를 말로 쏟아내는 것 같았다. 때문에 그의 강연엔 단락과 단락 사이, 말과 말 사이에 잠시 있어야 할 청자와의 호흡이나 청자의 음미 시간이 없었다. 그의 생각의 속도는 빨랐고, 그 양도 많았기 때문에 얼른 쏟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말은 쉴 새 없이 코를 만지는 그의 일종의 틱 증세 때문에 더 특이해 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강연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친절의 이유

그가 대중문화의 콘텐츠를 이렇게나 많이 인용하고 분석하여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책을 내는데도 그는 불편하게, 때로는 난해하게 읽힌다. 거기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라캉의 이론에 대해, 그 이론의 요소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저자 주와 역주가 길게 달리면 되겠지만 이 책은 물론이고 다른 책도 그런 걸 보기 힘들다. 지젝은 그 이론을 상대방이 어느 정도 안다고 가정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앞서 말했듯 생각의 양과 속도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하다가는 자신이 미쳐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럴지도.


다음으론, 그가 인용하는 대중문화, 즉 텍스트의 편향성이다. 난 오히려 이 점 때문에 그를 상대적으로 쉽게 읽고 심지어 이해를 더 잘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그가 인용하고 해석의 소재로 삼는 대부분의 텍스트들은, 앞서 말했듯 마니아 적이다. 서브 컬처적이라는 표현도 적절할 듯. 소위 명작으로 추앙받는 작품과 그 작가 - 조이스, 카프카, 카뮈, 심지어 셰익스피어까지 - 들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서브컬처다. 추리, 스릴러, 미스터리, 공포, 공상과학 등등... 영화와 소설, 심지어 TV 드라마 할 것 없이 말이다.


게다가 해석을 할 때, 앞서 말했듯, 텍스트 하나만 얌전히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 맞다. 이 영화 말하다 보니까 생각나는데, A영화도 같은 맥락에서...”식으로 생각이 튀어 나간다. 결국 이쪽 분야에 무관심하고 경험이 없는 독자의 입장에선 엄청 산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나 같은 독자들에겐 즐거움을 준다. “아, 그렇지. 그 영화가 나와야지.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 영화가 빠지면 섭섭하지.”하며 맞장구를 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린 독서의 난해함 하나를 파악할 수 있다. 텍스트의 내적 누적 없이 당면한 텍스트를 독해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책을 읽을 때 우리가 겪는 곤란함 중 하나는 눈앞에 있는 텍스트 안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의 교차로에서 엇갈리는 수많은 다른 텍스트들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야말로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라고만 읽게 된다.


이런 난해함은 독서의 진보의 발목을 붙잡는다. 수준적으로 수평적으로 읽으면서 양적인 누적은 가능하지만 수직적인 누적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있는 잘 팔리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옆에 있는 사람과 사고와 사유의 방식과 지평이 비슷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도약을 위해선 수많은 텍스트들이 하나로 모여 정교하게 짜여 있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하나의 텍스트에 도전해야 한다. 그 도전의 과정에서 실처럼 얽혀있는 다른 텍스트들 하나하나를 찾아보고 심지어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짜인 원래의 텍스트는 일종의 지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요약과 해석의 차이

문제는 우리의 이런 도약의 발목을 잡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우선은 조바심이 있다. 독서가 힙 하게 수용되는 요즘엔 더 그렇다. 뭐라도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여름을 앞둔 다이어터의 5월 같은 심정을 갖게 한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다이어트가 그렇듯, 독서 또한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물론 하루아침에 된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헬스장에도, 다이어트 약 시장에도, 그리고 출판계와 서점가에도 있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이어지는 데, 사회적 독서다. 혼자서 뭘 읽어 본 적 없는 사람은 초보 러너가 러닝 크루를 고르듯 독서 모임을 고르게 된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독서모임에서 고르는 책은 수평적 책이다. 평준화된 책이다. 오래 읽은 사람이든, 처음 책을 붙잡은 사람이든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임을 위한 책 고르기 얼마나 어려운지, 과거에 두어 번 경험한 적이 있다. 후배와 후배 친구를 데리고 독서 모임 비스름한 걸 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을 고르는 임무가 나에게 있었기에 그 과정 자체가 엄청 고역이었다. 또, 후에 독서 모임을 하는 한 사람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곤 했는데, 그때도 역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는, 요약의 시대다. 덧붙이면 해석을 거부하는 콘텐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역설적이게도 콘텐츠가 너무 많다 보니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걸 다 소비하기 위해 그 콘텐츠 전체를 독해하고 수용할 시간이 없다. 결국 책이든 영화든 요약된 걸 찾게 된다. 과거 VHS의 등장으로 영화를 빨리 돌리기 해서 보거나 주요 장면만 보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지금의 현상에 비하면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구나 싶다.


OTT도 해석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떤 감동도 바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시간을 죽이기(killing time) 딱 좋은 콘텐츠만 무한 유통한다. 소비자는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 아니 모바일 쇼핑을 하듯 스크롤을 하고 검색을 한 뒤 팝콘과 함께 연인을 부둥켜안고 콘텐츠를 소비한다. 보거나 읽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하는 것이다.


지젝의 까칠함

<낭만적 은둔의 역사>에도 나오듯, 과거 독서는 고독한 행위였다. 문맹률이 높고 교육의 기회는 적었던 시대에, 독서는 사치재였다. 그 후 지젝이 사랑해 마지않는 대중 문학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 산업 혁명 이후, 문맹률이 떨어지고 의무 교육이 일반화된 이후부터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생산되고 판매됐던 펄프 픽션(싸구려 종이로 만들었던 대중/통속 소설)과 페니 프레스(소위 황색 저널이라고 부른다. 가십 거리와 화제성 기사, 스포츠를 주로 다뤘다. 영국의 대중 신문의 뿌리다.)와 무성 영화의 등장 이후, 독서와 극장을 드나드는 행위는 “팝”적인 것이 됐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주말마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그런데 썼던 이유는 다른 노동자와 대화하기 위해서, 무리에 끼기 위해서, 서로의 동일성을 확보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소비 행위는 돌고 돌아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지젝의 90년대 저서는, 그리고 2천 년대의 저서까지, 소비를 거부한다. 텍스트의 중첩으로 만든 렌즈가 없는 사람에겐 절대 읽힐 수 없는 텍스트이길 고집한다. ‘읽지 않았으면 읽지 마라.’하고 말하는 듯한 그의 글은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대중문화를 인용하는 반대중적인 텍스트일 수밖에 없다. 읽히길 거부하는 책이다. 누구에게나 읽히느니 그냥 혼자 떠들고 말겠다. 이런 느낌이, 그의 반골 성향이 책에서 드러난다.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는 그의 강연처럼 그의 책은 그를 닮아 있다.


사족

책을 읽으면서 '언제 읽었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95년에 나온 책이라면, 어쩌면 대학원 시절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마 전문은 아닐테고 영문으로 된 논문의 조각 정도 아니었을까?


이 책이 다른 판본으로 나온다면 아마 엄청난 역주가 달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경진의 <노마디즘>처럼 두꺼워 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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