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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31. 2024

들뢰즈의 니체 - 들뢰즈

동해선에서 읽은 책 96

“철학은 역사적으로 퇴화하는 방식으로만, 자신에 적대하는 방식으로만, 그의 마스크에 집착하는 방식으로만 발전해 왔다. 능동적인 생과 긍정적인 사유의 통일성 대신에, 사상은 생을 재단하고, 소위 더 높은 가치들을 생에 대립시키며, 그러한 가치들에 따라서 생을 측정하며 제한하고 생을 단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된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의 두 가지 목적은 기성의 모든 가치들, 즉 생보다도 우월한 가치들에 대한 비판, 그러한 가치들이 의거하는 원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 다른 원리를 요청하는 생의 가치의 창조였기 때문이다. 해머(커다란 망치)와 가치전환. 그러나 철학이 퇴화하면서,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는 복종적인 철학자에게 자리를 양보 한다.”, PP32~33.     


변신

이 책 첫 장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에 나오는 변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낙타, 사자, 아이... 아이를 키워보면 이 과정이 역순으로 이뤄진다는 걸 알게 된다. 아이는 세상에 열려 있는 존재로 세상에 나온다. 그러다 서서히 “사람”의 존재감을 얻게 된다. 그야말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교육을 통해 길들여지는 듯하다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사자처럼 야수가 되어 온 세상의 가치와 심지어 자신을 키워준 부모와도 투쟁한다. 그 후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해주는 말처럼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철”이 들어간다. 세상의 가치와 의무와 삶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는 “낙타”와 같은 존재가 된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세상인데, 어떤 이는 종교를 갖고 계모임을 하고 정치도 하고 친목도 다진다.      


그러던 어느 순간, 멈춘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진다. 잃어버린 자신도 찾고 싶어 진다. 이런 얘기를 어디 가서, 누군가에게, 그것도 자신을 이해 주리라 기대했던 이에게 하더라도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다. 개가 늑대의 생각을 모르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저 순서를 밟는다. 먼저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난 왜 이 모든 것을 지고 있는가?      


결국 짐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규정하던 모든 규칙과 규범과 사회적 제약들을 해체한다. 조용한 야수성이다. 아직 사막의 낙타처럼 사는 사람들에겐 미친놈 취급당한다. 그러는 정작 본인은 조급하다.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선 일단 야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끝나면, 그제야 어린 시절의 마음, 어린이의 마음을 회복한다. 삶의 순간 속에서 영원의 충만을, 더 나아가 충만한 영혼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없어도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오감을 회복한다. 물론, 누구나 그러진 않는다.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짐을 지고 살아간다. 무겁든, 가볍든. 짐이 없다고, 질만하다고 스스로에게 돼 뇌이며 살아간다.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두에서 한 말이 사무치게 와닿는 순간이다. “삶은 기만을 원한다. 삶은 기만을 통해 유지된다.”     


분노와 의심

이 책은 들뢰즈가 쓴 책 중 가장 쉬운 책일지 모른다. 마치 “니체 사용 설명서”나 “니체 팸플릿” 같다. 낯선 도시에 여행을 갔을 때, 공항이나 역에 있는 여행안내센터에서 집어 들게 되는 관광 지도와 책자와 비슷하다. 지역을 간략하게 표현한 지도 위에 맛 집과 관광 명소가 소개되어 있고 즐길 거리와 쇼핑센터 등을 소개하고 있는 그런 책자들 말이다.      


심지어 니체가 자주 언급하는 주요 캐릭터에 대한 의미와 역할도 설명하고 있다. 또 주요 주제가 담겨 있는 문장을 니체의 저작 본문에서 발췌하여 싣고 있다. 이쯤 되면 마치 게임 설명서, 그걸 뭐라고 하더라, 게임 공략집이라고 하던가? 거 왜 게임 스테이지를 깰 수 있는 방법을 담은 소책자와 글 같은 거 말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일종의 들뢰즈 판 “니체 공략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공략법을 알아도 들뢰즈를 통해 니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 그냥, 니체를 이해하는 것은 조금 까다롭다. 아마 나를 포함해 다를 그럴 것이다. 그건 아마도 니체가 분노하는 지점, 역겨워하는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니체에 관해 쓴 책에서도, 또 니체의 저작에서도 느껴지는 분노가 있다.


“야, 이 병신들아, 너희들 속고 살았어. 사는 건 그런 게 아냐. 기독교의 신은 너희들 삶에 쥐뿔도 관심 없어. 그냥 너희들을 죄인으로 불러서 알아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야 신도, 교회도, 성직자도, 심지어 사회와 철학도 편하기 때문에 너희들한테 관심 있는 척하는 거야. 당연히 철학도 그런 게 아냐. 진짜 철학은 우리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거라고. 스스로 법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거라고. 하, 이 인간들 진짜.”     


난 그의 분노에 아주 지극히 공감한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그의 혐오에 대해서 더욱더. 이것은 그저 성경을 아는 것만으론 공감할 수 없는 분노다. 교리에 대한 지식의 보유와 함께 신앙생활을, 그것도 아주 오래 한 뒤 그것의 환멸을 느끼고 등져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분노의 지점이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 기독교에 반응하고 대적하기 위해 그 바벨탑을 쌓은 기존 철학에 대한 니체의 분노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즉 기독교, 그 신앙,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지식과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니체와, 들뢰즈의 니체 독해에 공감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철학이 전공이 아니고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닌 이의 철학과 인문학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와 동력엔 당연히 분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력원을 하나 더 꼽으라면 당연하게도 “의심”일 것이다. 분노와 의심은 당연한 것들에 대한 반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이끌어 왔던 그 무엇, 그러나 그 과정에서 뭔가를 희생시키거나 억압해 왔던 그 무엇에 대한, 그 무엇이 만들어낸, 그 무엇이 기원인 오늘의 현상에 대해 분노하고 의심을 품은 자들이 밥벌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이런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백상현이 책의 제목으로 빌려 온 라캉의 그 격언처럼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백상현이 말한 것처럼 “철학은 방황을 지지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잠 못 이룬 채 서성거리고 있을 의심하는 자와 분노하는 자의 편에 철학이 아니면 누가 서겠는가?     


그리하여 삶은

다시 첫 문장, 인용한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 “입법자로서의 철학의 두 가지 목적은 기성의 모든 가치들, 즉 생보다도 우월한 가치들에 대한 비판, 그러한 가치들이 의거하는 원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 다른 원리를 요청하는 생의 가치의 창조”임을 잊지 말자. 여기에 역자의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문제는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사상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난쟁이처럼 말로만 현란하게 떠벌리지 않고 온몸으로 사는 것일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 니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온몸으로 영원회귀의 생을 사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철학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와 니체는, 니체와 들뢰즈는 숙제를 내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다. 궁극적으로 철학의 질문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철학, 인문학 책을 읽든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같은 질문을 반복해 받으며 답을 찾고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겨우 다르게 살아야 함을 눈치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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